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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제목: 나의 아름다운
이웃
지은이:
박완서
펴낸 곳:
작가정신
굉장히 뜻깊은 책을 만났다. 2011년 타계한 박완서 작가의 짧은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과 그녀를 기리는
후배작가 29인의 콩트 오마주, 『멜랑콜리 해피엔딩』. 봄날 벚꽃이나 딸기우유를 떠올리게 하는 예쁜 표지를 쓰다듬으며 얼마나 멋진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심장이 콩닥콩닥. 두 권 중 어떤 책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가 역시 박완서 작가님 책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결정! 그렇게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대 우리 부모님의 삶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1981년에 출간됐다가 절판된 『이만 가는 맷돌』이란 콩트집을 출판사 작가정신이 되살린 책이다(이 책은 그 개정판의 개정판!). 어쩌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유물이 될뻔한 이 보석 같은 짧은 이야기들을 다시 그러모아 멋진 한 권의 책으로 독자에게 선사한 작가정신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이야기 한 꼭지마다 자그마한 선물을 뜯어보는 심정으로 읽었다. 어떤 선물이 나올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첫 줄은 어찌나 설레고
두근거리던지! 그렇게 만난 48편의 이야기에는 내 부모님 세대가 살았던 1970년대의 아련한 추억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의 청춘은
어땠을까? 7080 가요가 다시 유행하고 복고풍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궁금했다.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늘 단편적으로만 만났던 그 시절 이야기를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작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하는 콜라주처럼 전반적이면서도 세밀하게 파고든다. 비혼이란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 마치 인생의 종착지라도 되는 양 '결혼'에 매달리는 사람들, 장발, 바바리,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던
일하는 여성, 귀했던 아파트,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신도시 땅값, 사교육 열풍, 남녀 불평등에 분노하면서도 여권 운동자로 찍힐까 두려워 참는
여성들, 시대를 막론하고 한탄할 거리가 넘쳐나는 고부 관계, 여성의 사회 진출로 가장의 위신이 떨어졌다고 툴툴거리는 아빠들. 우리도 선진국처럼
잘살아 보자는 의지가 꿈틀대던 격동의 1970년대. 갑자기 몰아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고 웃으며 넘긴 그 과도기를 훈훈하면서도 헛헛한
사연으로 재미나게 풀어낸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 콩트는 우리 증조할머니, 할머니, 부모님, 삼촌, 이모, 이웃사촌, 먼 친척 등 묻고
물어 알고 보면 어떻게든 연결된 것만 같은 남이 아닌 너와 나,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흥미롭다.
짧은 소설 모음이지만 연작 형식으로 같은 주인공 이야기가 3, 4편씩 이어지기도 하고 할머니, 며느리, 손녀 3대에
걸친 각자의 사연이 펼쳐지기도 하니 어찌나 재밌고 다음 편이 기다려지던지. 읽을거리, 놀 거리가 부족했던 그 시절, 이 콩트를 눈 빠지게
기다렸을 독자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 엄마 아빠는 이렇게 살았겠구나, 할머니는 이랬겠구나'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푹 빠져 한참 헤매니 겪어본 적 없는 그 시절이 마치 내 어린 시절을 그리는 듯 푸근하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모자라면 모자란 데로 좋았던 그 시절. 고향 집에 돌아가 따끈한 아랫목에 누워 뒹굴듯 편안하고 아늑한 특유의 분위기에
젖어 들어 책을 덮은 후에도 머릿속을 되짚으며 한참을 아련하게 서성였다. 우리나라가 걸어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온전히 담아낸 박완서 작가의 짧은
소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한 움큼 쥐여주던 왕사탕처럼 달콤하고 보석인 듯 반짝반짝 영롱했던 이야기. 정말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새로운 글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애석하지만, 아직 못다 읽은 작품이 많기에 다른 책으로 또 그 시절을 추억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