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엄마에게
한시영 지음 / 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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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속 에피소드에 등장할 법한 어린 여자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술을 마시는 여자’였다. 잠깐 요 앞 슈퍼에 간다고, 아니면 누굴 좀 만나고 오겠다고 사라졌다 며칠 후 술에 잔뜩 취한 채 어디에선가 발견되는 사람. 그럴 때면 그 아이는 교복을 입은 채 인사불성인 엄마를 건사하러 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척. 하지만 그 아이는 사실 엄마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 미움은 ’엄마가 저러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사랑받을 만한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라는 자기 혐오의 언저리까지 가닿는다.

처음 책을 내는 작가가 어찌 이렇게까지 자신을 숨기지 않고 보여줄 수 있을까 의아했다면, 이게 그 답일 듯 하다. 작가 한시영에게 있어 이 책을 쓴다는 행위와 그 지난한 과정은 - 기독교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 엄마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초혼(招魂)이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씻김굿이다. 그렇기에 내 안의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했으리라. 엄마가 만들고 내 안에서 곰삭은 그것들을 차분히 응시해야만 했으리라.

어린 두 딸들을 품안에 가득 보듬는 행복과 알콜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은 엄마를 돌보는 고단함 사이의 크나큰 간극. 나를 두고 왜 그랬냐고 엄마를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지만, 딸은 이제 엄마가 된 후 깨닫는다. 엉망진창인 것만 같았던 저 사람도 내 엄마가 되기 위해, 내 엄마로 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 거였구나.

한시영의 글에는 가만히 곱씹게 하는 힘이 있다. 문장 어느 하나도 건성으로 지나치지 못하도록 하는 힘. 괜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 글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다양한 기억이 눈앞을 스쳐간다. 그와는 조금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았지만, 나 또한 유년의 시기에 겪었던 감정과 사건들이 말이다. 그렇게 소환된 내 기억들은 작가의 기억과 뒤섞이며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렇다 해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한창 의지해야 할 나이에 누군가를 돌보아야 했던, 그 신산했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될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사랑만 받아야 할 나이에 버겁기 그지 없는 책임을 어깨에 걸머져야 했던, 여리고 어린 아이가 품었을 복잡미묘한 감정을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감히 나는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한다. 직접 읽어 보지 않으면 상상도 공감도 할 수 없는 그녀들의 삶이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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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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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과거에 융성했던 사회들이 지금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도중에 붕괴했을까? 그가 정의하는 ‘붕괴‘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인구 규모, 정치, 사회, 경제 현상의 급격한 감소‘를 일컫는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 국가가 이웃 민족에게 정복당하는 것은 붕괴가 아니라, 그 나라의 지배 민족이 바뀌는 정상적인 흥망성쇠일 뿐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이 책에서 붕괴의 예로 드는 것은 남태평양의 이스터섬, 북미의 아나사지 문명, 마야 제국, 노르웨이령 그린란드 등이다. 저자는 이 사회들이 붕괴하게 된 요인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환경 파괴, 기후 변화, 적대적인 이웃, 우호적인 무역국, 그리고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의 대응이다. 이 중 한 가지만으로 사회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최소 서너 개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붕괴가 발생한다. 하지만 마지막 요인, 그 사회에 닥친 문제에 대해 구성원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이다.

환경 파괴의 가장 극적인 예는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다. 이스터 섬의 11개 부족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경쟁하듯 만들었다. 섬 안쪽 채석장에서 만든 석상을 해안가로 옮기기 위한 목재와 밧줄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나무들이 베어졌다. 900년 경 폴리네시아인들이 이스터 섬에 도착하기 전의 식생을 화분학(花粉學)으로 분석해 보면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진 숲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600년대 즈음엔 벌채로 인해 단 한 종의 나무도 살아남지 못했고 인구의 90퍼센트가 사라지기에 이른다.

미국 남서부에서 아나사지 문명을 발달시켰던 푸에블로족 인디언들의 붕괴를 이끈 결정타는 기후 변화였다. 3년 이상 지속된 가뭄으로 관개시설마저 물이 말라버렸고 영농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적절한 강수량이 보장되어 지하수가 풍부하던 시기에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다. 그러면서 외부의 충격에 취약점을 드러내게 되고 가뭄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적대적인 이웃이 결정적인 붕괴의 원인이 된 예로 마야 문명이 등장한다. 이스터 섬이나 아나사지 문명에 비하면 열악한 환경도 아니었고 광범위한 문자 기록을 남길 정도로 발달한 문명이었는데도, 마야는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문명이 흥성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마야 소왕국 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생산성이 낮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은 까닭에 전시에 식량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없어 하나의 통일된 제국이 탄생하지 못한 게 전쟁이 끝없이 지속된 동인이었다.

우호적인 무역국의 부재 또한 붕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폴리네시아의 핏케언 섬과 헨더슨 섬, 그리고 망가레바 섬은 서로에게 부족한 자원을 활발한 교역을 통해 극복하면서 수 세대를 지속했지만, 결국 가장 규모가 작은 헨더슨 섬의 자원이 고갈되면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망가레바 섬을 제외한 두 섬의 사회는 붕괴에 이르게 된다.

다섯 가지 붕괴의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은 척박한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린란드를 정복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린란드의 환경이 훨씬 가혹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유럽인의, 그리고 기독교도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이누이트족은 지금껏 살아남았지만 바이킹들은 이누이트의 생존 방식을 배우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고집한 삶의 양태는 그린란드의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현대 사회에서 붕괴의 위기에 다다른 곳들 또한 진단한다. 르완다에서의 대량학살, 같은 섬을 나누어 가진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의 차이, 중국과 호주의 위기를 말한다. 특히 르완다 대학살의 원인을 분석한 게 흥미롭다. 표면적으로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인종 갈등이 원인이었으나, 그 배후엔 인구 과잉에 따른 토지 분쟁과 기아가 있었다. 끔찍한 학살의 표적은 대부분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학살은 토지를 재분배하고 인구 과잉을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맬서스의 이론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용 자원을 넘어서는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가 인류를 붕괴로 이끈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인구를 줄이고 자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몇 년 전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한국의 극심한 저출생을 ‘새로운 기회‘라고 극찬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또다른 저서 <제3의 침팬지>에서 인류의 현 세대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이 지구를 구하는 길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 바 있다. 어쩌면 한국은 AI의 도움을 얻어 적절한 인구로도 국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인류의 테스트 베드가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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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 하나의 역사
노먼 데이비스 지음, 왕수민 옮김, 박흥식 감수 / 예경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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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다. 아무리 1,700 페이지 짜리 벽돌 같은 책이라고 해도 몇 달이면 거뜬히 읽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유럽의 역사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럽은, 그 장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알다시피 ‘유럽‘이라는 단어는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의 등을 타고 바다를 건너 크레타로 간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에서 기원했다. 유럽은 그 시작부터 바다를 건너고 이질적인 문화가 섞이는, 끝없이 이동하는 운명을 타고난 문명이었음을 은유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스도 아니고 크레타도 아닌, 선사시대부터의 유럽에서 시작한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에우로페는 애초 호기심을 갖지 말아야 했던 것인지 모른다‘고 했었던 것처럼, 나 또한 이 책의 늪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이 책은 너무나 방대하다. 역사의 지평 그 이전부터 구소련 해체까지 유럽사의 주요 사건들을 쭉 개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철학 사조, 미술, 음악, 문화, 생활사까지 손대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다. 슬슬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서핑해볼까 하면 느닷없이 시가 등장하고 악보가 나온다. 게다가 ‘캡슐‘이라고 해서 저자가 본문의 내용과 맞물리는 주제를 중간중간 서술해둔 게 있다. 이를테면 헬레니즘 문화를 서술하면서 [파피루스]라는 캡슐을 덧붙인다. [파피루스] 캡슐엔 파피루스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파피루스 두루마리만을 연구하는 파피루스학이라는 게 있으며, 고대 그리스 만이 아니라 사해 문서 등의 초기 기독교 문헌에도 파피루스가 쓰여서 성경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캡슐이 301개나 등장하는데, 책 중간에 떡 하니 한 두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니 책을 읽는 흐름이 뚝뚝 끊기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그런데 정작 주요 사건들의 서술은 불친절하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유럽사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들 - 특히 중세~근대 영국, 프랑스 역사 - 이었는데, 이런 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사건의 전모를 알기 위해 구글링을 해야 한다. 책 읽는 도중에 스마트폰을 쥐게 되니 독서가 지속될리 있나. 그래서 하루에 두 세 시간을 투자해도 많아야 4~50 페이지를 읽는데 그친다. 무척이나 딱딱한 번역도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데 한몫한다.

완독하는데 일년 하고도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읽다가 꽤 질리기도 했지만, 기왕 시작한 거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겨우겨우 숙제 마치는 심정으로 끝을 보았다. 살면서 이 정도 분량의 책을 다시는 읽을 일이 없으리라는 데서 위안과 보람을 찾는다. 수 천년에 걸쳐 퇴적된 유럽 역사를 고작 책 한 권으로 통달해 보겠다는 욕심이 무척 어리석었다는 반성도 덧붙여서.

이 책의 말미에서 역사학자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단락을 발견하여 옮겨 본다. 참고로 이 단락이 쓰여진 건 1992년 2월, 냉전이 끝나고 구소련이 해체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아직 EU가 본격적으로 출범하기도 전이었을 때이다.

“많은 것이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미국이 계속 강력한 힘을 갖고 비교적 풍요로운 상태를 유지해간다면, 서유럽의 현상태(status quo)가 급작스레 뒤바뀔 가능성은 낮다. 나토는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EC는 신중한 행보를 보이며 발전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위기 속으로 발을 들인다면, 유럽 국가들은 공동 방어를 목표로 내걸고 의기투합하게 될 것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대서양의 돌풍 역시 유럽 동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못지 않은 위력을 가질 수 있다.”

트럼프 재집권으로부터 기인한 작금의 유럽 안보위기와 그 대응을 30여년 전에 예견한 듯한 문장을 보며 역사 공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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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3부 : 사신의 영생 - 완결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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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멸망의 코앞에서 세계를 구한 건 뤄지의 담대함이었다. 핵억지력이 핵보유국 간의 전쟁을 막아내듯, 전 우주에 지구와 삼체 행성의 존재를 알려 공멸하겠다는 뤄지의 협박이 먹혀든 것이다. 아슬아슬한 평화는 61년 간 지속되었고 인류의 운명은 여전히 뤄지에게 달려 있었지만, 그땐 누구도 몰랐다. 공멸 버튼을 누를지 아닐지 모를 뤄지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이 멸망을 유예하고 있었음을.

3부의 주인공 청신은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너무 늙어버린 뤄지의 뒤를 이어 공멸 버튼을 손에 쥔 ‘검잡이‘가 된 그녀의 결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뤄지는 전 인류와 삼체 문명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인류애의 화신인 청신은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그걸 간파한 삼체 문명은 청신이 검잡이가 되자마자 재빨리 지구를 재침공한다. 압도적인 과학기술의 격차 앞에서 인류는 바람에 눕는 갈대보다 무력했다. 자, 지구 문명은 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기실 3부 중간부터 인류의 적은 더 이상 삼체가 아니다. 우주라는 암흑의 숲, 그 어디에 눈을 부릅뜨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사냥꾼들이 모두 적이었다. 삼체 문명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들의 무력 앞에서 인류는 그저 한 마리 벌레에 불과했다. 크툴루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손짓 한 번에 인류, 아니 태양계 전체가 위기에 처한다.

결국 우주를 구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짝사랑하는 이에게 저 멀리 빛나는 별을 선물하는 사랑, 지구를 구할 단서를 동화로 만들어 들려주는 사랑, 170억년이라는 억겁의 시간을 안배하는 사랑.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 곧 우주를 위한 사랑이었다. 살면서 800페이지 짜리 책을 이토록 순식간에 읽은 적이 있었나 싶다. SF 소설을 뛰어넘는 한 편의 초절(超絶)한 교향곡을 만들어 낸 거장 류츠신의 놀라운 상상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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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2부 : 암흑의 숲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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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400년. 4광년 떨어진 삼체 문명에서 지구를 침공하기 위해 출발한 함대가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 400년 동안 인류는 삼체 함대에 맞서 싸워 이기고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절박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삼체 문명은 우월한 기술력으로 양자 크기의 슈퍼 컴퓨터인 지자(智子)를 만들어 지구에 파견한다. 이 지자는 입자가속기의 관측 결과를 교란하는 등 남은 400년 동안 인류의 과학 기술 발전을 저지하고 지구 전체를 감시·감청하여 이 정보를 양자 얽힘을 이용해 삼체 문명에 실시간으로 전송한다. 인류는 삼체 문명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

인류는 이에 맞서기 위해 4명의 면벽자를 지정한다. 면벽자란, 불교에서 면벽 수련하듯 홀로 자기 만의 세계에서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지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머릿 속으로만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전술과 기만책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미국의 국방장관, 남미의 대통령, 영국의 뇌과학자가 각각 면벽자로 선정된다. 나머지 한 자리는, 1부에서 삼체 문명을 불러들인 장본인인 예원제의 딸의 대학 동기인 뤄지에게 돌아간다. 지극히 평범한, 별 성과도 없는 천문학자인 뤄지가 선발된 이유는 간단했다. 전인류 중 유일하게 삼체 문명이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인물이 바로 뤄지이기 때문이었다. 예원제는 삼체 문명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채고 뤄지와의 짧은 만남에서 삼체에 대항할 수 있는 몇 가지 화두를 남긴다. 이제 뤄지와 나머지 면벽자들은 삼체 함대를 물리칠 각자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과연 인류는 절망의 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류츠신은 1부에서 잔뜩 풀어놓은 매력적인 설정을 확장하여 2부를 이어 나간다. 독자들은 면벽자들이 세운 대담한 계획에 전율하게 된다. 인류는 절멸의 공포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생존과 인류애, 어느 것이 먼저인가? 살아남은 지구 함대 앞에 놓인 트롤리의 딜레마를 처리하는 류츠신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으나 ‘어둠의 숲‘ 이론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여전히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넘쳐나지만 불어난 분량만큼 군더더기가 많이 붙은 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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