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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재영 책수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평점 :

제목: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지은이: 재영 책수선
펴낸 곳: 위즈덤하우스
고이 보내준 나의 첫사랑, 《별자리 이야기》!
책을 사랑할 운명을 타고나면, 가슴 아픈 이별 역시 예견된 일임을 알아야 한다. 국민학교(그래, 그땐 국민학교였다!) 3학년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신세계를 처음 접하게 해준 <별자리 이야기> 시리즈는 각 3천 원씩 총 3권이었다. 9천 원에 시리즈를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그 시절. 물론,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1,400원이었던 걸 고려하면 그리 적은 비용은 아니었다. 용돈 9천 원을 털어 집으로 데려온 그 책을 거짓말 좀 보태서 백 번 넘게 읽었다. 바닥에 엎드려 과자를 먹으며 읽고, 읽다가 책에 침 흘리며 잠들기도 하고, 놀러 온 친구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며 영업 아닌 영업을 펼치곤 했던 그 시절. 늘 곁에 끼고 아끼며 좋아한 만큼 책은 점점 망가졌다. 겉표지가 너덜너덜. 종이는 노랗다 못해 갈색으로 변하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쿰쿰한 냄새와 때론 책벌레까지 등장했다. 격하게 좋아했던 책이기에 이고 지고 살다가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 책과 안녕을 고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그 책과의 추억.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대차게 맞이한 이별이기에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시큰하다. 만약 그때 '책 수선'이란 마술 같은 손길로 책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면 난 여전히 그 책과 도란도란 옛 추억을 속삭이고 있지 않을까?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너무나 인상 깊은 이 책의 프롤로그!
책 수선가는 망가진 책을 수선한다.
나는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책 수선가는 기술자다. 그러면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수집기다.
나는 책이 가진 시간의 흔적을, 추억의 농도를, 파손의 형태를 꼼꼼히 관찰하고 그 모습들을 모은다.
책을 수선한다는 그 책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모습들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프롤로그 중에서...
운명이 찾아왔을 때, 그게 필연적 만남이자 앞으로 내 인생을 뒤바꿀 전환점이란 걸 알아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재영 책수선'의 주인장도 책 수선 기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자신을 이 길로 이끌지 전혀 몰랐다. 2014년 미국 대학원에서 '북아트'와 '제지' 분야를 택한 주인장은 지도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책 수선가로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당시 다니던 학교의 건물 지하 한 층을 전부 차지한 '책 보존 연구실'. 주인장은 속성으로 필수 기술만 쏙쏙 배우고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실에 취직했지만, 그 다짐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열과 성을 다해 3년 6개월간 배우며 일한다. 그렇게 책 수선가로서의 주인장의 삶이 시작되었다.

망가진 책에 담긴 당신의 추억을 되살려드립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어렵사리 책을 수선하는 고객들은 어떤 분들일까? 참으로 다양한 사연이 가득하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의뢰한 책을 정말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 어렸을 적, 부족한 놀 거리를 대신해 친구가 되어 주었던 <'89 시행 개정 한글 맞춤법 수록 국어대사전 상/하>, 작은 낙서 하나까지도 지우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이 담긴 <유리 구두>, 귀한 인연이었던 목사님께 선물 받은 성경책을 이젠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수선을 의뢰한 고객, 엄마와의 행복한 추억이 담긴 컷 도안집, 홍콩 헌책방에서 품에 안은 스코틀랜드 요리책, 잡지 표지의 미세한 찢어짐이 안쓰러워 한달음에 달려온 레고 마니아, 7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할머니의 일기장 등등... 울고 웃는 그 가슴 찡한 사연들을 이 책을 통해 꼭 만나보시길!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과 수선 후의 반응을 보며 책 수선은 책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소중한 추억을 오롯이 지켜주는 뜻깊은 작업임을 실감한다. 무너져가는 책의 시간을 멈추고 그 시간을 연장하는 일. 한 번 멋지게 살다 떠나는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반려 책'을 소생시키는 주인장은 명의 중의 명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더없이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물씬 피어오른다.

여러분은 수선하고 싶은 책이 있나요?
책 수선이란 작업을 모른 채, 허망하게 <별자리 이야기>를 떠나보낸 내게... 아직 정리하지 못한 묵직한 책들이 있다. 하이텔 시절 역사의 큰 획을 그은 판타지 소설 <퇴마록>. 이모부가 재밌게 읽으셨던 책을 물려받아 아껴가며 읽었고, 자주 손때를 묻힌 탓에 책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시리즈는 엘릭시르 출판사에서 2011년에 양장 개정판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애서가이자 장서가인 나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그 양장 개정판을 새로 들였다. 하지만, 오리지널 퇴마록을 정리할 순 없었다. 책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모부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에 너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퇴마록>을 보고 있자면, 이모부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던 학창 시절의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아무리 낡고 빛이 바랬을지언정, 그 추억은 아련하게 더 깊고 깊어지기에, 앞으로도 이 책들을 정리할 순 없을 거다. 어쩌면 나도... 이 묵직한 책들을 들고 재영 책수선의 문을 두드릴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이모부를 그리워하면서...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