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쟁이 열세 살 사계절 아동문고 59
최나미 지음, 정문주 그림 / 사계절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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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신문을 펼쳐 헤드라인을 쭈욱 훑어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나의 오래된 습관인데 요즘은 문득 이런 바램이 생겼다. 내게 오는 신문에는 사건 사고란을 제외시키고 보내주었으면 하는...... 오늘 아침에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이 ‘TV를 그만보고 공부를 하라’는 엄마의 꾸지람을 듣고서 홧김에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초등학생의 자살이라니! 그것도 어제 내가 읽었던 동화책 주인공의 나이와 같은 열세 살짜리 어린 아이라는 점이 너무나 섬뜩하도록 눈에 들어왔다.

사실 어제 읽은 ‘걱정쟁이 열세 살’은 상상과 웃음이 가득한 전형적인 동화(fairytale)에 가까울 것이라는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작품이었다. 동화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숙하고 생각이 많은 어른아이 상우와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눈쌀을 찌푸릴 만큼 되바라진 상은이, 그리고 삶의 고단함과 상처가 고스란히 조울증 증세로 나타나고 있는 엄마까지 어느 하나 동화에 나올법한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거리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사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책의 중반이 넘어서면서 내가 기대하던 꿈의 나라, 환상의 나라 이야기 대신 누구도 별 관심없이 지나치는 도로 정리가 되지 못한 오래된 동네의 구불구불한 뒷골목을 지나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나를 압도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작고 수리할 곳이 많아 보이는 낡은 지붕을 얹은 집과 꼭대기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감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겨울을 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힘없는 불빛이 어스름한 골목을 비취고 있는 조용한 집 앞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동화가 이렇게 어두워서야 어떻게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줄 수 있을까! 물론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니 인간세계의 어려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필요하긴 하겠지만 현실세계도 복잡한데 동화만이라도 이 메마른 현실 밖 너머의 촉촉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한 편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면서 끝을 맺었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어른의 세계를 닮지 않은 완전한 선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그런 완벽한 장면들로 한 장 한 장 채워지는 것이어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사건을 보고서 아이들을 위한 진짜 동화가 무엇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장난도 잘 치고 감정표현도 스스럼없이 곧 잘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내면도 과연 그런 것일까? 오히려 자신의 문제와 열등감을 감추려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다시 어제 읽었던 상우의 생각과 행동을 되 짚어보면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고 들켜서도 안 된다며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도 천진스런 얼굴을 하느라 더욱 고통스런 아이의 비명을 들은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장 친한 석재와도 나눌 수 없었던 너무나 무겁고 창피한 짐.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곁에 없어서 보고 싶고 필요하고 그리워서 힘든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이웃들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사실이 탄로날까봐 두려움이 떠는 고통이 훨씬 더했다는 점에서 상우가 안쓰러웠다. 엄마와 누나와만 살고 있는 집을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집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속에서 정상적인 아이가 되고 싶어했던 상우의 고뇌와 그런 아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굳이 아는 척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염려했던 상우엄마의 촉촉하게 젖은 눈을 보며 안심이 되었다.



정말 부모의 이혼이 어린 아이들 사이에 그토록 이해받기 어려운 문제일까를 생각해보았다. 그보다는 이유를 불문하고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와 얕잡아보는 시각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지를 알면서도 쉽게 사회적인 편견에 가슴 아파하는 어린 아이들의 다독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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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함께 사계절 아동문고 58
하나가타 미쓰루 지음, 고향옥 옮김, 이선민 그림 / 사계절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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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함께

포치와 함께 노는 아이, 지능이 약간 모자란 듯함, 운동신경의 발달이 늦음

도키오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판단이다.



하지만 나는 형 다카시에 대해서 더 마음이 찡하다. 6살이나 어린 도키오가 때어나자마자 엄마의 관심과 보살핌에서 자연스레 멀어진 아이,”너는 형이니까 참아야 해!” 엄마의 한 마디 말을 엄마가 살아있을 때부터 엄마의 사후까지 지키며 엄마 품에 안기고 싶은 것도 참고 응석을 부리며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것도 참고, 단 둘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곤거리고 싶은 것도 포기하고 오직 의젓한 형이 되어버린 아이. 그 아이를 만나자마자 내 마음이 뭉클하다. 엄마는 늘 도키오랑 같이 있다. 도키오의 웅얼대는 듯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루해하지도 않고 듣고 또 들으면서도 따뜻하고 사랑스레 도키오를 바라본다.

엄마가 죽은 후 다카시는 엄마가 했던 것처럼 혼자 노는 아이 도키오의 유치한 이야기를 애 써 들어주고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엄마의 교훈을 유언처럼 지킨다. 다카시 역시 아직 도키오와 별 반 다르지 않은 어린아이면서도 의지적으로 형의 역할을 감당하느라 온 몸의 에너지를 다 짜내고 있는 것을 본다. 엄마의 죽음으로 도키오가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가족 누구나 인식하며 인정하는 일이지만 도키오보다 엄마랑 함께 한 시간이 훨씬 많은 다카시의 충격에 대해서는 어느 곳에서도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도키오보다 오히려 다키시가 더 걱정이 된다.

엄마와 자신의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 동생이 싫고 밉살스럽다가도 자신과 쨉도 되지 않게 너무나 약해 병치레가 많은 동생을 엄마가 안고 병원으로 갈 때마다 뒤에 남아서 함께 걱정했던 아이. 엄마가 죽은 후 마음의 문을 닫고 누구와도 대화를 단절한 어린 동생의 자리를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더 열심히 공부하며 위태한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던 아이가 눈에 선하다. 감기에 걸린 도키오도 염려가 되었지만 감기가 오래되어 폐렴이 되어버린 다카시가 더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 그 동안 도키오의 눈에만 보이던 하늘색 비늘이 덮은 용 포치가 다카시의 눈에도 선명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정작 다카시는 아파트 14층 꼭대기 난간에서 포치를 따라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위태한 도키오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발이 붙어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 또 한 번 영원한 이별을 하려는 어린 동생의 맹렬한 몸부림과 벌써 이 세상의 영역이 아닌 하늘 권을 유유히 날며 동생을 데려가려는 엄마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엄마라니! 아무리 겉으로 태연한 척 애쓰며 살아온 다카시에게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 사무치도록 깊은 것이었다. 엄마는 살아있을 때도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했는데 지금 그 엄마가 동생을 데리러 온 것이다! 다카시는 입으로 불을 뿜는 성난 포치의 행동에 눌리지 않고 동생을 향한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에서 생전의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용으로 변한 엄마가 동생만 데리러 온 것이 서운해 질투가 난다거나 엄마를 따라가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억지로 놀아주고 형으로서 애 쓰고 있다는 생색을 내는 이기적인 형아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여린 동생을 붙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자존심 강한 아이 다카시가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아버지와 도키오가 듣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상상 속의 용 포치에게 “도키오를 제발 데려가지 말아줘, 엄마!” 라고 간절하게 소리내어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옥상 난간에서 마지막 한 발 마저 떼려고 하는 동생을 막은 것은 다카시였다. 모자란 아이, 재미없고 따분한 걱정스런 아이라고 은근히 평가절하며 자신과 통하는 면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했던 그 동생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헤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내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연민이나 동정과는 분명히 다르다. 신체조건이나 사고능력, 취향을 가려가며 사귀는 것은 비판 받을 일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가족은 그 보편성을 뛰어 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니 가족이기 때문에 그 탄탄한 보편성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는 신체장애의 벽보다 가족 안에 서로 치고 있는 상처 난 감정들과 피해의식의 장벽이 훨씬 더 거대한 것 같다. 너무 높고 단단해서 결코 작은 구멍 하나도 뚫기 어려워 상대방의 벽 근처에 갔다가 그만 주눅이 들어 다시 자신의 안전한 영역으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가? 용과 함께는 엄마의 죽음으로 한 벽면이 폭탄 맞은 듯 무너진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어지는 지를 보여주었다.

 

가장 문젯거리라며 덤탱이를 써 왔던 도키오를 다카시가 “형이니까 참아야 해!” 식의 어거지 의지의 사디리에서 내려와 진심으로 한 인격체와 같은 높이에서 손을 잡는 화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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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
김범진 지음, 임승현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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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0‘C 최고의 나를 만나라!

'나는 앞만 보고 달려왔지, 그래서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없었어.' 이 말은 온 힘을 다 해 네 자녀를 키우다가 2년 전 젊은 나이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외삼촌께서 남기신 자기고백의 일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일에 몰두하다가 치열한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찾아온 병마에 의해서, 혹은 예기치 못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후, 그것도 아니면 외삼촌처럼 생을 갑작스럽게 마감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 동안 틀어막아두고 들으려하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다소 거북스러울 정도로 단정적 어투로 독자들을 선도하는 자기계발서는 많이 만나보았는데 이 책은 처음 잡을 때부터 어린시절 익숙한 하드커버부터 시작해서 chapter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알록달록한 그림, 거기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거북이 슬론까지 동화를 읽는 것 같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으며 마음 넉넉하게 한 자리에서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함'이 매력이었다.


그 동안 보았던 자기계발에 대한 지침서가 심기가 불편할 정도로 줄을 쳐 가며 그렇게 어렵게 읽어야만 했었나 라는 반문과 함께 이렇게 쉬우면서도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독자 스스로 생각해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끔 사고의 흐름을 인도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며 특징인 것 같다.

하지만 chapter는 경쟁에서 시작해서 경쟁으로 끝을 맺는다.

처음의 경쟁은 본질과는 상관없는 현상을 말하지만 마무리의 경쟁은

저자가 내린 결론이며 읽는 이들에게  그렇게 살라는 일종의 지침인데

매우 참되며 깊이가 있는 반면 조금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아

 

진정한 경쟁의 의미가 남을 짓밟고 얻는 승리가 아니라 세상의 유일무이한 나를 찾고 발견하는 것

그래서 그런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하고  그 결실을 세상에 내 놓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에서 끝맺음을 하고 있는데 이 책을 읽는 대상이 직업과 적성을 고민하는 청소년, 젊은이들에게  는 매우 적절하며 탁월한 지침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처음에 언급했던 외 촌처럼 세파에 밀려(생존경쟁) 미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채 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겐 소외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제목처럼  최고의 나를 만나라는 것은 분명 더 폭 넓게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 침을 주려고 한 것일 텐데 최고의 나를 내가 하는 일로써 증명하려다보니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고 만나는 일에 영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목표를 향해 길을 가다가 그만 중간에서 끝난 것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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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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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 가 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보통사람들이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 이제 정말 끝이라는 절망감 등과는 사뭇 다른 그들 만의 뚜렷한 색채가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이렇게 좋은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바로 일생동안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 즉 가족과 더 많이 이해하며 사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그래서 전신마비의 고틀립할아버지가 이제 막 세상에 도착한 손자 샘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풀어 놓고 있으며 또한 자폐증을 달고살 손자에게 세상을 화해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소곤소곤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책에는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엄청난 스캔들이라던지 우주의 신비 같은 것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다. 이 책에도 손자 샘에 대한 근심어린 애정뿐만 아니라 샘의 엄마이자 저자의 둘째 딸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 짧고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함께 한 아내에 대한 미움과 너무나 길고 진한 그리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태인계 부모님에 대한 이해와 고마움 등이 골고루 담겨있다. 

특히 고틀립이 5살 위인 누나 '샤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이 이상야릇해졌다. 나에게도 5살 어린 남동생이 있고 그 남동생 역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공공연히 누나와 자신과는 '애증의 관계'라는 불경스런(?)표현을 쓰고 있었기에 마치 내 동생의 심정을 고틀립을 통해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15살 때까지 누나 한 번 이기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고 이혼까지 겪을 때 그 누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삶의 이유가 되었는 지 모른다고 했다.누나가 자신의 잘 나가는 사업체를 가정파탄에 이른 어느 가장에게 선물로 주어 그 가정이 화목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누나의 장례식이 끝난 후 처음 알게 된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장 친밀하고 좋은 혈육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여성,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었다는 그 고백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누나들이 동생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서 모리교수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책 중간중간에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거나 이동할 수 없음도 받아들이고.... 고틀립박사 역시 심리상담을 하러 찾아 온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일을 하다가 바지가 다 젖도록 실수를 해서 그 당혹감과 창피함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앞에서 그 꼴을 다 보고 느낀 한 소녀가 일어나 고틀립의 앞으로 다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꼬옥 안아준다. 이 장면이 가장 내 마음을 찡하게 만든 장면이다.

'긴 병에 효자없다'고 아프고 병 들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조차 외면당하기 일쑤인 요즘 세상에 돈을 내고 상담을 하러 왔던 마음이 병든 소녀가 자신에게 한 창 조언을 하고 있던 박사의 몸은 자신의 마음보다 훨씬 병세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가까이 다가가서 박사를 위로해 준 것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이 소녀는 자신에게 못 볼 꼴을 보여 수치심과 당혹감에 말 한마디 못하고 떨고 있던 박사에게 이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과 용납을 보여주었다.

이 후로는 박사역시 젊고 건강했던 자신의 몸이 어느날 갑자기 입만 겨우 열 수 있는 형편으로 변해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살아야하는 이유. 삶의 목적을 찾기 시작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 곁에서 정신이나 마음, 신체의 고통으로 불편을 겪고 입으로 하소연을 늘어 놓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 사람들 옆에 있으면 불편해져서 자꾸 자리를 옮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도 않을 뿐더러 양심에 가책을 받기 쉽상이었다. 시간을 내어 그 분들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싸가지고 가서 그분 들이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오래도록 들으며 혼자가 아님을,살아야하는 이유를 찾도록 스스로 느끼게 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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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를 위하여 한빛문고 15
황석영 지음, 이상권 그림 / 다림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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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은 무조건 센 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가 떠오르는 책이다. 제목을 얼핏 봤을 때는 어린 동생을 위한 낭만적이고도 따스한 전래동화같은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내 예상은 전혀 빗나가고 말았다.

이처럼 선이 굵은 단편을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 온 이 시점에 <아우를 위하여>를 통해 무엇이 국민이 주인 되는 국가이며 지도자이며 민주주의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어 매우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다.

그런데 처음 접한 이 책의 책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을 때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을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1987년에 나온 것을 감안한다면 이 책 <아우를 위하여>는 1972년에 나왔으니 15년이나 앞 선 책을 이제야 만나다니…….

두 작품의 무대가 모두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흔들며 사용하고 있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반장이 등장하는 것도 똑같다. 또, 후반에 그 어린 독재자의 횡포를 다스리는 선생님이 새롭게 나타나는 점도 그리고 비판의식과 불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서술자 '나'가 등장하는 것까지 같다.

 황석영작가의 <아우를 위하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스토리는 습사하지만, 그것이 우리사회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두 작가가 닮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문제해결을 향한 방법론에 있어서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즉,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엄석대가 학교를 자퇴한 후 서술자인 나와 30대 중반의 나이에 우연히 만났을 때는 열차 안에서 형사들에 의해 수갑이 채워지는 몰락을 그렸지만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영래파의 일원인 종하의 비굴한 사과는 받은 '나'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노깡'속을 자발적으로 들어가 그 두려움의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정복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마무리 짓고 있기 때문이다. 또, 처음 들어보는 풍부한 어휘들, 그의 어린시절이 담긴 40-50년대가 내 눈 앞에 펼쳐질 정도로 묘사력이 뛰어나다. 비록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궁핍한 생활상을 그렸어도 어딘지 모르게 그립고 따스한 고향의 모습이 담겨있어서 앞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이 소설의 실제 배경은 1970년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생존권을 포함한 기본권도 유린당한 채 정당성 없는 독재 권력에 이리저리 끌려 다녔던 시절, 오직 힘 센 한 사람만이 옳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배경을 한국전쟁 직후의 시점으로 옮겨놓아 조심스럽지만 할 말은 힘을 주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무래도 유신정권시절을 그대로 배경으로 했다면 과연 이 책이 우리 손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나의 청소년시기를 되돌아보면 언론에서 보도하는 대로 믿고 사고하고 말했던 것 같다. 87년 6.29선언을 이끌어낸 시민들과 대학생들의 민주화시위를 언론에서는 공부 안하는 돌대가리 대학생들이 버스길이나 막아서며 하는 폭력시위로 왜곡시켜 커다란 사진과 함께 폄훼했기 때문에 어린 나 또한 하굣길에 대학생들의 대모가 있을 때마다 터지는 매콤한 최루탄가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맘속으로 나마 그들을 무시하며 미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체육관대통령을 다시는 세우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강한 열망이 대통령직선제라는 커다란 성과를 이끌어낸 위대한 승리였건만 어린 나에게는 단지 공부 못하는 대학생들의 한심한 작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 대선에 나선 후보자들이 합동연설을 하며 전국을 누빌 때 우리 반에서는 누군가 '김대중은 빨갱이다. 절대 뽑으면 안된다!' 라는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선거권도 없던 우리들이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대통령이 된다고 저렇게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손을 흔들며 거리를 활보하는지 정말 무섭다며 호들갑을 떨 때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던 김선영이란 친구가 발딱 일어서더니 우리들을 향해 "김대중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훌륭한 분이야, 그 동안 미국에 있다 돌아오신 것이지 북한에 있다가 온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 훌륭한 분이 빨갱이라니 너희들은 진실을 모르고 있어!" 라며 평소 영어를 잘하고 단정한 선영이가 얼굴이 발갛게 상기가 되어 격앙된 목소리로 분노하는 것을 처음 본 우리들은 너무 놀라 이 번에는 선영이와 선영이 부모님을 '분순한 세력'으로 의심하기 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집집마다 누가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민정당마크가 새겨진 보자기와 푸른색 트레이닝복이 있었고 '보통사람'노태우후보야 말로 대통령감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처럼 언론이라는 권력집단에 눈과 귀가 왜곡된 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낸 후 스스로 책을 선택하여 볼 수 있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축복을 누리며 대학생활을 즐긴 덕분에 그 동안 내가 믿어 확신해 마지않던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만약 그 때 최루탄가스에 눈을 뜨지 못하며 집으로 향했더라도 그 시위가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고통스런 통과의례라는 바른 인식을 갖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균형잡힌 시각으로 사회와 그 구성원을 볼 줄 아는 능력을 키우기엔 힘 센 어른들이 매일 찍어내는 신문이나 교과서에 실린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시, 수필로는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이다. 몸은 쑥쑥 자라나는 청소년기였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좀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그리지도 못한 채 그 귀한 시절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황석영작가는 나와 같이 청소년기에 눈에 색을 입힌 선글라스를 끼고 사회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을 모두 자신의 동생, 즉 아우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아우들이 성장하여 청년이 되고 군 입대를 하기까지 덮어두었다가 그제야 이 사회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아우들의 눈에 씌어있는 선글라스를 벗기기 위해 <아우를 위하여>를 편지글로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선량한 반 친구들을 자의대로 억압하며 통치하는 소수의 영래패거리들을 타도해야할 악랄한 깡패집단으로 그리지 않고 생각이 모자라는 듯 단순하고 어리석어서 친구들을 못살게 굴었지만 사실은 그들도 마음이 여리고 바르게 가르치면 얼마든지 함께 어울려 놀기 좋은 아이들로 변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훈훈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가르침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재미를 주기도 하고 잘못된 역사관, 인간관을 바로 잡아주기도 한다. 특히 황석영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에게 독자가 기꺼이 돈을 내어 신간이 나오는 대로 책을 사는 것은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용기 있는 문제제기를 듣고 싶어서일 뿐만 아니라 그 작가도 자신이 쓴 글처럼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란 기대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만나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린시절 나에게 다수의 견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그 선영이는 현재 어느 지방법원 판사로 일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통제된 사회 속에서도 바른 역사관, 정치관을 갖고 있던 그 선영이가 판사가 된 것이 우리 사회를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선영이가 지난 동창회에 불참해서 만나지 못했지만 조만간 다시 만날 텐데 그 때 선영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 주어야겠다. 친구들의 무지를 방관하지 않고 일어나서 바르게 알려준 그 용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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