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산이 현대사 2 : 사회·문화 - 전우용의 근현대 한국 박물지 잡동산이 현대사 2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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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을 다룬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회·문화 전반의 사물들을 주제로 한다. 사전, 동화책, 연필처럼 학습에 필요한 것들, 신문, 전화기, 라디오와 같이 소통에 필요한 물건들, 전봇대, 터널, 공원처럼 무언가를 조성하는데 쓰이는 것들, 자전거, 시내버스, 케이블카 같은 탈것들이 등장한다. 아무래도 1권에 등장한 물건들처럼 아기자기한 맛은 덜하지만 전우용 교수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과 방대한 지식은 여전히 놀랍다.

그 예시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근대 유럽인들은 자기들만이 ‘역사‘를 가진 문명인이고 다른 대륙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취급하였고, 그래서 유럽 문명의 전개 과정을 다루는 학문은 역사학으로, 다른 지역의 전개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인류학으로 구분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강렬하게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도 인류학 서적을 읽으면서 은연 중에 인류학의 대상이 되는 민족의 야만성을 의심하지 않았나.

극장을 다루면서 ‘극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극장 같은 국가를 만들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 파시즘’이라는 그의 설명은 또 어떤가. ‘파시즘 체제 하에서 국민은 관객과 같은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멋진 장면이 나올 때 박수 칠 의무는 있었으나 그 장면에 개입할 권리는 없었다.‘는 대목에서는 감탄이 나온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잘 모르던 단어의 어원도 알려준다. ‘표 끊는다‘는 말은 근대 조선 최초의 공연장인 협률사에서 티켓을 발행할 때, 판매자가 보관하는 부분과 관객이 지참할 부분을 한 장의 표로 만들어서 판매할 때는 관객용만 따로 끊어서 주었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거들먹거리다‘라는 말은 조선시대 무관의 말고삐를 잡는 사람인 ‘거덜‘이 상전의 위세를 믿고 행인들을 함부로 대한데서 나왔다는 거다.

단점이 없는 책은 아니다. 전우용 교수의 시선이 날카롭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등장하는 사물의 부정적 속성을 곧바로 현대인에 등치시키면서 지금을 사는 우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은데, 너무 빈도가 잦다 보니 피로감이 적지 않게 든다. 재미있는 책인데도 왠지 진도가 잘 안 나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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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산이 현대사 1 : 일상ㆍ생활 - 전우용의 근현대 한국 박물지 잡동산이 현대사 1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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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산이‘는 원래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지은, 당시 떠도는 잡다한 이야기와 지식들을 정리한 책의 제목이었다. 하찮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이르는 말인 잡동사니는 여기서 유래했다. 전우용 교수는 잡동사니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사소한 물건들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결한다. 별 것 없어 보이는 물건이 우리의 삶과 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우리는 어떻게 현대인으로 변해 왔는지를 말한다.

새로이 등장한 물건은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습관은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보자. 조선 시대 까지만 해도 장보기는 남자의 일이었다. 집에서 장까지의 거리가 멀었고, 장에 가서 팔고 사는 짐이 무거웠고, 장사꾼 대부분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라는 동요도 있잖은가. 1910년대 말까지만 해도 양가집 부인이 장 보러 다니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양상이 달라진다. 전차나 기차 같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극장 등 대중이 이용하는 시설이 늘면서 남녀유별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게다가 일제 치하에 들어간 조선에선 대다수의 조선인 관리들이 해직되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관리들은 행랑채의 하인들을 내보냈고, 하인의 일은 주인 마님에게로 돌아갔다. 자연히 도시의 부잣집 마나님은 장보러 시장에 나가야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남자들은 일제에 저항하거나 일제에 봉사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남자는 어느 방향으로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을 해야지 장보기 같은 시시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퍼져나갔다. 이렇게 시장은 여성들만의 공간이 되었다.

최근 남자들이 다시 장을 보게 된 건 양성 평등 의식의 대두라기 보다는 대형 할인점이 등장한 탓이 컸다. 자가용을 몰고 마트에 가서 생필품을 카트 한가득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쇼핑 양태는 어느 정도 남자의 완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남성이 혼자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게 대중의 의식이 변하게 된다. 이처럼 ‘장보기‘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을 바꾼 건 교통수단의 발달이었고 그에 따른 생활 습관의 변화였다.

<잡동산이 현대사 1>에서는 우리의 일상과 생활에 관한 물건들을 다룬다. 거울, 비누, 냉장고, 커피, 지갑, 슬리퍼, 형광등, 의자처럼 우리의 의식주에 관련된 소소한 물건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책을 읽다 보면 물건들 하나 하나에 어떻게 우리의 근현대사가 담겨 있는지를 그의 평소 말투처럼 조곤조곤 알려주는 전우용 교수의 글발과 지식에 탄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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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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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암살자들은 성공했다. 31년 동안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을 숨도 못 쉬게 억압하고 그들의 신음하는 몸뚱이 위에 군림했던 독재자 트루히요. 그 ‘염소‘를 길가에 널부러진 시체로 만드는데 성공했단 말이다. 염소 사냥에 성공한 지금, 이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 절반의 독재는 종식되고 민주주의의 봄이 꽃필 수 있을까?

1권과 마찬가지로 2권도 챕터별로 우라니아, 트루히요, 암살자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하지만 트루히요의 시점으로 전개되던 챕터가 마침내 암살자들과 조우하여 총격을 받은 이후엔 본격적으로 트루히요 사후의 아수라장이 숨막힐 듯 펼쳐진다. 암살자들은 성공했지만 그들이 사전에 모의했던 암살 이후의 계획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원래는 트루히요 암살에 성공한 후 국방부장관인 푸포 로만이 트루히요 정권의 핵심 추종자들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후 민주적인 정권 이양으로 나아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다음 중정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가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듯이, 푸포 로만은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잘못된 결정을 거듭한다. 트루히요의 오른팔인 첩보부대장 아베스 가르시아를 체포하지도 않았고, 트루히요의 가족들이 권력을 차지하는 걸 방조했으며, 군대를 장악하지도 못했다. 트루히요는 평소에도 툭하면 푸포 로만을 모욕하고 겁박했는데, 그 앞에서 쩔쩔 매던 국방부장관은 트루히요가 죽은 후에도 독재자의 망령에 주눅이 든 것이다. 이처럼 독재는 권력에 아무리 가까이 있는 이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암살 후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어야 할 푸포 로만이 우유부단하게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암살자들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암살에 성공하고 이곳저곳에 은신하여 몸을 의탁하고 있던 그들은 하나 둘씩 칼리에(아베스 가르시아의 첩보부대원)들에게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이다 스러지거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이 중 백미는 푸포 로만의 최후인데, 아베스 가르시아의 집요한 추적 끝에 암살 음모 속 푸포 로만의 역할이 발각된다.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된 로만은 고문실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문을 당한다. 이 과정이 소설 속에서 무척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트루히요의 아들들이 벌이는 이 피의 ‘축제‘는 다시 떠올리기도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다. 독재가 어떻게 국민을 망가뜨리는지를 은유적으로, 그리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독재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독재자의 죽음을 열렬히 추모하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히요의 동생들과 아들들에겐 군대의 총칼만 있었지, 그걸 권력을 연결시킬 머리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린 건 트루히요가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세웠던 호아킨 발라게르였다. 허수아비인 줄만 알았던 발라게르는 탁월한 상황 판단으로 트루히요의 아내와 장남을 구슬리고 그 가족들을 서로 이간질시키며 서서히 권력을 장악해 간다. 이 소설에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발라게르가 트루히요 일가를 축출하는데 성공하고 암살자들을 복권하는 것까지만 보여주지만 사실 그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된다. 발라게르는 군사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독재자로 장기집권하게 된다. 독재의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은 이렇게나 어렵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고문이 남성적 폭력이라면, 우라니아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여성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 독재는 특히 여성에게 잔인했습니다. ...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권위주의 체제는 실제로 여자를 허약한 대상으로 만들어 마구 짓밟습니다. 트루히요에게 섹스는 권력과 남성성, 그리고 남성우월주의 사회의 최고 가치를 보여주는 상징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항상 대상이 되는 겁니다. 부모들은 딸을 트루히요에게 선물하고, 그는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의 아내와 잠자리를 하면서 치욕을 줍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의 권력과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트루히요의 최측근이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은 상원의장 아구스틴 카브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트루히요의 채홍사인 마누엘 알폰소에게까지 도움을 구하게 된다. 그는 고뇌와 번민 끝에 알폰소의 조언에 따라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 우라니아를 트루히요에게 바치기로 한다. 열 네살 밖에 안 된 우라니아가 트루히요가 여자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 만든 ‘마호가니의 집‘으로 불려가 트루히요와 잠자리를 갖게 되는 과정을 보는 건, 푸포 로만이 끔찍한 고문 끝에 최후를 맞는 과정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다. ‘욕망과 본능과 권력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한 소녀가 독재자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국가 권력이 국민을 어떻게 수탈하는지 보여주는 메타포라 하겠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책을 읽은 기분이다. 만약 작년 12월 3일의 그 밤에 우리 국민들이 나서서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면, 그 이후에 벌어졌을 일들은 이 책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했을 터이다. 민주주의는 이토록 힘겹게 키워나갈 수 밖에 없으며, 내란의 뿌리는 뽑아내기가 지독히도 어렵다. 도미니카 공화국 역시 한 명의 독재자를 제거해도 또 다른 독재자가 들어서지 않았나. 부디 다음 달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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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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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트루히요라는 남자가 있었다. 중남미의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을 1930년부터 1961년까지 철권으로 통치했던 독재자. 그는 박정희와 여러 모로 닮은 자였다. 공화국의 육군사령관이었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장장 32년에 걸친 독재를 편다. 그는 야당 정치인들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억압과 끔찍한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면서도 도미니카공화국을 근대화시키는데 앞장서서 산업을 진흥시키고 사회 인프라를 확충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부는 트루히요와 그의 일가친척들이 독점했다. 덧붙여 트루히요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호색한이었다. 그에게 여자를 상납하는 채홍사가 있었고, 그에게 있어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미성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남미가 공산화될까 두려웠던 미국은 트루히요의 이런 만행을 알고도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던 그를 묵인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트루히요의 행동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미국은 마침내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 책, 염소의 축제는 바로 그 트루히요 암살 사건을 다룬다.

소설은 세 가지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때 트루히요의 총애를 받아 상원의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유도 모른 채 트루히요의 눈밖에 나 몰락한 ‘지식인‘ 아구스틴 카브랄의 딸 우라니아 카브랄. 항상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하고 완벽한 복장과 외모를 갖추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절대 권력을 쥔 그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요실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독재자 트루히요. 트루히요를 암살하기 위해 독재자가 여자와 밀회를 갖는 ‘마호가니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는 4인조.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대에서 펼쳐진다.

우라니아는 트루히요가 암살당하기 직전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병들어 자리보전하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35년 만에 귀국하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트루히요에게 부역했던 그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권력에 빌붙은 자들이 트루히요를 추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트루히요는 당신들, 그러니까 침을 맞거나 학대당할 필요가 있고, 타락해야만 성취했다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마조히즘적 소명 의식을 일깨워주었던 거지요.˝ 도미니카를 떠나기 전,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라니아는 아버지에게 격정을 토로하고 있을까?

칠순의 나이에도 꼿꼿한 기세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눈빛과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고음의 목소리를 지닌 라파엘 트루히요. 공식적으로는 인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선가‘이자 도미니카 공화국을 영도하는 ‘수령‘으로 불리지만, 앞의 이유들로 사람들은 그를 염소라고 부른다. 거센 정력과 악마적인 눈빛을 자랑하는 범접할 수 없는 독재자이지만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 자기도 모르게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남자다. 화급한 소식을 전하러 온 장교의 군화에 먼지가 뒤덮여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처넣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벽증에 가까운 청결을 유지하는 그이기에 이런 자신을 참기 어려워 한다. 그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침대에서 만족시키는 것 뿐이다. 트루히요는 자기가 점찍은 열 일곱 소녀를 ‘마호가니의 집‘에 대령하라고 한 후 운전사와 둘이서만 그곳으로 떠난다. 암살자들이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어두컴컴한 해안가 한적한 도로 옆, 시보레 비스케인을 타고 도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네 명의 암살자들. 그들에게는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개인적인 동기가 있다. 트루히요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그녀의 남동생을 죽여야 했던 트루히요의 경호부대원 아마디토 중위. 사랑하는 동생이 반(反)트루히요 인사를 처치하는데 이용된 후 살해당한 지역 유지 안토니오 델라 마사. 트루히요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에 트루히요 반대자들이 상륙하는 걸 막지 못해 추락한 전 주지사 안토니오 임베르트.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주교와 사제들을 탄압하는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 그들에겐 각자의 동기 외에도 독재자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이렇게 말이다.

˝그는 자기가 어떤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지, 젊어서 지금까지 어떤 정부를 위해 봉사해 왔는지 깨달은 이후, 그는 마치 포로가 된 것 같았다. 모든 걸음, 행선지, 움직임이 통제되고 감시당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그런 느낌에서 해방되고 싶어 마침내 트루히요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

˝아무도 모르는 그의 마음 후미진 곳에서 그는 트루히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트루히요가 살아 있는 한 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도미니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불쾌감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며, 매 순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이 되어야 하는 형벌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즉 공적인 장소에서는 진실을 감춘 채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상념에 빠진 그들의 앞에 마침내 ‘염소‘가 탄 차, 시보레 벨에어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암살자들은 시동을 켜고 도로를 질주하며 독재자를 추격한다. 마침내 독재자와 나란히 달리게 된 4인조는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차를 벌집으로 만들어 극적으로 ‘염소‘를 사냥하는데 성공한다. 트루히요가 죽어버린 지금, 2권에서 펼쳐질 미래는 기나긴 독재의 종말일까? 아니면 끝나지 않는 암흑의 터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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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비밀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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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과학 저술가 샘 킨의 또 다른 작품. 그가 이 책에서 소재로 삼은 것은 ‘공기‘이다. 그의 전작들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나 <사라진 스푼>처럼 진화론과 화학 같은 특정한 분야를 주제로 하는 게 아니어서 그런지, 훨씬 자유롭게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든다. 화산 폭발이 지구 대기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면서 지구 과학을 다루고, 마취 가스의 발명에 대해 서술하면서 의학을 등장시키고, 비활성기체가 주기율표에 들어가게 된 곡절을 통해 화학을 말한다. 수억 년에 걸쳐 산소가 급증하게 된 사건을 다루면서 생물학이 등장하고, 대기 중 요오드 농도를 핵물리학과 연관지어 설명하며, 일기예보의 역사를 말하는 도중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이 등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들이 공기를 매개로 다루어지다 보니 과학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져서 책을 덮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덤.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로마원로원에서 반대파 의원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한 그 날,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그 날, 카이사르는 칼에 찔린 채 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그의 폐 속에 남아 있던 약 1.0L의 공기, 270해 개의 공기 분자들은 바람을 타고 1~2년 안에 지구 전체에 퍼진다. 대기권 내의 공기량에 비해 미미한 이 1.0L의 공기를 과연 우리가 만날 일이 있겠나 싶지만, 확률적으로 계산해 보면 놀랍게도 카이사르가 마지막 내쉬었던 숨에 포함되어 있던 분자 1개가 다음 번 내가 들이쉬는 숨에 포함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 벌어졌던 역사의 일부가 지금 내 몸 속을 드나들고 있다는 놀라운 상상! 비단 카이사르 뿐만 아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내쉬었을 숨결, 80년 오월 광주의 그 밤에 전남도청에 있던 사람들의 마지막 숨결도 지금 이 순간 내 폐 한 구석에 역사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샘 킨은 말한다. ‘우리는 한 모금의 숨결에 온 세계를 담을 수 있다‘고. 또 ‘우리가 단 한 번 들이쉬는 숨 속에도 세계의 모든 역사가 들어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만약 우리 인류가 먼 훗날 외계의 어느 행성에 정착하여 그곳의 공기를 호흡하는 순간, 우리 폐 속에 있던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결은 그 행성의 대기에 섞일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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