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 그의 얼굴 표정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저기로 나가면 기다란 복도가 있거든. 거기서 멋지게 춤을 추는 거야. 아무도 우릴 보지 못할 거야. 자, 날 따라와." - P83

"머리카락은 태우고, 드레스는 낡고, 장갑은 짝짝이고, 구두는 작아서 발목을 삐긴 했지만 우리만큼 재미있게 놀다 온 아가씨들은 없을 거야."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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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에세이
박상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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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퀴어소설은 많이 접해보지 않아 읽는내내 낯선 느낌이었고 그 글을 쓴 작가 또한 거리감 있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에세이집을 읽은 직후 지금은 작가님이 동네이웃같이 가까운 사이인 것만 같다. 나와 같이 퇴사다짐을 하고 다이어트 결심을 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다 잠드는 모습들,, 이 책을 다 읽은 후 지난번에 읽다 그만두었던 작가님의 소설집을 다시 꺼내 읽어보려고 한다. 그 책 또한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읽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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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회사 생활의 다른 업무와 다를 바 없는 ‘노동’이지만, 실은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일종의 ‘존재 증명’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모적으로 남의 일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내 목소리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그 감각이, 수면장애를 앓으며 쪽잠을 자면서도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나의 현실을 버티게 해주었다. - P204

강의를 위해 경기도의 한 대학으로 향하던 중이었고, 30년 동안 경기도에 거주했던 작가 송지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기도인들은 인생의 30퍼센트를 대중교통에서 흘려보내. 때문에 경기도에 살면서 좋은 성격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지." - P207

밥벌이는 참 더럽고 치사하지만, 인간에게, 모든 생명에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생이라는 명제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바위를 짊어진 시시포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이제 더 이상 거창한 꿈과 목표를, 희망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이 어떤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감각하고 있는 현실의 연속이라 여기기로 했다. 현실이 현실을 살게 하고, 하루가 또 하루를 버티게 만들기도 한다. 설사 오늘 밤도 굶고 자지는 못할지언정, 그런다고 해서 나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일은 이제 그만두려 한다. 다만 내게 주어진 하루를 그저 하루만큼 온전히 살아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는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위대하며 박수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비록 오늘 밤 굶고 자는 데 실패해도 말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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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모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가 뭔데 내 외모를 평가해. 살찐 사람 몸은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건가. 게다가 긇지 않은 복권이라니. 상대방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인데 타인이 왜 함부로 그 사람을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로 구정하는 것인가.

평생 가까워질 이유가 없는 사람의 청첩장을 받아 들 때마다 나는 아득하고도 뜨악한 기분이 든다. 결혼을 하지 않은 한 40대 선배는 그동안 나간 축의금만 해도 웬만한 중고차 한 대 값이 넘는다고 토로를 할 지경이니, 청첩장을 둘러싼 일종의 자본주의적 배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고를 쓸 때마다, 고료가 입금될 때마다 마치 텅 빈 우주에 한 줌의 먼지가 된 것처럼 공허한 마음이 들고는 한다.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다행이야, 하는 생각을 하며 나를 달랜다. 그럴 때면 문득 스무 살의 그 어느 날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내게 "Always be young"이라고 말했던 미국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제야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아무런 소속 없이,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이 시간에 거리에 서 있다는 것을 절감했고, 그것은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언제나와 다름이 없는 평일 오후의 한낮인데 모든 게 달라져버린 듯한 느낌. 결국 내가 향한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집이었다. 가방이 무겁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그렇게 됐다.

나는 매일 싸우는 것처럼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 뜻ㄷ로 되지 않는 세상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말이다.

때때로 나는 내 몸에서 지구를 발견한다. 무기질이 부족해 손톱이 잘 부서지고, 면역력이 떨어져 건선이나 지루성피부염 같은 만성질환이 생겨버린 내 몸.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은 부족하며, 온갖 쓰레기들이 꾸역꾸역 점령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구조물을. 이 모든 악순환에는 결국 단 하나의 해결책밖에 없는 것 같다. 절제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이 때문에 나는 지금도 배달 앱을 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다짐하는 중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 말이다.

외적인 모습에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일종의 허상처럼 느껴졌고, 내가 지금껏 가져왔던 쓸데없는 자기 강박의 연장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분 매초 더 나은 가치 기준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최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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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단지 지난 시간을 기록하는 활동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끈질긴 사유와 해석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기존의 관념을 비틀어 존재를 자유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할 때, 내가 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쓰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가 노트북이나 노트, 펜이라면 쓰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마음은 용기인 줄 모르는 용기가 아닐까. 내 숨을 막는 말, 한 번쯤 꼭 꺼내야만 하는 말, 누구보다 내가 먼저 이해하고 싶어 어렵게 꺼낸 말. 쓰는 만큼 가벼워지는 각자의 순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도 다시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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