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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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치하의 가장 큰 비극이자 사법 정의가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렸던 무참한 굴욕, 인혁당 사건. 1974년 당시 유신 정국 하에서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 갖은 고문을 자행하여 피고들로부터 자백을 끌어내고 이를 근거로 대법 판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피고와 변호인, 피고 가족들과 종교인, 사회운동가, 심지어 앰네스티의 항의까지 철저히 묵살했다. 대법 판결 하루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희대의 사법 살인을 저지른 박정희의 만행은 국제적으로도 거센 역풍을 맞아 정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단초가 된다.

이 책의 주인공, 강순희 여사는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인 우홍선 씨의 부인이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유시민 선생을 통해 인터뷰 구술집을 내게 된 건 뜻밖에도 남편의 명예를 되살리고자 함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를 몸소 살아낸 본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함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북에서 학교를 다니다 남으로 넘어와 한국전쟁을 겪은 후, 피난 온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다 남편을 만나 짧은 연애 후 결혼하기까지. 그리고 구속된 남편을 옥바라지 하면서 구속자 가족들과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구명운동을 펼치고, 끝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의 여사님의 인생 여정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인혁당 사건이 아니다. 강순희 여사의 강인하고 당당한 삶의 태도다. 어렸을 적부터 부당한 것은 참지 못하고 똑똑히 따지는 성격이었던 강순희 여사는 인혁당 사건을 맞아 남편의 구명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당당했다. 형사들이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깔보지 못하도록 멋진 원피스를 입고 선글래스를 끼고 경찰서로, 중정으로 출두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못 현대적이다. 서슬퍼렇던 모진 시절, 형사들이 윽박질러도 전혀 기죽지 않고 되레 큰소리로 받아치던 그녀는 가히 걸크러시의 원조라 할 만하다.

국가 폭력에 의해 남편이 속절없이 떠난 후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딸 셋과 아들 하나를 잘 키워낸 여사의 남다른 정신력에 감탄한다. 마흔 둘에 남편을 여의고 예순 여섯 노인이 되어서도 남편이 그리워 남편 묘 근처에 살고 싶어 집을 옮긴 로맨티스트. 보통 사람이라면 제정신으로 살아내기 어려울 법한 그녀의 삶을 지탱한 건 자식도 아니고 종교도 아닌,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무 여한 없는 삶을 살았다는 그녀. ‘신랑도 잘 만났고, 사랑도 잘 했고, 남편 일로 싸울 때도 잘 싸웠’다는 그녀. 남편과 첫 데이트한 그날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그녀. 그래서 강순희 여사는 말한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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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어느 물고기의 이야기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최재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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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쿨란스키의 대표작이자 오랫동안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전설의 책이 재판되었다. 그간 <연어의 시간>, <우유의 역사> 같은 마크 쿨란스키의 책에 매료되어 중고로라도 <대구>를 구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기에 재판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구매했더란다, 하지만 김유태의 <나쁜 책>에 수록된 책들을 읽는 게 올해의 독서 목표여서 <대구>는 순서가 한참 뒤로 밀려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이 책 <대구>가 처음 세상에 나온 건 1997년이었다. 생선의 한 종류에 불과한 대구가 어떻게 인류의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고, 마르지 않을 화수분 같았던 대구가 어떻게 남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지를 이 책은 말한다. 바이킹이 북해의 어장에서 잡은 대구를 말려서 보존할 수 있게 되면서 이를 식량으로 삼아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게 되었고, 바스크인들은 대구를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개발하여 유럽 전역에 절인 대구를 유통시켜 큰 부를 축적한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금절임대구를 먹어왔기에 유럽에서는 아직도 신선한 생 대구보다 소금에 절인 대구를 더 고급으로 쳐준다고 한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삼각무역의 중심축이기도 했다.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의 그랜드 뱅크스의 거대한 대구 어장에서 잡은 대구를 소금에 절여 배에 싣고 남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농장에 갖다 판다. 농장 노예들의 식량으로 쓰일 대구를 파는 것이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담배와 설탕을 사서 유럽에 갖다 팔고, 유럽에서 생필품이나 사치품을 싣고 북아메리카로 가서 보스턴 등의 식민지 이주민들에게 파는 방식의 삼각무역이었다. 당시 보스턴이 대구 가공의 중심지였기에 보스턴에 막대한 부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스턴 차 사건도 대구 무역으로 부자가 된 식민지인들(이 책에서는 ‘대구 귀족’이라 칭한다)이 본토 영국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이처럼 대구는 유럽인들의 식단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식량자원이었으므로 대구 어장을 둘러싼 각국의 경쟁이 치열했다.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영국이 뉴펀들랜드 인근 어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웠고, 아이슬랜드와 영국, 독일은 북해 어장을 둘러싸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쟁을 벌였다. ‘영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다른 나라 바다에 가서 마음껏 대구를 잡을 수 있었지만, 1950년대부터 아이슬랜드가 영해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12마일, 50마일, 200마일까지 확장하면서 여러 차례 ‘대구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분쟁의 배경에는 남획으로 인한 어획량 감소가 있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바다에 나가 낚시줄만 드리우면 끊임없이 잡을 수 있는 생선이었다. 산업혁명으로 트롤 증기선이 발명되면서 저인망 어선들이 대서양 바다 밑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깊은 바다 밑바닥에 사는 습성을 가진 대구는 냉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어마어마하게 잡혀 소비되기 시작했고, 무한할 것만 같던 대구 어획량은 20세기 중반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각국 정부들은 어획량을 제한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씨가 말라버린 대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책이 처음 나온 1997년에도 뉴펀들랜드에서의 대구 조업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근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대구는 예전 규모를 회복하지 못한 듯 하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엮어낸 마크 쿨란스키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이미 <연어의 시간>에서 비슷하지만 훨씬 더 방대한 연구자료와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맛본 터라 ,<대구>라는 책이 가진 명성에 조금 못 미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각 챕터 끝에 대구라는 생선의 조리법을 소개하는 것도 <연어의 시간>에서 선보인 바 있어 신선함이 떨어졌다. 하지만 <대구>가 <연어의 시간>보다 먼저 출간되었기에 이런 지적은 사실 부당하다. <연어의 시간>이 아니라 <대구>를 먼저 읽었더라면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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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복음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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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작년에 읽은 김유태의 <나쁜 책>에서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과 더불어 예수의 생애를 다룬 “불경한” 책으로 소개되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그 유명한 <눈먼 자들의 도시> 조차 읽지 않았는데 대뜸 이 불경한 책부터 읽게 되었다.

누구나 성경의 내용, 그 중에서도 예수가 등장하는 신약의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점 외에 우리가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예수가 나사렛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는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그의 대담한 상상력으로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한다.

<예수복음>이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같은 복음서는 마태오나 루카 같은 사가들이 예수의 생애를 기술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복음이라고 하면 예수가 스스로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라는 뜻이 된다. 이 책은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이니, 예수의 자서전이 아니라 예수가 자기 삶을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 예수를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예수는 이 소설 안에서 지극히 평범한, 고뇌하는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만 빼면.

수태고지, 예수의 출생, 헤롯 왕의 유아 학살, 광야에서의 시험, 가나의 혼인잔치, 간음한 여인, 오병이어 등의 에피소드들을 설득력 있게 엮어 예수의 삶을 만들어 낸다. 그 중의 백미는 예수가 갈릴리 호수에서 홀로 배를 타고 하나님과 악마 루시퍼와 대면하여 토론하는 장면인데, 감히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심문관 에피소드에 비견할만한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도, 공평무사하지도 않은 신이다. 예수의 발칙한 질문에 당황하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하는, 어찌 보면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신이다. 그리고 가식적이면서 솔직한 신이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된 예수가 그 이유를 묻자, 하나님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 교회가 설립되고 기독교를 믿는 인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히브리 땅을 넘어 전 세계에 미치게 되는 걸 원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예수가 그에 따른 희생을 캐묻자 하나님은 마지 못해 한숨을 쉬며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순교하게 되는 수많은 이들의 끔찍한 죽음의 양태를 열거한다.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악마는 하나님에게 그 모든 권세를 얻은 후 자신을 예전처럼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줄 것을 청한다. 하지만 신은 다음과 같이 악마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그래. 자네를 받아들이지도 용서하지도 않을 거야. 자네가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훨씬 나아.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네가 지금보다 더 나빠졌으면 좋겠어. 왜 그렇습니까. 내가 대표하는 선은 자네가 대표하는 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자네 없이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자네가 끝나면 나도 끝나는 거야. 내가 계속 선이려면 자네가 계속 악이 되는 게 긴요해. 악마가 악마가 아니면 하나님도 하나님일 수 없는 거야.”

이 불경함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무신론자인 내가 봐도 이 대목을 참고 넘어갈 기독교 신자는 없을 터이다. 신이 스스로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하다니!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악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 책의 첫 챕터에 등장하는 문구, “선과 악은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그 반대의 것이 없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신의 뜻이라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악을 없애지 못하는,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이라면 대체 왜 우리가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신이 있든 없든 선과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없이 많은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나님과 악마를 만난 예수는 결심한다.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기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아들로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신의 아들로 죽는 것이 아니니 기독교가 세워질 일도 없고, 하나님이 예언한 수많은 희생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예수는 하나님을 속이고 그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나 같은 무신론자라면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고, 기독교 신자라면 무척 고뇌하면서 읽을 법한 소설이다. 아니면 중간에 내던지던가.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으로 종교를 해부했다면, 주제 사라마구는 문학으로 종교를 해체했다. 도킨스처럼 사라마구 또한 신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웅변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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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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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예전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에서 최재천 교수의 스승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에게 벌어진 일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1970년대, 윌슨은 ‘생물의 사회적 행동은 좀 더 많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내용의 사회생물학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출간한 후 큰 곤욕을 치렀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며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고 생각했던 좌파 지식인들은 일제히 그를 공격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나치가 우생학의 토대로 진화론을 차용했던 것과 진배없다고 말이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오롯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만 비롯된다면, 지금의 불평등 - 성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 등 - 이 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학문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윌슨에게 가해진 건 사회적 테러였다. 재직하던 하버드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협박이 빗발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로부터 물리적인 위협을 받고, 저명한 진화생물학자들(스티븐 J. 굴드, 리처드 르윈턴)에게 공개적인 조롱을 당했다. 그의 이론이 우생학처럼 오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러나 결국엔 윌슨의 이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졌고, 오히려 지금은 스티븐 J 굴드의 이론은 사장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나치가 진화론으로 우생학을 정당화했다고 해서 진화론이 잘못된 이론인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고 해서 핵물리학을 발전시키지 말았어야 하나? 과학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인 수단일 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느냐가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과학에 대한 내 판단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 책 <과학 잔혹사>에 등장하는, 그릇된 방법으로 과학을 연구하고 사용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황우석의 예를 봐도 그렇듯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연구는 과학적으로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비윤리적으로 난자를 채취하여 생명 복제를 연구한 황우석은 자기 이론에 결과를 끼워 맞추려고 논문을 조작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 또한 비록 그 의도가 선했을 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서서히 도덕의식이 마비되어 마침내 파멸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생물 탐사를 위해 해적질을 한 사람도 있고,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 도굴된 시신을 사들인 의사도 있었다. 미국 흑인들이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유라고 일컬어지는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 마을에서의 매독 연구는 비윤리적 실험의 교과서를 보는 듯 하다. 이 책의 원제 ‘Icepick Surgeon’은 전두엽절제술을 발명한 신경학자 월터 프리먼을 일컫는데, 그는 얼음송곳을 정신질환자의 안와에 찔러넣어 전두엽을 휘젓는 수술 방식을 개발하여 난폭한 환자들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라는 명석하지만 예민한 학생을 그 유명한 테러리스트 유나바머로 만들어 버린 심리적 고문도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에 의해 연구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아인슈타인의 말이 인상깊다. “많은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 이에 대해 저자 샘 킨은 이렇게 해석한다. ‘… 과학은 세계에 대해 추론하는 사고 방식이자 과정이자 방법으로, 우리의 희망 사항과 편견을 드러내고 그것을 더 심오하고 신뢰할 만한 진실로 대체하도록 도와준다.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감안할 때, 보고되는 모든 실험을 직접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명예롭고 신뢰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과학이 얼마나 긴밀한 사회적 과정인지를 감안하면, 인권을 유린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거의 항상 결국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 …’

과학적 사실을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연구하는 행위도 우리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 전자는 과학을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후자는 인간을 과학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둘 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의 명성 - 객관적, 절대적 진리라는 대중의 인식 - 을 남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익히 보아 온 디스토피아를 맞지 않으려면 이 두 가지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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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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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커다란 이변이 일어난다. 좌파와 우파가 번갈아 집권하던 정치적 전통을 깨고 극우파 마린 르 펜의 국민전선과 무슬림 이민자 층을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박애당이 결선에 진출한 것이었다. 프랑스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높은 출산율을 유지했고, 이때문에 무슬림 유권자가 크게 늘어나 이슬람박애당의 세력이 확장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우는 정체성 운동, 이슬람은 지하디스트라는 강한 폭력성을 띤 집단과 가까웠기에 결선 투표 직전의 프랑스는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맴돈다. 파리 시내 주택가에서 정체성 운동 단원들이 기관단총을 난사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발생할 정도로 대립은 격화된다. 내전에 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박애당의 당수 모하메드 벤 아베스는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극단주의로 치닫지 않고 노련하게도 극우에 맞서는 대화와 중용의 정치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좌파인 사회당, 그리고 우파인 대중운동연합으로 하여금 연정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결정적으로 ‘하나의 유럽’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던 사회당과 대중운동연합은 반유럽 노선을 표방하는 국민전선과 절대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이슬람박애당은 대연정을 구성하여 결선투표에서 승리한다. 프랑스 최초의 무슬림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벤 아베스는 당선되고 나서도 유연한 기조를 유지했다. 단 두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첫째는 교육 정책의 이슬람화, 둘째는 일부다처제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은 교수나 교사가 될 수 없었고, 여학생들은 모두 부르카를 입어야 했다. 교육 또한 이슬람 교리에 맞는 과목만 개설되었다. 하지만 여성 취업이 제한되면서 실업률이 개선되고, 거대한 중동 석유 자본이 투입되면서 죽어가던 프랑스 경제는 활력을 띠게 된다. 벤 아베스는 천천히 노련하게 서구 민주주의의 첨병 국가 프랑스를 이슬람화 해나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프랑수아라는 이름의 40대 불문학 교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부모와는 거의 연을 끊고 매 학기 여학생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삶을 사는 그는 자신의 인생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는 미리암이라는 유태인 여학생을 사랑하지만, 미리암은 이슬람박애당이 집권할 분위기가 되자 부모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이스라엘에 정착한다. 프랑수아는 정치적 격변이 자신의 발치까지 다가왔음을 느낀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라는 19세기 프랑스 소설가를 연구한 그는 잠시 몸을 피해 위스망스가 카톨릭에 귀의하기 위해 지냈던 수도원에서 지내기도 하고 로카마두르라는 작은 마을의 성물인 검은 성모상을 매일 찾아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결국 종교는 그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할 기회를 놓쳐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미리암을 그리워하며 방황한다. 그의 사회적 삶이 끝장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소르본 이슬람 대학의 신임 총장이 된 르디제가 프랑수아에게 교수직 복귀를 제안한다. 별 볼일 없던 동료 교수가 어린 새 아내를 얻고 연봉이 세 배나 오르는 걸 본 프랑수아는 이 제안에 흔들린다. 르디제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얻은 대가 - 거대한 저택과 열 다섯 살의 둘째 부인 - 을 은근히 자랑한다. 허무주의적인 무신론자 프랑수아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

“혐오스러운 붕괴의 단계에 다다른 서유럽은 5세기에 고대 로마가 그러했듯 더는 몰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의 복종과 선조에 대한 존경 등 여전히 자연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전통문화를 고수하는 이민자의 대량 유입은 유럽이 가족적, 도덕적으로 재무장하기 위한 역사적인 기회였으며, 구대륙의 새로운 황금시대에 대한 전망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 백성들 중엔 간혹 기독교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슬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터였다.”

요컨대 진보와 이성, 무신론이 판치는 현대 유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적 가치관에 기반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이 프랑수아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프랑수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복종>은 대단히 도발적이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의 실명이 거리낌없이 등장하고, 유럽인들이 근심해온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을 발산한다. 미국 내 히스패닉의 다출산 때문에 백인이 소수인종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떠는 MAGA처럼 대놓고 반이민 정서를 노출하진 않지만, 그리고 작가 미셸 우엘벡이 <복종>은 반이슬람적 소설이 아니라고 표명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굉장히 찝찝하다. 소설이 이슬람 문화에 대한 평면적 클리셰로 가득 차 있어 작가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무슬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든 것도 하나의 이유이나, 지식인 주인공이 끝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슬람교에 ‘복종’하는 뒷맛이 무척 씁쓸하다는 게 더 큰 이유이다. 홍상수 영화를 볼때 마다 느끼는 불쾌함이랄까. 허무와 냉소로 무장하고 정치적 담론과 문학적 표현으로 자신을 포장하던 주인공이 결국 복종하게 된 계기는 “대우는 어떤 수준인가? 부인은 몇 명이나 얻을 수 있나?”라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해타산이었다. 주인공이 거기서 더 나아가 여자들이 이슬람 복장으로 몸을 너무 가리고 있는데 부인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냐고 르디제에게 묻는 대목은 노골적이고 천박한 육체적 욕망이 드러나서 읽기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프랑스라는 국가의 메타포인 주인공 프랑수아가 이슬람이 제공하는 속물적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자, 이래도 <복종>이 반이슬람적 소설이 아닌가? 우엘벡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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