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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안녕, 경애 씨와 상수 씨.
잘 지내고 있나요? 실은 말이죠, <경애의 마음>을 처음 펼쳤을 때 왜 그렇게 집중이 안 되고 마음이 뜨는지 조금씩 끊어 읽다가 덮어버렸어요. 그렇게 책을 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었네요. 두 번째 역시 마음이 도통 잡히지 않아서 상수 씨 집안 얘기도 두 사람 직장인 '반도미싱' 얘기도 그냥 물 흐르듯 흘려보내며 책장만 계속 넘겼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졸졸 흘러가던 그 이야기가 어느새 내 무릎까지 차올라 나를 흠뻑 적시고 있더군요. 그렇게 난 두 사람 인생에 첨벙 빠져들었습니다. 은근슬쩍 다가와 가공할 흡입력으로 내 마음을 뺏어가다니 두 사람 정말 대단해요. 아니, 김금희 작가님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려나?
분명 이건 소설이고 허구란 걸 잘 알지만, 내 삶 어딘가에 경애 씨와 상수 씨가 한 번쯤은 작은 점이라고 남겼을 것 같아 도무지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 믿어지지 않네요. 창고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던 경애 씨, 키보드 앞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을 상수 씨, 정말 가보고 싶은 나라 베트남, 그렇게 맛있다는 짭조름한 반미, ♬ 미싱을 잘도 도네, 돌아가네 ♬라는 노래, 옥수수, 1인 시위자, 영업사원 등등,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가 이젠 너무 많아져서 앞으로도 오랜 시간 난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기억과 추억은 이리 선명한데 두 사람이 내 곁에 없으니 말입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띄어 쓴 자리, 행간, 여백... 검은 글자가 미처 차지하지 못한 공간마다 가득했던 경애 씨와 상수 씨의 모든 추억 그리고 아픔이 날이 무뎌진 면도날처럼 내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날이 무뎌졌어도 면도날은 아픈 것처럼 두 사람의 상처도 완전히 사라질 순 없겠죠.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 연인의 배신, 시들해진 사랑, 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진 이 세상 무엇하나 우리 편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상수 씨 말처럼 아무리 상처받았다 해도 마음까지 폐기하진 않아도 되니까요. 인생에서 즐거울 것 하나 없이 지치고 지쳤을 두 사람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으로 남아 알 수 없는 위로와 안정감을 주니 참 혼란스럽네요. 경애 씨와 상수 씨의 인생을 좇으며 이미 스쳐 지나간 내 인생의 여러 조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마음까진 폐기하지 않을게요.
<경애의 마음>은 제법 길었어요. 놀리는 곳 없이 페이지마다 검은 글자로 가득했는데 354페이지라니, 정말 장편소설이더라고요. 제법 담담하게 잘 읽고 있다며 스스로 대견했는데, 마지막 장에서 눈물이 불쑥 떨어지더니 이내 주르륵 흘러 책장 위에 얼룩을 여럿 남겼습니다. 오랜 시간을 지나 경애 씨와 상수 씨가 다시 한 공간에서 마주했다는 사실에 그냥 너무 기쁘고 속이 후련했어요. 경애하는 경애 씨와 상숫값 상수 씨, 이젠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요. 그 행복한 삶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길 바랍니다.
추신
김금희 작가님께 이 말 좀 전해주세요. 354페이지에 쓴 작가의 말은 반칙이라고 말입니다.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해 썼다." 이렇게 긴 작품을 완성하고 달랑 두 줄이라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 짧은 두 줄에서 그간의 노고와 작품을 마친 안도감과 후련함이 느껴져 코끝이 찡했네요. 두 줄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다니 이건 정말 반칙이라고 전해주세요. 경애 씨와 상수 씨를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꼭 전해주고요. 그럼 이제 정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