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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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 대잔치. 돈룩업은 현실이었음.


책을 중반부까지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리뷰창을 켰다. 


저자는 진실 사이사이에 헛소리를 교묘하게 끼워넣어서 자기 주장이 일견 타당한 것처럼 꾸며내는데 너무 역해서 끝까지 읽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일단 저자 또한 환경보호론자이고 기술발전이 인류를 기후위기에서 구원해줄것이라 굳건히 믿는 기술발전옹호론자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렇게 자극적인 목차와 근거를 뛰어넘는 주장을 이렇게 뻔뻔하게 책으로 펴내다니... 과연 이 책을 읽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많은 독자들이 앞으로 환경 보호에 신경을 쓰게 될까? 아마 어떻게든 채식을 하고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환경보호론자들을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런 어이터지는 목차를 쓴 것이라면 100퍼센트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샐런버거가 하려는 말을 요약하자면 이미 발전을 끝낸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제안하는 기후위기 해결방안은 현실과 괴리가 있으며 실행도 쉽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기후위기 해결방안, 즉 기술개발을 빡세게 해서 그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만이 답이다, 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기술발전의 혜택을 보기 전에 환경이 먼저 동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내가 빡치는 점은 이 책이 환경보호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환경보호론자들이 성취한 수많은 성과들이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저 기술진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셀런버거는 오히려 환경보호론자들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었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저자가 지 입맛에 맞는 일화만 쏙쏙 가져와 묘사한 덕택에 이 책만 읽고 환경보호론자를 본다면 두 개의 탈을 쓴 악마 내지는 논리없이 감성에만 호소하는 멍청이 둘중 하나로 보일 지경이다. 이게 '자칭' 환경을 보호한다는 저자가 할 말인가!


샐런버거의 주장은 논리의 흐름을 건너 뛰고, 중요한 사실은 간과하며 환경보호론자의 주장을 살짝 틀어 단순화하고 극대화하여 반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찾는다. 한마디로 너무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책은 환경보호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 앞으로도 쭈~~욱 관심없어도 된다는 개줫같은 면죄부를 준다는 점에서 아주 해악성이 짙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독자는 환경보호따위엔 신경쓸 필요 없이 그저 내 몸 편하고 나 편한대로 소비를 계속해도 되겠구나, 아니 그게 바로 환경보호에 바람직한 것이구나 하는 아주 아주 아주 잘못되고 답없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환경보호에 관심도 없고 그저 나 편한대로 살고싶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런 이기적이고 멍청한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면책해주는 개쓰레기 책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 한권만 읽은 이들(그들은 애초에 환경 보호에 관심이 없을 확률이 크다)은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쓰레기 배출을 줄이고, 채식을 하고 불편한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환경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살아? 오히려 소비가 환경보호를 가져온다고!' 이런 대가리 깡통 가득찬 발언을 내뱉으면서!



이 따위 종이뭉치를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는 군... 저자는 너무나도 기술진보를 찬양한 나머지 수많은, 그것도 다양한 층위에 걸쳐 분포하는 환경보호론자를 하나의 극단주의자로 싸잡아 비난하고, 몇 개의 개인적인 일화를 확대해석해 자신을 정당화하며 정작 기술진보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것이다' 라는 긍정성 가득한 주장만 내세울 뿐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온 근거는 아주 빈약하기 짝이 없다.



<7장>

와 7장에서 역대급 개소리 나와서 박제함.

"반면 육식이 비윤리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가축들은 '자유'를 얻는 게 아니다. '존재'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생명을 가진 존재를 만든 후 생명을 앗아가는 것보다 아예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가?" 이게 뭔 개소리지? 아니 애초에 이 두가지 사안은 비교불가능인데 셸렌버거 이새끼는 이 문장을 쓰면서 스스로도 궤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나? 그렇다면 진심으로 오로지 도축만을 위해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가축과 아예 육식을 안해서 그런 가축이 태어나지 않는 것 이 두개를 진심으로 비교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이새끼는 눈 뜬 그순간부터 감옥에 쳐넣어서 먹고 싸는것만 반복시킨 후 살만찌워서 자기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그게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건가? 아니;;; 너무나 놀랍구나. 아니 차라리 육식 자체를 지금당장 근절시키는 건 어려우니까 오히려 집약도 있는 축산으로 생산성을 늘리면서 대신 과도한 육류의 소비는 지양하자~ 뭐 이런 식으로 논리 전개를 하면 수긍이라도 하겠다만 이넘은 대체 먼정신으로 책을 써제낀거지;; 

심지어 이 다음 문단은 더 처참하다. 야생에서 송아지 한 마리가 코요테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을 보고 이새끼는 오히려 "현대적인 도살장에서 당하는 죽음을 선택할 것" 이라고 한다. 와우...아니 최소한 채식이 비논리적이라고 반대할거면 지는 논리적인 근거를 대야지 어쩌다가 보게 된 야생의 장면 하나만 보고 이렇게 확대해석해도 되는 건가. 이거야 말로 논리 없이 감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면 뭔데;; 체리피킹 정도도 아니다 이건. 애초에 야생에서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죽는거랑 인간의 탐욕스러운 식욕을 채우기 위해 도축되는 거는 비교불가라고 생각한다. 이 두개를 비교하려면 셸렌버거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야, 너 걍 지금처럼 잔인한 사회속에서 살래, 아니면 감옥 들어가서 평생 안온하게 살래? 왜? 감옥 싫어? 때되면 먹을거 주고 잠잘곳 제공해주고 얼마나 좋아? 야생과도 같은 잔인한 사회로부터 지켜주고 너가 노력하지 않아도 먹을것도 때되면 제공해주고 힘들게 빚내서 집구할 필요 없이 잠잘곳도 무료로 제공해주는데 왜? 감옥이 더 좋지 않아? 어?"



*

후반부로 갈수록 개소리 포텐이 터지는 듯 아주 구절구절 주옥같은 문장이 건빵 속 별사탕마냥 박혀 있어 도무지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p291 "탄수화물 섭취를 옹호하고 지방에 반대하는 십자군 운동은 환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건강에도 유익하지 못했다. 돼지를 더 살찌우는 대신 덜 살찌우는 비효율적 방식으로 기르도록 분위기를 몰아갔기 때문이다...사람들이 저지방 식단을 택해 비효율적으로가축을 기르면 결국 필요한 땅은 더 넓어진다." 

셸렌버거 이새기는 말싸움 하면 높은 확률로 이겼을거 같음. 왜냐면 어이나간 궤변을 진지하게 주장해서 상대로 하여금 투쟁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논리비약도 정도껏 해야지; 

허수아비때리기가 난무하는 책이고 이 문장에서도 어김없이 허수아비가 등장한다. 우선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채식주의자를 무슨 탄수화물 찬양론자로 몰아간거도 어이없는데 저지방 식단을 택해서 가축을 키우는 땅이 더 만힝 필요하다는 건 진짜;;; 이건 마치 플라스틱을 덜 써서 환경오염이 더 심해졌다는 소리와 궤를 같이하는 역대급 궤변인데...수요가 줄면 공급도 줄어든다는 기본적인 경제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차치하고서라도 육류에 대한 소비가 줄어든 것과 가축을 키우는데 더 많은 면적이 필요하다는 결론 사이에 논리적 비약이 너무 놀랍고 이런 개소리를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책으로 써갈겼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8장>

으음... 8장을 읽고 나서 알았다. 앞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논리터진 개소리 -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이 종이뭉치를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 - 의 향연은 바로 8장의 원자력을 향한 밑밥이었던 것이다. 물론 체르노빌로 인한 지역주민의 암 사망 기대치가 0.6퍼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나 후쿠시마 원전누출 사고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격적이지만 원자력이 환경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태양력이나 풍력이 원자력만큼의 아니 화력만큼의 효율성도 내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자력의 위험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건 너무하지않은가?)


하지만 원자력의 극적인 찬양을 위해 이렇게 앞에서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을 왜곡하고 호도하고 때론 놀랄정도의 악의를 가지고 환경주의자를 묘사해 놓은 부분 때문에 이 책 전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심지어 뒷부분으로 가면 환경주의자들을 마치 자기파괴적 신화에 사로잡혀 죽음만을 찬양하는 종교인들처럼 서술을 해놓았는데 기후위기와 그에따른 폐해를 시시각각으로 목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이런 주장이 그저 놀랍고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어쨌거나 간헐적으로 타당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셸렌버거의 원자력 찬양은 이해가 가는 바이나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앞으로 환경보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과의 공생을 위한 방법을 모색할지는 미지수다. 아마 이들 중 상당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소비만을 위한 소비를 하며 엄청난 쓰레기를 죽을때까지 배출하면서 살 것이고 이들에게 셸렌버거가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어떤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다.


책 후반부로 흐르면서 환경주의자들이 벌이는 다양한 노력은 오히려 환경에 해가 될 뿐이며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해왔던 것처럼 소비하고 개발하며 살자, 그러면 기술발전이 알아서 환경오염까지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믿기힘든 저자의 낙관론은 일견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도 개입하지 않고 그저 시장이 굴러가는대로 놔두어야만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며 시장이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는 그 논리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정부의 개입이 없는 시장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건 셸렌버거의 주장에도 마찬가지다. 수십년에 걸친, 환경주의자들의 다양한 노력들 덕분에 우리 모두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고 오염을 줄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그가 기술예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여러 사례들 - 기술발전이 환경오염을 막아낸 사례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의식 변화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무작정 개발만 한다고 환경이 알아서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점을 항시 주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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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2-02-09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글이네요. 저도 8장 읽고 나서 아 그래서 이 새끼가 그렇게 환경론자들을 증오했구나.. 이런 생각.
 
파워 오브 도그
토머스 새비지 지음, 장성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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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막한 서부, 추방과 혐오 그리고 상냥함에 대하여


책의 마지막장을 덮자마자 영화를 틀었는데 소설보다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각색이 무척이나 잘된데다가 영화만이 가진 장점을 십분 발휘해 필과 로즈 그리고 피터 사이의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 음악 및 연출을 통한 인물의 심리묘사, 그리고 광막하고도 황량한 서부를 너무나도 훌륭히 담아내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 것을 땅치고 후회했다...아마 줄거리를 모른 채로 봤으면 장면과 연출에 압도당해 어라이벌 급으로 기억에 남았을 듯한데 ㅜㅜ 이래서 상영관에 걸렸을 때 주저말고 봐야 한다...


책을 봤을 땐 온갖 장점과 찬양을 때려박았지만 결국 나이 40먹고도 자라지 못한 필이라는 인간에 대해 한심하고 답답한 마음이 컸는데 영화를 보니까 필이 너무나도... 짠한거다. 특히 마지막에 소년 어딧냐며 찾는 모습까지... 결국 인간이 사는 데 필요한건 인정일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인간 말이다...이 '있는 그대로' 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건 알지만, 필도 복수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했던 (거기다 혐오하기 마지않았던) 피터가 자신을 인정(?) 하자마자 피터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던 것처럼...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잘될거라고..지켜줄거라고? 뭐 그 엇비슷한 말 햇잔아...


Be kind, for everyone is fighting a hard battle. 영화 원더를 보면서 가슴에 남은 대사인데 필이 죽을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른 구절이기도 하다. 결국 작은 선의, 최소한의 배려 내지는 상냥함이 필에게 있었더라면 이 파국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해 세상을 혐오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고슴도치마냥 겉으로 내찌른 가시 때문에 스스로마저 파멸로 이끈 삶 속에서 필은 행복을 찾은 적이 있었을까? 아, 있었겠네...브롱코 헨리와 함께하던 시절...


무튼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책...이자 영화이다. 보통 책 원작 영화이면 책을 뛰어넘기가 힘든데 파워 오브 도그는 영화랑 책 중 둘중 하나를 고르라면 영화를 고르겠다! 둘 중 뭐부터 먼저 볼지 고민이 된다면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게 좋을 듯 싶다. 그만큼 영화의 연출과....배경과 음악활용, 인물들의 연기가 정말 뛰어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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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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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세계와 반복되는 일상, 그 안에서 삶의 의미 찾기


어떤 SF 소설들, 그러니까 지구의 종말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을 가만 읽다보면 현실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종말'을 통해 오히려 깊고 투철하게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소설들은 세상을 뒤집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 삶 속에 너무 깊게 침투해있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해 준다. 


'단절' 또한 그런 소설이다. 선 열병에 감염된 사람들, 황량해지는 도시, 죽어가는 사람들 만큼이나 죽어가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이 모든것을 극대화 해주는 것은 기억 회상을 통한,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과의 대비이다. 


어쩌면 '단절' 이라는 것은, 선 열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예방책이 아닐까? 주인공 캔디스가 선열병에 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을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가 거의 단절의 인간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애착 내지는 집착, 향수를 느끼는 것들과 단절되었기 떄문일 수도 있다. 우선 그의 뿌리부터 살펴보자. 캔디스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단절을 적극적으로 쟁취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어렸을 적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캔디스에게 말해 주었는데 캔디스는 이것을 제 아버지가 마침내 고향인 푸저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냈고 즈강이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꼈기에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머니 쪽은 어떤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비자발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단절된 인물이다. 아버지 즈강이 자신의 성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면, 어머니 루이팡은 미국에 대한 애매한 환상과 배우자인 아버지의 설득, 그리고 현실적인 여건 등으로 즈강보다는 덜 적극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 이유로 루이팡은 계속해서 중국 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딸인 캔디스에게도 계속해서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이어주고 싶어했다. 


이제 우리의 주인공, 단절의 인간화 캔디스를 살펴보자. 중국계 이민자로서, 캔디스는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바다 건너 중국에 있다. 그리고 문화적, 거리적 차이로 친척들에게 그다지 많은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 캔디스는 아버지를 잃었고, 4년 후에 어머니도 잃었다. 부모님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만한 물건들은 모두 창고 속에 처박아 버린 채, 캔디스는 정처없이 뉴욕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완전히 고립된 캔디스에게 조너선이라는 연결고리가 생기는가 싶었지만, 선 열병이 뉴욕을 집어삼키기 직전 조너선과도 헤어진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이라곤 머그컵 안에 든 교정유지장치 뿐. 만약 선 열병을 촉발시키는 게 곰팡이 포자 뿐만 아니라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강한 향수라면, 캔디스 만큼 선 열병에 걸리기 어려운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선 열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기억으로부터, 아니 기억이 불러오는 강한 향수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자신을 뒤흔들만 한, 따뜻하면서도 가슴 깊이 울렁이는, 그런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의미니까. 아니면 적어도 그런 기억상자를 열어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속 깊은 곳에 그 기억상자를 묻어버렸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괴롭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을 때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평화로운 내면을 경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반복되고 익숙한 루틴이 주는 평안함 속에서, 그들의 향수가 촉발시킨 그리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을 테니까.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카고로 간 캔디스는 결국 선 열병에 걸렸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미국 그 어느 지역에도 강렬한 어릴적 향수를 남기지 못한 캔디스는 소설 후반부 조나선의 기억을 제 기억처럼 체화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기억을 자신의 것이라 스스로 믿어버린 것처럼. 조나선이 시카고에 대해 느꼈던 강렬한 애착과 그리움, 평안한 감정 등등을 캔디스도 곧 느끼게 되겠지. 그리고 그것은 캔디스에게 이미 내재된 선 열병의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지난해부터 조너선은 뉴욕에서의 삶에 부쩍 강한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 뉴욕이라는 빌어먹을 도시, 진정성이라고는 없이 허울뿐인 데다가 실체 없는 매력으로 사람을 홀리는 지루하고 답답한 도시 등등 운운하며 끝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조너선이 보기에 모든 것이 시눕ㄴ의 상징이었고 모든 일에 과도한 비용이 들었다.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소비자도, 유행하는 디저트니 겉치장만 요란한 미술 전시회니 새로운 콘셉트 스토어니 하는 것들을 경험하겠다고 블록마다 긴 대기 줄을 마다하지 않고 서 있는 소비자도 지나치게 많았다. 우리는 전부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선택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그러니까 나도 포함된 우리. - P21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회사원 생활을 유지하면서 달빛이 고와너스 지역을 물들일 때마다 카메라로 사진이나 찍으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그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처럼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시간을 흘려보내며 사는 사람이었다. - P21

그렇다면 가족의 소유물이 남아 있는 창고에 가 보게 되려나. 그런데 그곳은 그저 차디찬 상자 모양의 보관 시설일 뿐이다. 언젠가 솔트레이크시티 근처에 가닿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아마 계속 가던 길을 갈 것이다. 추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몹시도 우울하고, 영혼이 산산조각 날 만큼 몹시도 슬픈 일이다. 과거는 일종의 블랙홀로, 현재로 침투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처를 남기며 과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니 계속 움직여야만 한다. - P198

나는 위아래가 거꾸로 된 애슐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애슐리는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나를 인식하지도 못했다. 동공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눈빛은 뭐랄까, 누군가가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거나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을 때의 눈빛과 가장 흡사하다. - P211

시카고에서는 밀워키 길에 있는 빨래방 위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조너선이 말했다. 도심으로 나갈 때면 아파트 바로 앞 정류장에 서는 56번 버스를 탔다고 했다. 이따금 그저 출퇴근만 하면서 한 거리 위만 오가는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평일 밤과 주말에는 글을 쓰고 평일 아침이 오면 출근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그길로 일터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 P227

타임스스퀘어에 모인 군중이 나를 맞이했다. 뉴욕은 정말 대도시였다. 뉴욕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선택지는 저녁 식사 자리의 앙트레와 칵테일, 나이트클럽에서 내는 봉사료처럼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다. 길거리 곳곳의 대형 체인 매장들도 묵직하게 울리는 베이스 소리와 화려한 조명으로 쇼핑을 부추겼다. 의류제조업체가 해외로 이전하면서 몇 블록 정도 되는 크기로 규모가 줄어든 가먼트 지구에서는 도매상점들이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 수입한 작물과 장신구들을 판매했다. - P259

루이팡이 입은 남색 셔츠 드레스는 푸저우에서라면 세련돼 보였을 옷이었지만, 데님 미니 스커트와 어깨끈이 가느다란 드레스를 입은 무리 속에 있으니 지극히도 보수적인 차림새로 보였다.
영어가 유창했더라면, 수줍어하며 머뭇거리는 태도를 극복할 수 있었더라면 루이팡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꺼이 털어놓았을 터였다. 푸저우에 살 때 공인 회계사로 일했다는 얘기도, 담당 고객 중에 다양한 지자체 공무원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했을 것이었다. 여동생들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시골로 쫓겨나 수년간 단순 노동을 해야 했단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자신은 푸저우에 남았을 정도로 중요한 일을 했다는 얘기도. - P282

난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단,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난 널 너무 잘 알아. 넌 이상주의자처럼 사는 사람이지.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 일정한 수입도, 의료보험도 없으면서, 툭하면 일도 그만두고 넌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넌 철두철미하게 자린고비처럼 아끼고 아껴가며 볼품없고 값싼 삶을 살고 있을 뿐이고 그런 삶 역시 자유는 아니야. 넌 외접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어. 불법 복제 영화를 보고 1달러짜리 조각 피자를 먹으면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 그 변두리만 돌고 도는 거지.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자기 신념을 붙들고 사는 너를 - 고결하다고 생각했고 - 동경했었지만, 그런 네 삶의 방식을 5년간 지켜보면서 난 조금 바뀌었어. 이 세상에서는 돈이 자유야. 이탈하는 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야. - P335

나는 언제나 뉴욕의 현실보다 뉴욕의 신화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인간이었다. 뉴욕에 그렇게나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도 어떤 것의 본질보다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더 사랑해서였다. - P416

블로그 독자들이 남긴 요청을 나는 내가 주어진 임무로 삼았다.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그 결과를 블로그에 게시했다. 요청 사항을 지역별로 분류한 다음 임무 수행 일정을 계획했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날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쁨이었다. - P417

어쩌면 오늘이 계약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잠재의식이 나를 밖으로 끌어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더 이상 스펙트라와 맺은 계약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게 과연 중요하기는 한 걸까? 아빠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일은 그 자체가 보상이란다.‘ 일은 그 자체로 위안이기도 했다. - P440

캔디스 씨는 젊어요, 마이클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어쩌면 캔디스 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단지……나는 당황한 나머지 쩔쩔매며 적절한 말을 떠올려 보려 했다. 저는 단지 제 삶의 폭이 이렇게 순식간에 좁아 드는 게 내키지 않아서요. 일 자체는 괜찮습니다만, 여기에 평생 몸담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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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rthian Tales 어션 테일즈 No.1 - alone
김보영 외 지음 / 아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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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한국 SF의 미래를 물어본다면 어션테일즈를 읽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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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나의 세계
뫼비우스 지음, 장한라 옮김 / 교양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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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세계, 결말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상당히 두껍고 무거움. 무기로 써도 될 거 같다. 그리고 담긴 내용은 책의 물리적인 무게보다 더 무겁고 심오하다. 


SF라는 장르를 빌려와 인간의 정신세계를 깊게 탐구한 작품. 책 중후반부로 가면 꿈과 환상 그리고 현실이 뒤섞여 전개되면서 마치 인셉션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이 아니겠지?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르겠는 상태로 한데 엉켜 끝까지 굴러가다 보면 결국 이 모든 세계가 뫼비우스 마냥 얽혀있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나도 내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상태야말로 이 책에 걸맞는 후기가 아닐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세명의 코쟁이들이다. 코쟁이...귀여웠어. 특히 스텔이 우주선 고치다가 그대로 도망가 버린 줄 알고 황무지 한가운데서  셋이 당황하는 모습은 이 책에서 얼마 없는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에데나의 세계는 마치 작가의 생각과 영감의 파편들을 도토리 모으듯이 박박 모아놓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책이다. 만화로 구성되어 있어 읽기 수월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글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상상력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이 책은 한번만 읽을 책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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