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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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권위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의 초기작이다. 근 15년 쯤 전 그의 저작들을 열심히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 구입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가 이후에 집필한 작품들 대부분이 이 책에서 다루는 시대 - 명말청초부터 천안문까지 - 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 <현대 중국을 찾아서>는 스펜서 교수의 학문 여정에 대한 개괄서라 하겠다. 개괄서라서 그런지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천안문> 같은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 재미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요즘 진보진영의 중국 관계 전문 스피커로 유명해진 김희교 교수가 젊은 시절 - 이 책은 우리나라에선 1998년에 초판이 인쇄되었다 - 번역을 맡은 책인데, 막힘없이 술술 읽히도록 번역이 꽤 잘 되어 있다.

제목은 ‘현대 중국을 찾아서‘이지만 정작 책의 시작은 20세기 초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부터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 이유를 밝히는데, ‘그렇게 해야만 현재 중국의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또 중국인들이 어떤 자원(지적·경제적·정서적)을 이용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는지를 최대한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근대 중국의 사건들을 되짚어 볼때 명말청초의 사건들이 소환되곤 한다. 저자의 이러한 시선은 현대 중국 공산당이 추구하는 노선이 우리의 통념과는 다르게 중국의 과거 역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리라. 저자는 중국인들이 ‘현재에 대한 환멸과 과거에 대한 향수가 미래에 대한 열정적 희망과 결합되어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불확실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한‘ 사례로 1644년 청나라 수립, 1911년 신해혁명,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들며, 이 사건들을 통해 혼란스러운 현대 중국이 - 이 책은 천안문 사태 즈음에 쓰여졌다 - 앞으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위치할 수 있을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1권은 명말부터 모택동의 대장정까지를 다룬다. 옛날 책이라 중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눈에 띄지 않지만, 세계사 시간에 스쳐가듯 배웠던 이홍장, 증국번, 임칙서 등의 인물들의 활약상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서구의 열강들이 어떻게 중국을 침탈하려 했고, 청 왕조와 민중들은 어떻게 이를 극복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에너지의 응축과 분출은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지구 반대편 중국에서의 열강들 간의 세력 균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밝히는 대목은 국가와 지역을 기준으로 역사를 나누어 파악하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가를 일깨워준다.

2권은 일본의 본격적인 만주 침략부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현대 중국의 완성이라 할만한 장면들이 숱하게 등장할 것이다. 저자가 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해석할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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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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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꿈꾼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연애를.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동화는 대개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온 주인공들이 마침내 결혼하여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될 결혼 이후의 삶은 보여주지 않는다. 결혼 뒤엔 지독히 ‘현실적인‘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인생은 행복한 한 순간의 토막이 아니라 수많은 연속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이다. ‘Happily ever after‘는 동화의 해피엔딩을 위한 환상일 뿐이다.

이 신세대적인 - 작품이 쓰여진 시기엔 칭찬이었을 수 있으나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낡아버린 감각 - 소설은 눈물의 여왕과 침묵의 왕이 각기 자기 시선에서 바라보는 동일한 동화 두 편으로 시작한다.

- 마녀의 저주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눈물이 끊이지 않았던 여왕은 나이팅게일이 물어다 준 콩꼬투리를 먹고 선왕의 기일에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궁전에서 쫓겨난다. 정처없이 도착한 땅에서 여왕은 강을 마주 보고 말이 없는 이웃 나라 왕과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여왕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이웃 나라 왕을 발견한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왕의 입술에 흘러들자 왕은 깨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이제 울어도 괜찮소.˝ 두 사람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 마녀의 저주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말이 없던 왕은 종달새가 물어다 준 콩꼬투리를 먹고 어머니의 기일에 실성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다 궁전에서 쫓겨난다. 정처없이 도착한 땅에서 왕은 강을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웃 나라 여왕과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왕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진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왕의 입술에 흘러들자 왕은 깨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이젠 괜찮소.˝ 두 사람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대학 노래패에서 만난 신입생 장미와 명제. 장미는 눈물이 많고, 명제는 말이 없다. 서두의 동화 주인공 같은 그들은 사실 각기 다른 상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치대생 서정우와 화려한 한서영. 하지만 운명은 그들 네 명을 엇갈리게 하고 젊은 날의 가슴 떨림은 맺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1부. 2부에서는 본격적인 동화가 시작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장미와 명제는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하고, 상대를 운명의 파트너라 확신하는 몇 가지 사건을 거쳐 결혼에 이르른다. 3부는 현실이다. 동화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대의 단점에 실망하고, 실망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확신이 된다. 둘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고 헤어지지만 영원한 행복은 없듯이 영원한 미움도 없나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시간은 힘이 세지만 사랑도 힘이 세다.‘ 둘은 상대가 달라졌다는 - 맑고 깊어진 눈, 옹골차진 속 - 믿음에 다시 결합한다. 4부는 둘이 재혼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이혼 전보다 깊어졌으며 옹골차졌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둘은 변한 줄 알았지만 사실 그들의 근본적인 자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 내면의 아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상처받기 쉬운 어릴 적 자아는 서로를 못 견뎌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래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두 번째 이혼 후 두 사람은 모종의 사건을 통해 각자의 미성숙함을 깨닫고 비로소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침묵 왕자는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고 눈물 공주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헤어짐 끝에 드디어 저주가 깨진 것이다.

가볍게 읽을 수도, 깊게 분석할 수도 있는 묘한 소설이다. 젊은 날의 운명 같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과 전쟁‘스러운 오해와 갈등을 거쳐, 오은영 박사의 ‘결혼 지옥‘을 보는 듯한 치유와 화해의 길로 인도한다. 김경욱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로 쓰인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하고, 장미와 명제의 챕터가 교차하며 같은 사건을 남녀 각각의 시각에서 보여주는 심리 소설 같기도 하다. 아니면 강유정 평론가가 지적했듯 ˝사랑이란 나를 비우는 지경임을 경험해 본 자들에게는 애틋한 성장소설로 읽힐 것이다.˝ 동화 같은 현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동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동화처럼>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어른아이들에게 필요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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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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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된 건 김영하 작가의 강연회에서였다. 이야기의 힘을 주제로 한 강연 중, 김영하 작가는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어딘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연상케 하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원제는 <The Adventure of Homo Fictus>라 윤색이 많이 가미된 번역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책은 거기서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기대했던 것과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이 책이 인간은 이야기를 왜 좋아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이 세계를 쌓아 올렸는지를 알려주리라 기대했다. 전자는 내가 기대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스토리텔링의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나치가 독일 국민들을 지배하여 거대한 학살 기계를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치가 만들어낸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스토리텔링의 힘 때문이었다. 21세기에 지구평평설이나 큐어넌 같은 극도로 비이성적인 음모론자들이 횡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건 바로 이야기가 갖는 ‘구슬림‘의 힘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평생 타인과 소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타인의 행동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구슬리기‘ 위해서라고. 심지어 나에게 하는 독백도 내 행동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서로를 단단히 구슬려 마음을 영영 돌려놓는 수단 중에서 인류가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야기에 매혹되어 불합리한 맹신에 빠지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도 수없이 목격한다. 물론 이야기가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구슬려서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릇된 구슬림이 끼치는 폐해가 너무나 크다는 게 문제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동물, Homo Fictus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마치 도구처럼 사용한다. 같은 칼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멋진 요리가 탄생하기도,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가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 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라고 이름붙여진 것이다.

플라톤은 이야기의 어두운 본성을 진작에 깨달았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구름>에서 삿된 궤변술의 달인으로 묘사되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큰 반감을 사고 결국엔 독미나리차를 마시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저작 <국가>에서 이야기꾼이 아닌 철인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꿈꾸었다. 그리고 시인을 최후의 1인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국가의 권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이야기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힘은 고유한 매력 못지 않게 확산되는 속도에도 달려 있다. 20세기에 등장한 라디오, TV, 인터넷 등의 매스미디어는 이 속도를 급속히 끌어올렸다. 1994년의 르완다 대학살은 불과 100일 동안에 80만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후투족은 한 손에는 라디오를, 한 손에는 마체테를 들고 어제까지의 이웃, 동료, 친구였던 투치족을 살해했다.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방송이 송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어둡고 끔찍한 이야기, 사악하고 어리석은 속삭임에 이끌리는가? 이를테면 음모론 같은 것들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밝은 이야기는 지루하지만, 어두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이는 유튜브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극적인 사이버렉카 채널이 유익한 정보로 가득 찬 채널의 구독자 수를 압도한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를 쉽게 밀어낼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 더 힘있는 이야기가 진실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끝에서 그 적나라한 예시를 든다. 바로 트럼프의 당선이다. 대선 개표 당일까지도 힐러리 유력을 띄웠던 건, 다시 말해 트럼프가 과소평가된 건 언론들이 트럼프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초등학생 수준의 어휘로 이루어진 서투르기 짝이 없는 연설을 하지만, 지극히 원초적이고 명쾌한 이야기를 미국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들려주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우리가 암흑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과학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이야기가 진실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데 트럼프만한 상징이 있을까. 트럼프는 과학을 무시한다. 코로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당과의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했다. 당장 이번 미 대선만 해도 별다른 서사 없이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했던 해리스를 암살의 총탄이 극적으로 비껴간 트럼프가 압도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 탈진실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과학이다. 과학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게끔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과학이 권위를 되찾으려면 - 과학자들이 지구평평설 따위와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 진실을 말하는 제도, 즉 학계와 언론이 달라져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적 성향이 왼쪽으로 극도로 치우쳐진 미국의 학계와 언론 지형이 만들어낸 불균형이 결국 학문과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심각한 불신을 만들었고 음모론에 경도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 책의 분석과는 다르게 트럼프의 재선은 단지 트럼프가 꾸며낸 서사 만이 아닌 미국 민주당의 국민의 보편 정서와 유리된 정책의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학문과 언론의 편향된 이념 지형이 과학적 진실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는 저자의 결론에 쉬이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에선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대중의 극심한 반발이 있어야 했다. 과연 그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힘은 인정하지만,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진실이 다 덮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AI의 시대에 딥페이크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자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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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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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싫어. 피가 뚝뚝 듣는 새빨간 덩어리들이 무서워. 고기와 시체가 어떻게 다른 거지? 그 벌건 덩어리들이 정형되어 포장되면 순식간에 맛난 고기로 이미지가 탈바꿈해. 왁자지껄 즐겁게 고기를 굽고 맛있게 먹는 사람들. 하지만 내 손엔, 내 옷엔 아직 피가 묻어 있어. 나는 내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어떻게 이 덩어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 온 걸까?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어.


한강의 소설을 읽는 동안엔 그녀가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한다. 편히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밀도를 지닌 한강의 글에 짓눌려 며칠을 앓는다. 그래서 다른 작가와 달리 한강의 작품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선 약간의 자신감이 솟아났다. 그녀의 소설을 연달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그래서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한참 전부터 집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몇 년 전 맨부커 상을 탔을 때도 차마 읽지 못했던 그 책을.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의 시선으로 쓰였고,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의 남편, 즉 형부가 사건을 이끌어 가며,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가 주인공이다. 세 편 중 어느 것도 영혜가 주인공인 적은 없으나 우리 모두 영혜가 진짜 주인공임을 안다. 세 작품 모두 영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그녀 주변 세 사람의 시선으로 조망하는 것이니까.

<채식주의자>는 소름끼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선언한 적도 없고, 선택한 적도 없다. 어느 날 꿈을 꾸고 나서부터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죽음과 연결된다. 채식도 식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다를 바 없지 않냐고 할 수 있겠으나, 고기를 먹기 위해선 생명에 대한 잔인하고 무도한 폭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으로 너무도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를 영혜는 그 꿈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마트 정육 코너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를 사기 때문에 그 폭력을 실감할 틈이 없다. 정육점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세로로 반토막나 커다란 갈고리에 매달린 돼지를 보며 끔찍함을 느낄 때를 빼고는.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았다는 영혜의 아버지는 폭력을 상징한다. 가부장제의 폭력, 권위주의 시대의 폭력, 남성우월주의의 폭력. 숨쉬듯 폭력이 행해지던 시대를 살았기에 그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혜는 그 숨막힐 듯한 폭력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의 이미지를 연결한다. 그래서 그녀는 폭력에 저항하며 육식을 거부한다.

영혜의 남편은 어떠한가. 스스로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원하는 남자.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영혜와 결혼했다는 남자. 그가 원한 것은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듣고, 아침 상을 꼬박꼬박 차려 주고, ‘내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는 아내였다. 아내의 의견, 취향, 개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아내에게 어떤 폭압으로 작용하는지는 관심도 없다.

영혜는 저항한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서. 가슴을 열어 젖힘으로서. 고기를 거부하기 전에도 집에 있을 땐 브라를 하지 않았다는 영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집에서 브라를 입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영혜는 이제 어떤 자리에서도 더 이상 브라를 하지 않는다. 급기야는 병원 뜰에서 환자복 상의를 벗어 버림으로써 그녀는 과거의 순종적인 그녀, 폭력을 말없이 받아들였던 그녀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다.

<몽고반점>은 기괴하다. 영혜가 손목을 그은 날, 그녀를 엎고 정신없이 병원에 데리고 가느라 피범벅이 된 영혜의 형부는 그 후로 불가해한 이미지에 시달린다.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후, 문득 그의 뇌리엔 나신의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엉겨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예술가였던 그는 그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고 싶은 욕망, 그 주인공이 자기와 처제였으면 하는 욕망,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금기를 어기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라고 자책하면서.

인간은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영혜는 몸에 꽃을 그려넣어 식물이 되고 싶은 욕망에, 형부는 머릿 속의 강렬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체현하고 싶은 욕망에 결국 금기를 넘어 버린다. 둘의 관계는 각각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타인의 시선에서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추잡한 짓거리다. 그래서 영혜의 언니, 인혜는 구급대를 불러 두 사람을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

<나무 불꽃>은 비감하다. 인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생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 자기 남편과 몸을 섞은 동생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가족 모두가 연을 끊어버린 영혜를 그녀는 끝까지 보호한다. 입원비를 대고, 주말이면 면회를 가고, 점점 가라앉아 가는 영혜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아는 타고난 천성 덕분인지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영혜를 은밀히 미워했다.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식사 자체를 거부해 버린 동생을 보며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여섯살 난 아들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녀 또한 영혜처럼 변해 버렸을지 모른다고. 남편과 영혜의 그 사건 이후 지내온 수많은 불면과 고통의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아들이 지워준 엄마로서의 책임이었다. 이인성의 소설 제목처럼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인혜의 삶은 그 자체로 천형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견뎌왔을 뿐.

12년 전, <바람이 분다, 가라>의 서평을 쓰면서 한강을 ‘우리 시대 한국 문학의 마녀‘라 이름 붙였었다. 처절하고 여리고 가냘픈 모습을 하고 광기와 슬픔, 고통을 마력적으로 변주해 내는 마녀. 이제는 그녀를 마에스트로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강은 이제 어둠, 슬픔, 고통, 낯설음, 고결함을 개인을 넘어 사회와 시대의 차원으로 확장한 감정의 교향곡을 세심하게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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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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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이었다. 이 책을 산 건.
한강의 소설은 늘 힘들었다. 타협 없이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어 마구 휘저어대는 한강 특유의 아름다운 비수 같은 문장 때문이었다. 8년 전 읽었던 <소년이 온다>는 그 절정이었다. 슬픔, 분노, 부끄러움, 아픔, 안타까움 같은 수많은 감정이 밀려드는 폭풍 속에서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서 책을 내려 놓고 괜히 하늘을 바라보기가 여러 번. 그래서 두려웠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그런 소설이 아닐까. <소년이 온다>와 쌍둥이 같은 소설이 아닐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환희로 가득 찼던 마음이 잔잔해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이젠 한강의 작품이 주는 지극한 슬픔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어느 기자의 말처럼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문학에 감염된 이들이 믿어 온 문학의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 거대한 경이의 순간이기에, 그 자리에 동참하여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 감격스러움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었지만 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감정선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장면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을까. 현실과 꿈(혹은 환상)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이 소설의 특징 때문이었을까. 작년에 읽었던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에선 4·3의 참상이 무척이나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페이지를 넘기기가 두려웠었다.

사실 이 책의 초점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데 맞춰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한서림을 공유하고 서사로 남김으로써 치유 - 절대 화해가 아니다 - 를 모색하는 것이다. 혈육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 수 년에 걸친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승만의 후예들이 정권을 잃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망자들을 묻어야 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더미 속에, 모래밭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는 드센 밀물 속에.

하지만 그들은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끔찍한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짐승을 도축하듯 도민들을 학살한 무도한 국가를. 구제역이 유행할 때 소떼를 산채로 땅에 파묻듯이, 이승만 정권은 국가의 폭압에 저항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절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인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희생자 유족들은 그렇게 묻힌 이들과 작별할 수 없었다. 아니 작별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인선의 어머니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요 밑에 실톱을 깔고 잤지만, 그 악몽은 유해가 발굴되고 진실이 규명되어야만 사라졌을 것이다. 오빠가 언제 죽었는지,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 채 조용히 늙어가고 죽음을 맞은 인선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책은 그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레퀴엠이자 어둠을 희미하게 밀어내는 작은 불꽃이다.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 경하가 간절히 켜냈던 성냥불처럼.

어린 시절을 제주에서 보냈던 나에게 <작별하지 않는다> 속 제주 사투리는 새로운 차원의 추체험을 선사했다. 작중 할머니들의 ‘육지‘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머릿 속에서 또렷하게 재생하여 그네들의 단단히 묵힌 슬픔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요즘 유행하는 농담과 같이 노벨 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은 경험이랄까. 경하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새를 구하러 가는 길에 겪는 폭설도 제주의 중산간에 내린 어마어마한 눈을 보아왔던 나에겐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듯 선했다.

한강은 책 끝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썼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슬픔과 분노로만 4·3을 해석하지 않는다. 왜 이 책이 다른 한강의 소설에 비해 덜 힘들었는지 이젠 알 것 같다. 작별하지 않기 위해 힘껏 애썼던 이들의 사랑, 그 지극함에 대한 소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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