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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라파엘 트루히요라는 남자가 있었다. 중남미의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을 1930년부터 1961년까지 철권으로 통치했던 독재자. 그는 박정희와 여러 모로 닮은 자였다. 공화국의 육군사령관이었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장장 32년에 걸친 독재를 편다. 그는 야당 정치인들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억압과 끔찍한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면서도 도미니카공화국을 근대화시키는데 앞장서서 산업을 진흥시키고 사회 인프라를 확충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부는 트루히요와 그의 일가친척들이 독점했다. 덧붙여 트루히요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호색한이었다. 그에게 여자를 상납하는 채홍사가 있었고, 그에게 있어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미성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남미가 공산화될까 두려웠던 미국은 트루히요의 이런 만행을 알고도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던 그를 묵인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트루히요의 행동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미국은 마침내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 책, 염소의 축제는 바로 그 트루히요 암살 사건을 다룬다.
소설은 세 가지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때 트루히요의 총애를 받아 상원의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유도 모른 채 트루히요의 눈밖에 나 몰락한 ‘지식인‘ 아구스틴 카브랄의 딸 우라니아 카브랄. 항상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하고 완벽한 복장과 외모를 갖추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절대 권력을 쥔 그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요실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독재자 트루히요. 트루히요를 암살하기 위해 독재자가 여자와 밀회를 갖는 ‘마호가니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는 4인조.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대에서 펼쳐진다.
우라니아는 트루히요가 암살당하기 직전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병들어 자리보전하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35년 만에 귀국하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트루히요에게 부역했던 그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권력에 빌붙은 자들이 트루히요를 추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트루히요는 당신들, 그러니까 침을 맞거나 학대당할 필요가 있고, 타락해야만 성취했다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마조히즘적 소명 의식을 일깨워주었던 거지요.˝ 도미니카를 떠나기 전,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라니아는 아버지에게 격정을 토로하고 있을까?
칠순의 나이에도 꼿꼿한 기세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눈빛과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고음의 목소리를 지닌 라파엘 트루히요. 공식적으로는 인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선가‘이자 도미니카 공화국을 영도하는 ‘수령‘으로 불리지만, 앞의 이유들로 사람들은 그를 염소라고 부른다. 거센 정력과 악마적인 눈빛을 자랑하는 범접할 수 없는 독재자이지만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 자기도 모르게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남자다. 화급한 소식을 전하러 온 장교의 군화에 먼지가 뒤덮여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처넣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벽증에 가까운 청결을 유지하는 그이기에 이런 자신을 참기 어려워 한다. 그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침대에서 만족시키는 것 뿐이다. 트루히요는 자기가 점찍은 열 일곱 소녀를 ‘마호가니의 집‘에 대령하라고 한 후 운전사와 둘이서만 그곳으로 떠난다. 암살자들이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어두컴컴한 해안가 한적한 도로 옆, 시보레 비스케인을 타고 도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네 명의 암살자들. 그들에게는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개인적인 동기가 있다. 트루히요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그녀의 남동생을 죽여야 했던 트루히요의 경호부대원 아마디토 중위. 사랑하는 동생이 반(反)트루히요 인사를 처치하는데 이용된 후 살해당한 지역 유지 안토니오 델라 마사. 트루히요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에 트루히요 반대자들이 상륙하는 걸 막지 못해 추락한 전 주지사 안토니오 임베르트.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주교와 사제들을 탄압하는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 그들에겐 각자의 동기 외에도 독재자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이렇게 말이다.
˝그는 자기가 어떤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지, 젊어서 지금까지 어떤 정부를 위해 봉사해 왔는지 깨달은 이후, 그는 마치 포로가 된 것 같았다. 모든 걸음, 행선지, 움직임이 통제되고 감시당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그런 느낌에서 해방되고 싶어 마침내 트루히요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
˝아무도 모르는 그의 마음 후미진 곳에서 그는 트루히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트루히요가 살아 있는 한 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도미니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불쾌감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며, 매 순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이 되어야 하는 형벌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즉 공적인 장소에서는 진실을 감춘 채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상념에 빠진 그들의 앞에 마침내 ‘염소‘가 탄 차, 시보레 벨에어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암살자들은 시동을 켜고 도로를 질주하며 독재자를 추격한다. 마침내 독재자와 나란히 달리게 된 4인조는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차를 벌집으로 만들어 극적으로 ‘염소‘를 사냥하는데 성공한다. 트루히요가 죽어버린 지금, 2권에서 펼쳐질 미래는 기나긴 독재의 종말일까? 아니면 끝나지 않는 암흑의 터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