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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평점 :
개소리 대잔치. 돈룩업은 현실이었음.
책을 중반부까지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리뷰창을 켰다.
저자는 진실 사이사이에 헛소리를 교묘하게 끼워넣어서 자기 주장이 일견 타당한 것처럼 꾸며내는데 너무 역해서 끝까지 읽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일단 저자 또한 환경보호론자이고 기술발전이 인류를 기후위기에서 구원해줄것이라 굳건히 믿는 기술발전옹호론자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렇게 자극적인 목차와 근거를 뛰어넘는 주장을 이렇게 뻔뻔하게 책으로 펴내다니... 과연 이 책을 읽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많은 독자들이 앞으로 환경 보호에 신경을 쓰게 될까? 아마 어떻게든 채식을 하고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환경보호론자들을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런 어이터지는 목차를 쓴 것이라면 100퍼센트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샐런버거가 하려는 말을 요약하자면 이미 발전을 끝낸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제안하는 기후위기 해결방안은 현실과 괴리가 있으며 실행도 쉽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기후위기 해결방안, 즉 기술개발을 빡세게 해서 그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만이 답이다, 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기술발전의 혜택을 보기 전에 환경이 먼저 동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내가 빡치는 점은 이 책이 환경보호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환경보호론자들이 성취한 수많은 성과들이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저 기술진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셀런버거는 오히려 환경보호론자들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었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저자가 지 입맛에 맞는 일화만 쏙쏙 가져와 묘사한 덕택에 이 책만 읽고 환경보호론자를 본다면 두 개의 탈을 쓴 악마 내지는 논리없이 감성에만 호소하는 멍청이 둘중 하나로 보일 지경이다. 이게 '자칭' 환경을 보호한다는 저자가 할 말인가!
샐런버거의 주장은 논리의 흐름을 건너 뛰고, 중요한 사실은 간과하며 환경보호론자의 주장을 살짝 틀어 단순화하고 극대화하여 반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찾는다. 한마디로 너무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책은 환경보호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 앞으로도 쭈~~욱 관심없어도 된다는 개줫같은 면죄부를 준다는 점에서 아주 해악성이 짙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독자는 환경보호따위엔 신경쓸 필요 없이 그저 내 몸 편하고 나 편한대로 소비를 계속해도 되겠구나, 아니 그게 바로 환경보호에 바람직한 것이구나 하는 아주 아주 아주 잘못되고 답없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환경보호에 관심도 없고 그저 나 편한대로 살고싶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런 이기적이고 멍청한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면책해주는 개쓰레기 책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 한권만 읽은 이들(그들은 애초에 환경 보호에 관심이 없을 확률이 크다)은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쓰레기 배출을 줄이고, 채식을 하고 불편한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환경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살아? 오히려 소비가 환경보호를 가져온다고!' 이런 대가리 깡통 가득찬 발언을 내뱉으면서!
이 따위 종이뭉치를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는 군... 저자는 너무나도 기술진보를 찬양한 나머지 수많은, 그것도 다양한 층위에 걸쳐 분포하는 환경보호론자를 하나의 극단주의자로 싸잡아 비난하고, 몇 개의 개인적인 일화를 확대해석해 자신을 정당화하며 정작 기술진보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것이다' 라는 긍정성 가득한 주장만 내세울 뿐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온 근거는 아주 빈약하기 짝이 없다.
<7장>
와 7장에서 역대급 개소리 나와서 박제함.
"반면 육식이 비윤리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가축들은 '자유'를 얻는 게 아니다. '존재'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생명을 가진 존재를 만든 후 생명을 앗아가는 것보다 아예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가?" 이게 뭔 개소리지? 아니 애초에 이 두가지 사안은 비교불가능인데 셸렌버거 이새끼는 이 문장을 쓰면서 스스로도 궤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나? 그렇다면 진심으로 오로지 도축만을 위해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가축과 아예 육식을 안해서 그런 가축이 태어나지 않는 것 이 두개를 진심으로 비교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이새끼는 눈 뜬 그순간부터 감옥에 쳐넣어서 먹고 싸는것만 반복시킨 후 살만찌워서 자기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그게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건가? 아니;;; 너무나 놀랍구나. 아니 차라리 육식 자체를 지금당장 근절시키는 건 어려우니까 오히려 집약도 있는 축산으로 생산성을 늘리면서 대신 과도한 육류의 소비는 지양하자~ 뭐 이런 식으로 논리 전개를 하면 수긍이라도 하겠다만 이넘은 대체 먼정신으로 책을 써제낀거지;;
심지어 이 다음 문단은 더 처참하다. 야생에서 송아지 한 마리가 코요테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을 보고 이새끼는 오히려 "현대적인 도살장에서 당하는 죽음을 선택할 것" 이라고 한다. 와우...아니 최소한 채식이 비논리적이라고 반대할거면 지는 논리적인 근거를 대야지 어쩌다가 보게 된 야생의 장면 하나만 보고 이렇게 확대해석해도 되는 건가. 이거야 말로 논리 없이 감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면 뭔데;; 체리피킹 정도도 아니다 이건. 애초에 야생에서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죽는거랑 인간의 탐욕스러운 식욕을 채우기 위해 도축되는 거는 비교불가라고 생각한다. 이 두개를 비교하려면 셸렌버거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야, 너 걍 지금처럼 잔인한 사회속에서 살래, 아니면 감옥 들어가서 평생 안온하게 살래? 왜? 감옥 싫어? 때되면 먹을거 주고 잠잘곳 제공해주고 얼마나 좋아? 야생과도 같은 잔인한 사회로부터 지켜주고 너가 노력하지 않아도 먹을것도 때되면 제공해주고 힘들게 빚내서 집구할 필요 없이 잠잘곳도 무료로 제공해주는데 왜? 감옥이 더 좋지 않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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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갈수록 개소리 포텐이 터지는 듯 아주 구절구절 주옥같은 문장이 건빵 속 별사탕마냥 박혀 있어 도무지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p291 "탄수화물 섭취를 옹호하고 지방에 반대하는 십자군 운동은 환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건강에도 유익하지 못했다. 돼지를 더 살찌우는 대신 덜 살찌우는 비효율적 방식으로 기르도록 분위기를 몰아갔기 때문이다...사람들이 저지방 식단을 택해 비효율적으로가축을 기르면 결국 필요한 땅은 더 넓어진다."
셸렌버거 이새기는 말싸움 하면 높은 확률로 이겼을거 같음. 왜냐면 어이나간 궤변을 진지하게 주장해서 상대로 하여금 투쟁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논리비약도 정도껏 해야지;
허수아비때리기가 난무하는 책이고 이 문장에서도 어김없이 허수아비가 등장한다. 우선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채식주의자를 무슨 탄수화물 찬양론자로 몰아간거도 어이없는데 저지방 식단을 택해서 가축을 키우는 땅이 더 만힝 필요하다는 건 진짜;;; 이건 마치 플라스틱을 덜 써서 환경오염이 더 심해졌다는 소리와 궤를 같이하는 역대급 궤변인데...수요가 줄면 공급도 줄어든다는 기본적인 경제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차치하고서라도 육류에 대한 소비가 줄어든 것과 가축을 키우는데 더 많은 면적이 필요하다는 결론 사이에 논리적 비약이 너무 놀랍고 이런 개소리를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책으로 써갈겼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8장>
으음... 8장을 읽고 나서 알았다. 앞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논리터진 개소리 -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이 종이뭉치를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 - 의 향연은 바로 8장의 원자력을 향한 밑밥이었던 것이다. 물론 체르노빌로 인한 지역주민의 암 사망 기대치가 0.6퍼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나 후쿠시마 원전누출 사고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격적이지만 원자력이 환경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태양력이나 풍력이 원자력만큼의 아니 화력만큼의 효율성도 내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자력의 위험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건 너무하지않은가?)
하지만 원자력의 극적인 찬양을 위해 이렇게 앞에서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을 왜곡하고 호도하고 때론 놀랄정도의 악의를 가지고 환경주의자를 묘사해 놓은 부분 때문에 이 책 전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심지어 뒷부분으로 가면 환경주의자들을 마치 자기파괴적 신화에 사로잡혀 죽음만을 찬양하는 종교인들처럼 서술을 해놓았는데 기후위기와 그에따른 폐해를 시시각각으로 목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이런 주장이 그저 놀랍고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어쨌거나 간헐적으로 타당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셸렌버거의 원자력 찬양은 이해가 가는 바이나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앞으로 환경보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과의 공생을 위한 방법을 모색할지는 미지수다. 아마 이들 중 상당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소비만을 위한 소비를 하며 엄청난 쓰레기를 죽을때까지 배출하면서 살 것이고 이들에게 셸렌버거가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어떤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다.
책 후반부로 흐르면서 환경주의자들이 벌이는 다양한 노력은 오히려 환경에 해가 될 뿐이며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해왔던 것처럼 소비하고 개발하며 살자, 그러면 기술발전이 알아서 환경오염까지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믿기힘든 저자의 낙관론은 일견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도 개입하지 않고 그저 시장이 굴러가는대로 놔두어야만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며 시장이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는 그 논리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정부의 개입이 없는 시장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건 셸렌버거의 주장에도 마찬가지다. 수십년에 걸친, 환경주의자들의 다양한 노력들 덕분에 우리 모두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고 오염을 줄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그가 기술예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여러 사례들 - 기술발전이 환경오염을 막아낸 사례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의식 변화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무작정 개발만 한다고 환경이 알아서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점을 항시 주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