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번역의 정석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번역'이란 참으로 매력 넘치고 가슴 뛰는 작업이다. 번역은 원서를 읽고 그저 혼자 이해하는 것과 천지 차이지만, 직접 해보지 않은 이들은 그 차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리고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 등, 그 세계에 존재하는 엄연한 법칙과 약속도 모르면서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번역을 헐뜯고 비난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혹은 그 반대로 오역이라는 타당한 근거와 의견을 제시해도 번역 세계가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의리' 혹은 '인맥'이란 견고한 벽에 부딪혀 물거품처럼 묵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 측면에서 보면 '오역'이라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긴 사실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정말 실수였고 잘못된 번역이라면 겸허하게 인정하고 최대한 빨리 수정하는 게 좋다고 본다. 물론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어려운 일일지 알지만, 오역이라 숱하게 지적당하고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눈 딱 감고
인정하면 그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지나가기도 한다. 이제 최대한 덜 틀리도록 노력하면 일상은 또 그대로 흘러가니까.
'번역'과 '오역' 그리고 '오역에 대한 번역가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말이 길어졌는데, 아무래도 <번역의 정석>을 읽고 현직 영상 번역가인 내가 생각이 많아졌던 모양이다.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은 상당히 달라서 요구되는 기술에 큰 차이가 있지만, 일단 양쪽 모두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번역의 정석>을 집필한 이정서 작가가 지적한 부분은 번역가 임의의 의역인데, 그것은 의역이라기보다는 오역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경험을 토대로 직접 번역한 <이방인>, <노인과 바다>, <위대한 개츠비>, <어린 왕자>의 오역 사례를 요목조목 집어 원문이 본래 의미했던 바를 직역으로 다시 번역해준다. 여기서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 책에서 말하는 '직역'과 '의역'은 우리가 학창시절 귀에 박히도록 들은 "직역하면 문장이 매끄럽지 않으니, 의역해라!"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개념이라는 거다. 이정서 작가는 '의역'이라는 이름 아래 번역가가 원문을 파괴하고 마음대로 지어낸 문장을 문제라 꼬집으며 반드시 '직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직역'이란 쉼표나 마침표 하나, 전치사 혹은 접속사에도 작가의 의도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 그 뜻을 제대로 살려 번역하라는 뜻이다.
불어를 모르는 탓에 <어린 왕자>와 <이방인>의 오역 사례는 생각해볼 여지도 없었지만, 영문 소설인 <노인과 바다>와 <위대한 개츠비>의 오역 사례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는 제일 잘 팔린 그리고 최고라 추대되는 번역본과 원문을 비교하며 어느 부분이 오역인지 집어내고 제대로 된 번역을 제시한다. 영문을 한 줄씩 노트에 써서 직접 번역하고 작가가 제시한 여러 번역과 비교해보면 어쩌다 그런 오역이 나왔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학의 전체 흐름을 알아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많지만 <번역의 정석>을 읽는 독자라면 등장하는 문장을 꼭 직접 번역해볼 것을 권한다.

'번역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정서 작가는 '번역에는 엄연히 정답이 존재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 부분은 나 역시 동감한다. 번역에 답이 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 문장이 오역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원문의 뜻을 해치지 않는 상황에서 번역가의 문장력으로 다양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번역의 정석>을 읽으며 작가가 보여준 소름 끼칠 정도의 꼼꼼함과 치밀함 그리고 올바른 문장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 덕분에 '번역'이라는 작업과 '번역가의 역할, 책임 그리고 자세'에 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본 시간이었다. 작가는 출판사 대표를 겸하고 있는 탓에, 책을 팔아먹으려는 심보로 노이즈 마케팅을 벌인다는 오해와 근거 없는 번역이라는 숱한 공격은 물론 비난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가만히 지켜보자니 참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용기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 건 죄가 아니건만 어찌 이런 후폭풍을 감당해야 하는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더라. 번역가들 사이에 떠도는 '번역가는 잘하면 본전이고 틀리면 죽을죄'라는 웃픈 이야기를 떠올리며 씁쓸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 덧붙이는 글 ★
이정서 작가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와 <이방인>을 읽어볼 생각이다.
15년 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대체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사랑받는지 이해할 수 없어 허탈했는데, 과연 그게 오역 혹은 지나친 의역 때문이었는지 다시 확인해보고 싶고, <이방인>은 아직 읽지 못한 고전이라 흥미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