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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23 -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조가람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평점 :
클래식 음악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Op."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로 작품이란 "Opus"에서 파생된 단어로 보통 작곡가의 작품 번호를 매길 때 앞에 붙이는 표시이다. 보통 작품이 출간된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는데, 피아니스트인 이 책의 저자는 완전히 설익지도, 완전히 여물지도 않은, 익어가는 자신의 클래식 여정에서 "Op. 23 즈음에 서 있다"는 의미로 책 제목을 "Op. 23"으로 붙인 것이라 말한다. 어쨌든 피아노를 치는 일을 나무 막대기를 두드리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는 저자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피아노 곡 등 다양한 클래식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우선 클래식계의 변종이나 반항아라 불리는 크로아티아 출신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그는 음악이 가져다 준 부와 명예를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곳에 쏟는다면서 재능은 있지만 재정 문제로 학문의 길이 막힌 음악도들을 위해 재단을 설립했는데, 이게 처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발칸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병원 재건을 위한 재단을 세우고 전쟁 부상자를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면서 말이다. 그가 처음 유명세를 탔던 198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언급하고 있다. 정격 연주의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그의 파격적인 해석에 심사위원들이 분열되었다면서, 그가 1차 예선을 통과하자 분개한 한 심사위원은 사퇴했고, 다른 심사위원은 낙제점을 주었으며, 또 다른 심사위원은 그를 천재라고 칭하면서 이런 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심사위원단의 일원임을 부끄러워 해 사퇴해 버렸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2015년 베를린에서 저자가 직접 이보 포고렐리치의 실황 연주를 보았다는데, 평균 연주 시간이 30분인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한 시간에 육박하는 템포로 연주했다고 한다. 리스트가 이 곡을 작곡했을 시절에는 제트기도, 인터넷도 없던 때라 그 당시의 시간은 이 시대보다 훨씬 느렸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천재라 불렸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1950년 라스트 콘서트 앨범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있다. 모르핀 주사를 맞아가며 자신의 인생 마지막 무대라는 부담속에서도 온전한 연주가 그 앨범 속에 담겨 있다면서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1986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61년만에 고국인 소련에서 개최한 연주회를 언급하며, 그의 말년의 이 독주회 프로그램은 인생에 대한 위로처럼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고 말한다. 쇼팽의 제자인 에밀 데콩브의 제자였던 알프레드 코르토의 연주도 같이 언급된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쇼팽 음악 연주법이 아닌 예술 그 자체라면서, 요즘 핸드폰보다도 떨어지는 녹음 기술로 남아 있는 코르토의 연주 음반을 극찬하고 있다. 내놓는 앨범마다 찬사를 받는 폴란드 출생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에 대한 평가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특정 작곡가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머릿속에서 그리는 바로 그 소리를 구현해내기를 바랄 뿐이라면서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그의 연주를 직접 본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 좋은 연주였지만 그의 실황 연주가 레코딩과는 확연히 다른 성질의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평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여기서 지메르만과 호로비츠를 비교하면서 레코딩과 실황 연주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음악의 본질적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나는 순간을 사는 예술로서의 음악,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지나가면 사라지는 비가시적인 예술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음악을 조형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 시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완벽한 형태로서의 음악으로 보는 것이다. 지메르만은 조율학, 음향학, 홀 구조학, 악기 구조학, 컴퓨터 과학, 레코딩 시스템까지 연구하면서 주로 레코딩에 심혈을 기울인다면서 말이다. 그 밖에도 부니아 티쉬빌리는 아름다운 외모 외에도 호로비츠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파워와 즉흥성이 가미된 비정형적 해석을 통해 두려움 없는 도발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경우 웅크리고 있던 영혼이 고개를 들고 이내 소망이나 열망, 이성, 예술, 노력, 의미, 가치, 진정성과 같은 단어를 주섬주섬 가슴 속에 주워 모르기 시작하면서 도인 같은 순결한 음악적 여정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그의 연주를 얼핏 보면 마치 손으로 건반을 내려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들어올림에 가까운 동작이라면서, 실은 건반을 누르기 바로 직전 각 건반의 문맥적 상황 속 성격에 따라 타건 속도와 세기 및 종류를 조절한다고 말한다.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언급에 이어 피아노 곡 자체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세상에서 가장 슬픔 음악으로 바흐의 Partita No 2를 언급하고 있다. 이 곡은 바흐가 아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단 하나의 선율로 슬픔을 그려 나갔다고 말한다.
바흐가 누구보다 정통하고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대위법을 여기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가장 약할 때 자신이 지닌 가장 강한 지성의 힘을 뒤로하고 그저 신 앞에 쓰러져 기도하며 읍소하며 토해낸 감정의 기록이라 말한다. 마지막 악장인 샤콘느가 가장 유명한데, 이 사콘느는 시대를 이어가며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변주되었다고 한다. 약 150년 후 브람스는 자신의 4번 교향곡 4악장에서 8마디의 주제를 32번 반복하며 바흐의 샤콘느를 오마주 했다면서, 이 위대한 작품을 자신이 사랑하는 클라라 슈만을 위해 편곡했다고 한다. 그 당시 클라라 슈만이 손을 다쳤기에, 브람스는 클라라를 위해 왼손을 위한 샤콘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흐 사후 100년 뒤에 태어난 이탈리아 작곡가 페루초 부소니는 바흐의 많은 곡을 편곡했는데, 바흐의 샤콘느를 멜로디와 곡 전체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되, 위아래로 화성과 꾸밈음들을 매우 두텁고 다채롭게 쌓아 올리고 내렸다고 한다. 한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소나타"는 베토벤의 절친한 친구이자 음악적 후원자인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것인데, 저자는 고별 소나타를 연주할 때마다 교향곡의 총보를 피아노 소나타로 편곡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오로지 피아노적 기법만으로는 이 곡을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서, 이 곡이 작곡된 지 약 2년 후에 탄생한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비교하면 종과 횡으로 확장된 형태로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라 언급한다. 또한 로베르트 슈만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클라라 슈만이 처녀일 때 그녀의 아버지를 피해 비밀 서신을 주고받던 로베르트 슈만은 자신의 음악 속에 암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C-B-A-A로 순차적으로 하행하는 단순한 모티브는 슈만이 클라라의 이름을 부를 때 사용되곤 했다면서 말이다. 1836년 공동 작품을 계획하며 설레어 하던 갓 비밀 약혼식을 올린 젊은 연인은 이 테마로 "그랜드 소나타"를 작곡했다면서, 이 작품은 슈만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클라라 비크가 테마를 만들고, 로베르트 슈만은 그 테마로 변주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프란츠 리스트의 녹턴 A 플랫 마이너 "사랑의 꿈"을 언급하며, 리스트의 수많은 명작이 러시아 출신의 문인, 공작부인, 유부녀였던 캐롤린 비트켄슈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리스트는 바그너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정신적 동반자였는데, 그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장면, "사랑의 죽음"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하는 과정도 언급하고 있다. 바그너의 이졸데를 위한 노래이면서도 동시에 리스트 자신의 사랑을 위한 기도이자 헌사였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또한 리스트는 "리스트 소나타"를 통해 자신만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면서, 파우스트가 채워지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죄책감, 그리고 구원과 참된 깨달음을 향한 갈망 속에서 방황하듯, 리스트 또한 자신의 삶에서 그와 같은 여정을 지나왔다고 평한다. 한편 폴란드 음악계에 쇼팽이 있었다면 문학계에는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있었다면서, 그는 쇼팽과 마찬가지로 1830년대 조국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으며, 폴란드 민족의 혼을 담은 강렬한 문학 작품들을 남긴 조국의 투사였고, 쇼팽의 네 개의 발라드는 그의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라 말한다.
생상스는 작곡가이면서 타고난 피아니스트였는데, 한스 폰 뷜로와 바그너가 생상스의 연주를 바로 옆에서 보고는 현존하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생상스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생상스가 유려한 테크닉과 창의성과 즉흥성을 지니고 있었다면서 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경우 작품이 너무 난해하고 장황하다는 평이 많아 큰 자책감에 빠졌고, 정신과 의사와 심리치료를 통해 차차 회복하면서 써낸 곡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 한다. 이 곡은 당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경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깊은 음악이란 평을 듣게 되는데, 낭만 음악 중 유례없는 복잡성을 내밀하게 가진 곡이라 언급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사는 세상,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직전 폭풍전야의 불안정한 세상을 만화경처럼 음악에 담아내고 싶었다면서, 그는 오랜 고뇌 끝에 낭만성과 대중성을 큰 맥으로 잡고, 그 이래 흐르고 있는 복잡다단한 당대의 러시아 인간사가 섬세하게 얽힌 모습을 그려냈다고 평한다.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미친 난도에 정신 나간 화성 전개라 불리는 곡인데, 혈기 왕성한 청년 프로코피예프가 리스트의 악마적 기교를 계승하며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자 작곡한 곡이라 한다. 그러나 기교적 난도가 너무 높아 심지어 프로코피예프 본인조차 초연에서 연주를 망쳤던 곡이며, 초연 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지 10년 뒤 러시아 내전 중 원본이 화재로 소실되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작곡했다고 한다.
피아노 독주로 편곡된 교향곡들도 소개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라벨의 라 발스를 들고 있으며, 카미유 생상스의 손에서 교향시로 탄생하여 프란츠 리스트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손을 거쳐 피아노 독주곡으로 거듭난 죽음의 무도도 언급하고 있다. 그 밖에도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2악장을 보면 첫 박을 약박으로 만들고, 64분음표까지 쪼개어 의도적으로 정박을 피해가는 등 파격적인 리듬 배치를 시도했다면서 그의 재즈 소울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클로드 드뷔시의 경우 거리의 집시 연주자들에게서 멜로디를 채집하고, 사람들이 일하며 흥얼거리는 대중 음악의 리듬을 더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면서 유럽 음악사에 쌓인 화성 체계를 옥죄던 고리를 풀어준 장본인이라 말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연주와 음악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연주자는 당연히 무대를 준비할 때 온 힘을 다해 실수 없는 연주를 위해 노력하지만, 실수 없는 연주는 다른 요소들을 포기하면 꽤나 용이하게 닿을 수 있는 목표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술이란 본디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넘보는 것이며, 실수를 감수했기 때문에 표현되고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을 봐야 한다고 언급한다. 무대에서의 피아노 연주는 얼마나 음악과 상호작용하며 의식적인 관계를 맺어왔는가에 달렸다면서 음악가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재능이 있다면 바로 음악을 진지하게 대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