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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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무엇인가? 문명을 피워낸 온갖 사유의 창고이자 지혜의 원천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뇌가 알로스타시스(allostasis), 즉 신체예산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신경과학자 중 한 명인 리사 펠드먼 배럿. 그녀는 이 책에서 뇌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산산이 깨부순다. 다들 뇌가 생각하기 위한 기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뇌가 진화한 이유가 우리의 신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생물의 신체 에너지를 예산에 비유해 보면 좀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초기 진화 단계의 작은 생물은 마치 구멍가게처럼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에 에너지(예산)를 관리하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화가 거듭되어 몸이 커지고 복잡한 신체기관을 갖게 되면 에너지를 관리하는게 훨씬 어려워진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거래와 거대한 예산을 관리하기 위해 대기업에 각종 회계/경영부서가 있듯이, 생물은 점점 더 큰 뇌를 갖게 된 것이다. 기업이 매출과 비용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매 순간 신체 에너지가 얼마나 필요할지를 예측하고 준비한다.

이 책이 깨뜨린 가장 충격적인 통념은 파충류의 뇌 따위는 없다는 게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뇌는 진화의 순서대로 생존을 담당하는 파충류의 뇌, 감정을 담당하는 포유류의 뇌(변연계), 이성을 담당하는 영장류의 뇌(대뇌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삼위일체 이론이 유행했다. 그래서 소비자의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마케팅 이론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럿은 이 삼위일체 이론이 ‘과학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이었으며 가장 널리 퍼진 오류‘라고 단언한다.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 때문에 유명해진 이론이지만, 유전학 연구를 통해 척추동물들의 두뇌 속 신경세포들이 차이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서 이 이론의 토대가 무너졌다. 쉽게 말해 도마뱀이나 인간이나 뇌의 신경세포는 똑같다는 것이다. 단지 뇌를 발달시키는 시간의 차이인데, 저자는 도마뱀이 인간만큼 뇌의 신경세포 형성 시간이 길어지면(인간은 어떤 동물보다도 뇌가 발달하는 기간이 길다), 도마뱀도 인간의 대뇌피질 비슷한 걸 만들어낼 것이라 말한다.

이 삼위일체 이론이 위험한 건 영장류의 뇌를 가진 인간만이 이성적 사고를 통해 동물적 충동을 극복하고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는 함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생각은 합리적이고 감정은 비합리적인가? 생명이 달린 절박한 위험이 닥쳤을 때의 감정은 생존에 합리적일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인터넷을 정처없이 헤맬 때, 생각은 비합리적이다. 어떤 상황에 처했느냐에 따라 합리성과 비합리성은 뒤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에게 합리적인 행동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신체 예산을 잘 관리하는 거라고 배럿은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과 맥락이지, 이분법적인 이성과 감정의 대립이 아니다.

이 책은 본문이 180페이지, 주석과 역자 후기까지 합쳐도 240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위의 내용 외에도 뇌가 인터넷처럼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던가, 엄마의 말과 시선이 아기의 뇌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던가, 뇌는 매순간 외부 자극을 당신이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예측하고 준비한다던가(그래야 신체예산을 관리하기 쉽다), 타인의 말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실제로 당신의 몸에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던가, 우리 뇌가 어떻게 뇌 속에만 존재하는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는가 같은 놀랍기 그지 없는 내용들로 꽉꽉 차 있다.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MBTI의 허구성을 명징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MBTI는 ‘오늘의 운세‘만큼이나 과학적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MBTI 검사를 받아보면 전부 사실처럼 느낄까? 그건 MBTI검사 항목들이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는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을 요약해서 돌려줄 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MBTI가 쪽집게처럼 잘 맞는다고 철썩같이 믿게 된다. 사실 사람의 행동은 이런 식의 성격 검사로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내향적일 수도 있고 다른 상황에서는 외향적일 수 있으니, 여러 가지 맥락 안에서 행동을 관찰해야만 한단다.

큰 기대 없이 읽었지만 ˝뜻밖의˝ 충격을 받은 책. 뇌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뇌과학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대중과학서적에서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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