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뇌 - 뇌의 새로운 이해 그리고 인류와 기계 지능의 미래
제프 호킨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이데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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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흥미로운 책이다. 하지만 흥미롭다고 해서 이 책에 기술된 모든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스스로 뇌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자부한다. 마침내 인간의 지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리처드 도킨스의 추천사까지 붙어 있으니 혹할만 하지 않은가. 적어도 생짜 엉터리 주장은 아닐거라는 최소한의 신뢰감을 줄 수 있으니.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뇌에서 지능이 발현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 2부는 인공지능의 미래와 위험성의 고찰, 3부는 인류의 미래에 큰 위협이 되는 ‘틀린 신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계획이다. 지금부터 이 책을 찬찬히 살펴보자.

저자 제프 호킨스는 엄밀히 말해 정규 학위 코스를 제대로 밟은 뇌과학자가 아니다. PDA로 한때 명성을 날린 IT 기업 팜(PALM)의 CEO였다가 뇌를 연구하려는 열망으로 뇌과학 연구에 뛰어들어 연구소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의 신경과학 연구기업 누멘타에서 내놓은 게 이 ‘천 개의 뇌‘ 이론이다. 두뇌 가장 바깥쪽의 신피질은 약 1만 5천개의 피질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피질기둥들은 다양한 세계 모형(‘기준틀‘이라고 부른다)을 끊임없이 만들고 수정한다.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기관이 아니라 이 피질기둥의 세계 모형이 작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한밤중에 불꺼진 화장실을 더듬더듬거리면서도 불편없이 갈 수 있는 건, 우리 뇌의 피질기둥 어딘가에 화장실의 세계 모형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이 화장실 세계 모형에 수정이 가해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세계 모형을 운영하고 외부의 변화에 맞추어 세계 모형을 수정한다. 그리고 이 세계 모형은 수천 개의 피질기둥에 조금씩 다른 형태로 분산 수용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새로운 외부자극에 반응하거나 학습할 때 이 수천 개의 피질기둥이 각자 갖고 있는 세계 모형을 바탕으로 합의를 통해 결과를 도출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 뇌에서는 매 순간순간 끊임없이 투표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제프 호킨스는 현재의 인공지능 연구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요 몇 년 딥 러닝이, 최근엔 거대언어모델(LLM)이 AI의 열풍을 재점화했지만, 저자는 이 방식들은 근본적으로 대량의 통계 데이터에 의존하는 접근법이어서 세계 모델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근본적인 지능의 구현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AI는 인간 두뇌의 작동방식을 모방해야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인공지능의 실존적 위험 -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아득히 뛰어넘어 결국 인류를 멸종시키고 말 거라는 - 에 대해서도 논박한다. 첫째, AGI(일반인공지능)이 구현되어 인간의 두뇌보다 몇 만배, 몇 십만배의 속도로 동작하더라도, 결국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해야만 학습을 할 수 있으니 그 물리적 한계 때문에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넘어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는 동기가 없다. 인간이 동기를 심기 전엔 말이다. 자율주행차가 스스로 목표를 만들지는 않잖은가. 우리 스스로 인류를 파멸시킬 목표를 인공지능에 심을 이유가 없으니 그 위험성도 적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지금까지 살펴 본 지능이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위협이 되는지를 말한다. 우리 뇌의 세계 모형은 대체로 정확하지만, 때로는 틀린 세계 모형이 구축되기도 한다. 여전히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다든가, 기후 변화는 사기라든가, 달 착륙은 날조라든가. 이 그릇된 믿음들(틀린 신념)의 공통점은 물리적으로 확인이 힘들고,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을 갖고 있으며, 당장 살아가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편평설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지만 기후 변화는 그렇지 않다. 이외에도 앞으로 등장할 수많은 틀린 신념들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 저자는 확신한다.

우리의 오래된 뇌(신피질을 제외한 뇌 부위들을 지칭한다)는 생존에 관여한다. 그래서 이 오래된 뇌가 인류의 영속에 꼭 필요한 인구 감축이나 핵무기 폐기를 막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구를 늘리는 것, 그리고 전쟁을 하는 것이 내 유전자의 확산에 유리하기 때문에 오래된 뇌는 인류의 장기적 존속에 필요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피질이 갖고 있는 지능으로 오래된 뇌를 제어해야 한다고 제프 호킨스는 주장한다.

그럼 지금부터 이 책을 비판해 보자.

제프 호킨스는 신피질에만 지능이 있다고 가정하고 논지를 전개한다. 이는 다소간 삼위일체 뇌 이론과 맞닿아 있으며 이전에 리뷰한 신경과학자 리사 팰드먼 배럿의 견해와 상충된다. 리사 팰드먼 배럿은 뇌를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영장류의 뇌로 구분하는 삼위일체 뇌 이론의 허구성을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철저히 논파한 바 있다.

그리고 제프 호킨스는 오직 지능의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고 신피질의 지능이 절대선인양 주장한다. 이는 근대 계몽주의를 연상시키는데, 이성만능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굳이 세계사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지능이 발달한다고 저절로 동기가 생성되지는 않는다며 AI의 발전이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인간이 AI에게 학습시키는 데이터가 AI에게 편향을 일으킬 가능성이 과연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MS의 챗봇이 인종차별적 언사를 쏟아냈던 해프닝만 봐도 저자의 이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인류가 인구 감축이나 핵무기 폐기를 하지 못하는 게 오래된 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게 타당한가? 오히려 신피질의 이성의 결과물이 아닌가? 저자는 신피질이 항상 옳은 판단을 한다고 믿는 듯 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반증하는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례가 있는데도 말이다. 근대 계몽주의가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서두에 말했듯, 흥미있는 책이지만 동의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리고 다소 나이브하고 위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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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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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무엇인가? 문명을 피워낸 온갖 사유의 창고이자 지혜의 원천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뇌가 알로스타시스(allostasis), 즉 신체예산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신경과학자 중 한 명인 리사 펠드먼 배럿. 그녀는 이 책에서 뇌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산산이 깨부순다. 다들 뇌가 생각하기 위한 기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뇌가 진화한 이유가 우리의 신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생물의 신체 에너지를 예산에 비유해 보면 좀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초기 진화 단계의 작은 생물은 마치 구멍가게처럼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에 에너지(예산)를 관리하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화가 거듭되어 몸이 커지고 복잡한 신체기관을 갖게 되면 에너지를 관리하는게 훨씬 어려워진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거래와 거대한 예산을 관리하기 위해 대기업에 각종 회계/경영부서가 있듯이, 생물은 점점 더 큰 뇌를 갖게 된 것이다. 기업이 매출과 비용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매 순간 신체 에너지가 얼마나 필요할지를 예측하고 준비한다.

이 책이 깨뜨린 가장 충격적인 통념은 파충류의 뇌 따위는 없다는 게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뇌는 진화의 순서대로 생존을 담당하는 파충류의 뇌, 감정을 담당하는 포유류의 뇌(변연계), 이성을 담당하는 영장류의 뇌(대뇌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삼위일체 이론이 유행했다. 그래서 소비자의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마케팅 이론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럿은 이 삼위일체 이론이 ‘과학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이었으며 가장 널리 퍼진 오류‘라고 단언한다.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 때문에 유명해진 이론이지만, 유전학 연구를 통해 척추동물들의 두뇌 속 신경세포들이 차이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서 이 이론의 토대가 무너졌다. 쉽게 말해 도마뱀이나 인간이나 뇌의 신경세포는 똑같다는 것이다. 단지 뇌를 발달시키는 시간의 차이인데, 저자는 도마뱀이 인간만큼 뇌의 신경세포 형성 시간이 길어지면(인간은 어떤 동물보다도 뇌가 발달하는 기간이 길다), 도마뱀도 인간의 대뇌피질 비슷한 걸 만들어낼 것이라 말한다.

이 삼위일체 이론이 위험한 건 영장류의 뇌를 가진 인간만이 이성적 사고를 통해 동물적 충동을 극복하고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는 함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생각은 합리적이고 감정은 비합리적인가? 생명이 달린 절박한 위험이 닥쳤을 때의 감정은 생존에 합리적일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인터넷을 정처없이 헤맬 때, 생각은 비합리적이다. 어떤 상황에 처했느냐에 따라 합리성과 비합리성은 뒤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에게 합리적인 행동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신체 예산을 잘 관리하는 거라고 배럿은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과 맥락이지, 이분법적인 이성과 감정의 대립이 아니다.

이 책은 본문이 180페이지, 주석과 역자 후기까지 합쳐도 240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위의 내용 외에도 뇌가 인터넷처럼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던가, 엄마의 말과 시선이 아기의 뇌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던가, 뇌는 매순간 외부 자극을 당신이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예측하고 준비한다던가(그래야 신체예산을 관리하기 쉽다), 타인의 말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실제로 당신의 몸에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던가, 우리 뇌가 어떻게 뇌 속에만 존재하는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는가 같은 놀랍기 그지 없는 내용들로 꽉꽉 차 있다.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MBTI의 허구성을 명징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MBTI는 ‘오늘의 운세‘만큼이나 과학적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MBTI 검사를 받아보면 전부 사실처럼 느낄까? 그건 MBTI검사 항목들이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는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을 요약해서 돌려줄 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MBTI가 쪽집게처럼 잘 맞는다고 철썩같이 믿게 된다. 사실 사람의 행동은 이런 식의 성격 검사로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내향적일 수도 있고 다른 상황에서는 외향적일 수 있으니, 여러 가지 맥락 안에서 행동을 관찰해야만 한단다.

큰 기대 없이 읽었지만 ˝뜻밖의˝ 충격을 받은 책. 뇌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뇌과학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대중과학서적에서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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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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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철길 양편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광대한 불모지 ― 중앙아시아의 노란 스텝 지대, 사리-오제끼가 놓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거리가 철도로 재어진다.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으로부터 경도(經度)가 정해지듯.......
그리고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에는 이 문단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짧은 글귀만 읽어도 소설의 배경이 훤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넓디넓은 카자흐 스텝 한가운데 홀로 놓인 철길과 자그마한 간이역, 그 간이역에서 역무원 일을 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말이다. 이 광막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사람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점들은 혹독한 자연과, 모진 체제와, 그리고 그들의 운명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한밤중에 주인공 부란니 예지게이에게 그의 아내 우꾸발라가 까잔갑 노인의 죽음을 알리면서 시작된다. 예지게이는 보란리-부란니 간이역에서 까잔갑 노인과 몇십 년을 같이 일한 강인한 사내다. 초원 한가운데 마을도 없이 덩그마니 놓인 간이역에서 고된 철도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강인하지 않고서는 어찌 견딜 수 있으리라마는, 예지게이는 그 중에서도 특출히 꼿꼿하고 굳은 성정을 지닌 이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인 까잔갑 노인의 죽음에 잠시 망연자실하지만, 예지게이는 곧 까잔갑 노인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장례를 준비한다.

그렇게 느릿느릿 전개될 것 같던 플롯은 갑자기 우주로 무대가 옮겨진다. 미소가 공동으로 외계 행성의 자원을 탐사하는 데미우르고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궤도정거장에 머물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비행사 두 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인류를 아득히 앞서는 과학 기술을 가졌으나 인류와 달리 전쟁을 모르는 평화로운 외계 문명과 접촉하고 그들의 모성(母星)으로 떠난다. 이 우주비행사들은 전쟁을 단호히 배제하고 공동체 의식과 이성적 사고를 우선하는 외계인들의 고차원적 의식에 큰 감명을 받는다. 이 외계문명을 본받아 인류의 분쟁을 멈추고 평화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우주비행사들은 사령부에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편 예지게이는 까잔갑 노인의 시체를 수습하고, 노인의 부고를 듣고 찾아온 이들을 맞이하고, 장례를 준비하고, 까잔갑의 평소 유언대로 아나-베이뜨 묘지에 그를 묻으러 먼 길을 떠난다. 그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는 예지게이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예지게이가 2차대전에서 PTSD를 입고 이곳저곳의 도시를 떠돌다 까잔갑의 도움을 받아 보란리-부란니 간이역에 정착하게 된 일, 까잔갑이 준 새끼 낙타 까라나르를 사로제끄 제일의 낙타로 키워낸 일, 정권에 숙청당해 간이역으로 흘러 온 아부딸리쁘와 자리빠 가족과 깊은 유대를 맺은 일, 아부딸리쁘가 기록한 까자흐에 구전되는 민족 서사시의 구슬픈 이야기, 예지게이가 자리빠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고뇌한 일...

이렇게 까잔갑 노인을 묻으러 가는 예지게이의 이야기와 외계 문명이 내민 손길에 반응하는 지구인들의 이야기가 뒤섞이면서 ‘백년보다 긴 하루‘가 저물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종막에서 마침내 예지게이는 인간성에 대한 희망어린 환상을 목도한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는 이 길지만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자그마한 인간의 삶에 대해, 국가의 체제에 대해,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울려퍼지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세상의 소금과도 같은 인물, 부란니 예지게이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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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리커버 에디션)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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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작품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과학(거의 모든 것의 역사, 바디), 여행(나를 부르는 숲, 발칙한 유럽산책), 언어(발칙한 영어산책, 셰익스피어 순례)의 세 가지인데, 이 책 <발칙한 미국 횡단기>는 이 중 여행에 속한다.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빌 브라이슨의 번역서 제목엔 대개 ‘발칙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작가 특유의 비꼬는 듯한 투덜거림이 책에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젠 좀 식상하다. 그의 작품 원제엔 발칙하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데도 - 이 책의 원제도 <The Lost Continent>다 - 천편일률적으로 ‘발칙한‘이라고 제목을 따붙이는 그 안일함이 조금 괘씸하다.

‘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기‘라는 부제 그대로,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어머니의 낡은 자동차를 빌려타고 그의 고향 와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출발하여 남부와 동부, 그리고 서부까지 38개 주의 소도시들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청년기 이후로 줄곧 영국에서 살던 빌 브라이슨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어릴 적에 매년 여름 아버지 차를 타고 가족여행을 떠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금 길을 떠난다. 이번엔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누나도 없이 홀로.

이 책엔 내가 어릴 적 외화를 통해 학습한 미국 중소도시들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를 관통하는 끝없는 직선도로, 정원과 차고가 딸린 똑같이 생긴 이층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동네, 하릴없이 시골 바에 앉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어치우는 중년의 아저씨들과 껌을 씹으며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들. 빌 브라이슨은 미국 중서부에서 중부와 남부, 동부를 거쳐 다시 서부까지 여행하지만, 이 광경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광대한 미국 대륙을 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여행하는 건 낭만이 넘치는 게 아니라 지극히 고단하고 지루한 단순노동에 가까워 보인다. 예전에 그랜드 캐년에 가는 길 위의 몇 시간 동안 조슈아 트리와 덩굴풀만 자라는 황야를 지났던 권태로운 기억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 모르겠다.

‘세계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여행 작가‘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서 알 수 있듯,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는 대체로 유쾌하다. 하지만 이 <발칙한 미국횡단기>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게 1989년인데, 그땐 PC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인지 빌 브라이슨의 조롱조의 문체가 지금보다 거칠고 덜 다듬어져 있다. 그래서 상당히 거슬린다. ‘관광객들은 모두 뚱뚱하고 옷을 등신같이 입는다‘고 깎아내리고,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떠드는 ‘할망구의 두 귀를 잡아 이마를 내 무릎에 깨 버리는‘ 상상을 하며, 카페에서 시끄럽게 말하는 여자를 ‘지저분하고 점잖지 못한 데다 엉덩이는 축사 문짝만‘하다고 묘사한다. 작가 본인도 이런 과격한 조롱의 대상으로 지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 속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80년대였으니까‘라고 한켠에 덮어둘 뿐이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을 가로지르는 이 여행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 그린 이상적인 타운 ‘모아빌‘을 찾아 헤맨다. 사시사철 쾌적한 날씨,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건축물들, 풍요로운 사람들이 사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도시. 그는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고향 디모인을 흥미로운 게 하나도 없는 지루한 동네라고 묘사하지만, 수많은 소도시를 거쳐 다시 디모인으로 돌아올 때 쯤엔 다시 ‘여기 살 수도 있겠다‘ 싶은 평온함을 느낀다. 그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처럼 고향에서 ‘모아빌‘을 찾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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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금술사 - 뇌는 어떻게 인간의 감정, 자아, 의식을 만드는가
다이앤 애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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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과학 속에 숨어 있다는 걸 깨우쳐 주는 이. 문학의 언어로 과학을 경이롭게 번역하는 이.

나에게 다이앤 애커먼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감각의 박물학>, <휴먼 에이지>에서 과학서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수려한 문장과 철학적인 사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그녀의 글쓰기에 매료되었었다. 인문학과 과학의 이상적인 만남이랄까. 나는 그녀의 열정과 재주가 부러웠다.

이 책 <마음의 연금술사>에서도 그녀의 글솜씨는 여전하다. 하지만 읽다보니 왠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뇌과학이 워낙 복잡하고 전문적인 영역이어서일까? 다른 뇌과학 책들은 뇌의 각 부분이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부터 설명하지만, 이 책은 그런 배경지식을 독자가 이미 갖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느낌이다. 사전에 특별한 설명 없이 의식과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 이성이 구성되는 과정, 기억이 만들어지고 저장되는 메커니즘, 자아와 감정에 대한 설명 등등을 늘어놓는다. 여기선 그녀 특유의 아름답고 현학적인 문장이 오히려 뇌를 이해하는데 독이 된다. 그녀의 설명이 - 사실 이걸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른 네 개의 챕터를 다 읽고 나도 다이앤 애커먼이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끝내 알 수가 없다. <마음의 연금술사>라는 제목만 봐서는 수많은 뉴런과 회백질로 이루어진 뇌가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그 신비를 설명하려는 책 같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남았다. 이렇게 얻을 게 별로 없는 과학 에세이를 읽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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