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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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철길 양편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광대한 불모지 ― 중앙아시아의 노란 스텝 지대, 사리-오제끼가 놓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거리가 철도로 재어진다.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으로부터 경도(經度)가 정해지듯.......
그리고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에는 이 문단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짧은 글귀만 읽어도 소설의 배경이 훤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넓디넓은 카자흐 스텝 한가운데 홀로 놓인 철길과 자그마한 간이역, 그 간이역에서 역무원 일을 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말이다. 이 광막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사람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점들은 혹독한 자연과, 모진 체제와, 그리고 그들의 운명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한밤중에 주인공 부란니 예지게이에게 그의 아내 우꾸발라가 까잔갑 노인의 죽음을 알리면서 시작된다. 예지게이는 보란리-부란니 간이역에서 까잔갑 노인과 몇십 년을 같이 일한 강인한 사내다. 초원 한가운데 마을도 없이 덩그마니 놓인 간이역에서 고된 철도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강인하지 않고서는 어찌 견딜 수 있으리라마는, 예지게이는 그 중에서도 특출히 꼿꼿하고 굳은 성정을 지닌 이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인 까잔갑 노인의 죽음에 잠시 망연자실하지만, 예지게이는 곧 까잔갑 노인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장례를 준비한다.

그렇게 느릿느릿 전개될 것 같던 플롯은 갑자기 우주로 무대가 옮겨진다. 미소가 공동으로 외계 행성의 자원을 탐사하는 데미우르고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궤도정거장에 머물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비행사 두 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인류를 아득히 앞서는 과학 기술을 가졌으나 인류와 달리 전쟁을 모르는 평화로운 외계 문명과 접촉하고 그들의 모성(母星)으로 떠난다. 이 우주비행사들은 전쟁을 단호히 배제하고 공동체 의식과 이성적 사고를 우선하는 외계인들의 고차원적 의식에 큰 감명을 받는다. 이 외계문명을 본받아 인류의 분쟁을 멈추고 평화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우주비행사들은 사령부에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편 예지게이는 까잔갑 노인의 시체를 수습하고, 노인의 부고를 듣고 찾아온 이들을 맞이하고, 장례를 준비하고, 까잔갑의 평소 유언대로 아나-베이뜨 묘지에 그를 묻으러 먼 길을 떠난다. 그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는 예지게이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예지게이가 2차대전에서 PTSD를 입고 이곳저곳의 도시를 떠돌다 까잔갑의 도움을 받아 보란리-부란니 간이역에 정착하게 된 일, 까잔갑이 준 새끼 낙타 까라나르를 사로제끄 제일의 낙타로 키워낸 일, 정권에 숙청당해 간이역으로 흘러 온 아부딸리쁘와 자리빠 가족과 깊은 유대를 맺은 일, 아부딸리쁘가 기록한 까자흐에 구전되는 민족 서사시의 구슬픈 이야기, 예지게이가 자리빠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고뇌한 일...

이렇게 까잔갑 노인을 묻으러 가는 예지게이의 이야기와 외계 문명이 내민 손길에 반응하는 지구인들의 이야기가 뒤섞이면서 ‘백년보다 긴 하루‘가 저물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종막에서 마침내 예지게이는 인간성에 대한 희망어린 환상을 목도한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는 이 길지만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자그마한 인간의 삶에 대해, 국가의 체제에 대해,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울려퍼지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세상의 소금과도 같은 인물, 부란니 예지게이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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