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없는 소녀
황희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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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일이 없는 소녀

글쓴이: 황희

펴낸 곳: 네오픽션 / 자음과 모음


 태양이 마지막 기지개를 켜며 토해낸 노을에 세상이 붉게 물든 순간,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바라본다. 선이 곱고 가는 소년은 창백하여 곧 쓰러질 듯 위태롭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틴다. 눈앞엔 소녀가 있으니까. 애처로울 정도로 작고 가냘픈 소녀의 뒷모습에 애잔하게 깔린 깊은 슬픔. 도대체 너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태양이 몸져누워 하늘이 며칠째 슬피 울던 어느 날, 내 인생에 예고 없이 뛰어든 지석과 도이. 몇 시간을 함께했을 뿐인데 이 아이들의 인생 모든 순간을 함께한 기분이다. 선택의 순간 둘로 나뉘는 인생. 매 순간 내리는 선택에 따라 우리의 삶은 그 옛날 인생극장이란 프로그램처럼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 평행세계에 또 다른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렇게 난 여러 도이와 지석이를 만났다.


 꽃 같은 열여덟, 도이는 수 없는 자살 시도와 자해를 거듭하며 그만 인생을 끝내고 싶다. '그때 그 길로 가지만 않았다면...' 수천 번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그 선택 때문에 도이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간다. 형사인 아빠와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는 어떻게든 도이를 위해 버텨내지만, 이들도 힘들긴 마찬가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는 도이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지석이란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면도날로 팔을 긋고 피를 흘리며 숨통을 트는 아이들. 10대의 흔한 일탈을 넘어선 듯한 도이와 지석의 행보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하나씩 드러나는 사연에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눈물을 삼켰다. 험한 일을 당한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도이는 원하는 장소에 가면 그곳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기억, 즉 잔류사념을 읽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타투이스트인 석윤과 그를 찾아와 인생을 돌려내라는 수혁의 등장 그리고 지석의 도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도이는 모두가 처한 이 불행한 현실을 되돌리고자 한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순간들은 과정은 다르지만 똑같은 결과를 내기 일쑤고 혹은 내가 당했을 일을 다른 사람이 당하게 되는 슬픈 참극을 일으킨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없는 상황. 도이는 자신이 변화시킨 평행세계를 가로지르며 '악'의 근원을 찾아 처단하려 안간힘을 쓰는데, 과연 도이와 지석 그리고 석윤은 잃어버린 소중한 인생을 되찾을 수 있을까?


 책을 덮고 상당히 심란했다. 이해가 되면서도 복잡한 어지러운 기분. '잔류사념', '평행세계', '생각으로 전달되는 환청', '평행의식' 등 어려운 용어를 알려주며 시작한 이 소설은 잠시만 긴장을 늦춰도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한없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도이와 지석의 인생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난 그저 '제발, 제발...'이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우울한 그들의 일상에 한 줄기 빛처럼 찾아온 기회(도이의 능력)로 마침내 삶이 바뀌기 시작한 순간, 긴박함 넘치는 이야기 전개에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도이를 따라 다른 평행세계로 이동한 나는 어느새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도이야, 지석아, 석윤아, 수혁아. 조금만 더 기운 내!'라고 한없이 속삭이며 말이다.


 언젠가 큰 사고를 당한 후, 며칠 만에 정신을 차렸다는 황희 작가는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냥 죽은 것 같았던 자신이 지금도 살아가는 이 삶은 무엇이며 자신은 누구일까 궁금했다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평행세계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은 많겠지만 그 자그마한 의문을 확장하여 이렇게 멋진 소설로 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에 또 감탄! 읽으면 읽을수록 헤어나올 수 없어 결국 다 읽은 후에서 책을 놓을 수 있었다. 가공할 흡인력으로 독자를 쏙 빨아들이는 이 소설은 우정, 사랑, 가족, 정의 그리고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인지상정까지 우리의 오만 감정을 건드리며 사회의 부조리와 흉악범죄를 아우른다. 어제 읽은 소설의 여운에 지금까지 손끝이 저릿하다니... 어쩌면 황희 작가는 천재가 아닐까? 그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 어렵게 도달한 평행세계에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고 있을 도이, 지석, 석윤이의 행복을 꿈꾸며 그 세상에 있을 또 다른 나를 떠올려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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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프랑스
경선 지음 / 문학테라피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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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데일리 프랑스

지은이: 경선

펴낸 곳: 문학테라피


 프랑스란 나라를 떠올려보자. 에펠탑, 갓 구운 바게트와 크루아상, 루브르 박물관, 샹송... 프랑스란 나라에 대해 잘 몰라서인지 생각보다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다. 어쨌든 프랑스란 나라는 콧대 높고 도도한 백인들이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며 낭만을 즐기는 곳일 것만 같은데, 과연 이방인이 현지에서 직접 부딪치는 프랑스는 어떨까? 어쩌면 그 해답을 이 책에서 얻은 것 같다.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는 뿌듯함이 담겨 있는 이 책. 하지만 『데일리 프랑스』의 진가는 솔직함이다! 동양 여성으로서 당한 온갖 차별과 황당한 일, 말이 통하지 않아 의기소침한 일상, 프랑스 남자와의 연애,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그리고 공허함과 쓸쓸함 등등. 타국에서 홀로 외롭게 공부하며 느끼는 오만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작가의 일상을 통해 아주 오래전 나를 떠올렸다. 결국 프랑스라고 다를 건 없구나. 우리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양 여자!


 기분 나쁘면 욕하고 외로우면 펑펑 울고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들 것 같은 이야기를 숨김없이 늘어놓는 작가를 보며 '진짜 유학 생활이란 바로 이런 거지' 싶었다. 특히 인종차별이나 동양 여자라는 이유로 마구 집적거리는 인간들 얘기에 분노! 기숙사에서 나한테 '옐로우 멍키'라고 했던 새까만 놈이 생각나 울컥했다. 너희한테 피해 주는 것도 없는데 왜 자꾸 괴롭히냐, 이것들아! 정말 그 기분 나쁜 설움은 당해본 사람만 안다.


 표지에 실린 그림을 보며 '눈이 없네?'라고 생각했는데, 경선 작가는 인물 그림에 눈을 그리지 않나 보다. 눈이 없으니 감정 표현이 제대로 될까 걱정했는데, 웬걸! 코와 입 그리고 행동 혹은 얼굴에 흘리는 땀방울만으로도 모든 상황과 그 순간의 감정이 오롯이 느껴져서 나중엔 오히려 편했다. 편안한 그림과 함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할까? 치즈와 와인, 맥주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고 창문을 수리해주러 왔다가 집적댄 놈 이야기에 분노하고 외국인 친구와의 우정에 미소 짓고 춥고 외로워서 우는 작가의 모습에 눈물지으며 오래 전 내 유학 생활을 떠올렸던 시간. 예상과 달리 온갖 인종이 모인 다민족 국가이자 별별 괴상한 인간이 많았던 경선 작가의 프랑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도 많았지만!) 작가의 솔직함이 유난히 반짝인 『데일리 프랑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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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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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셰익스피어

글쓴이: 황광수

펴낸 곳: 아르테


 소장 가치 100%! 아르테 출판사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일명 클클! 책 좀 읽는다는 책벌레들 사이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며 소장 욕구를 불태우게 하는 이 엄청난 시리즈의 첫 권을 만났다. <셰익스피어>, <니체>, <클림트> 이렇게 첫 3권이 출간된 이후로 <페소아>, <푸치니>, <헤밍웨이>, <모차르트>, <뭉크> 그리고 곧 출간될 <가와바타 야스나리>까지 총 100권을 향한 클래식 클라우드의 무한 질주는 앞으로도 쭉 계속될 예정! 부디 바라건대, 그 100권의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내 책장에 고이 모시고 싶다. 각 권마다 오롯이 한 거장의 이야기만을 담기에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아고 될 시리즈지만 다른 책을 먼저 읽고 역주행으로 만나게 된 클래식 클라우드 1번, 『셰익스피어』는 기대감과 묘한 설렘으로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내 사랑, 클래식 클라우드. 그 첫 번째 거장 셰익스피어를 만나보자.

 

 

 

 떠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주목받고 회자하여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작가, 셰익스피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를 두고 갖가지 추정과 가설이 난무한다고 들었는데, 글쎄 과연 어떤 게 진실일까? 초등학생 시절 엄마가 선물해주신 어린이 문고판 4대 비극과 5대 희극을 통해 처음 만났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당시엔 충격 그 자체였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격정적인 사랑과 우울한 햄릿의 삶도 버거웠지만 '희곡'이라는 이름으로 사극 혹은 연극처럼 이어지는 전개가 상당히 낯설고 어색했던 모양이다. 한데, 두고두고 사랑받는 사골 작가의 위력이었을까? 세월에 흐름에 따라 조금씩 성숙해진 나는 이젠 그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명 같은 끌림으로 2014년 셰익스피어 기행에 나섰다는 황광수 작가님을 따라 차근차근 알아가는 셰익스피어의 흔적은 벅찬 감동과 상당한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 정말 잘 읽었다!

 

 스트랫퍼드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가. 온 거리에 넘쳐나는 셰익스피어의 흔적과 그를 향한 사람들의 애정에 엄청난 인기를 실감! 나란히 서 있는 이층집 2개를 사들여 붙였다는 셰익스피어의 생가는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에 반해 셰익스피어의 아내인 앤 해서웨이의 생가는 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의 집처럼 아기자기하다.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어쩌면 불행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떠올려본다.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런던 브릿지,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파리 14구에 자리한 몽파르나스 묘역, 크론보르 성, 바이마르의 괴테 하우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등등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을 따라 거침없이 누비는 여정은 매 순간이 뜻깊고 아름다워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클래식 클라우드 『셰익스피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운 이 책을 덮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읽었기에 어찌나 아쉽던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나하나 새로운 마음으로 만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어보리라! 지금 느낀 감동보다 몇 곱절은 큰 감동이 밀려올 거란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곧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 책 『셰익스피어』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둘 예정! 우리 어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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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9-04-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참 좋아합니다. 의미있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셰익스피어와 황광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몇 권 읽었는데, 소장가치 100%, 공감합니다.
 
일상 속의 동화
최현진 지음 / 쉼(도서출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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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상 속의 동화

글 & 그림: 최현진

펴낸 곳: 쉼

 

 대체 이런 그림은 어떻게 그리는 걸까? 가슴 뭉클하게 아름다운 일러스트 책을 만났다. 그라폴리오에서 '째찌'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최현진 작가가 출간한 『일상 속의 동화』. 보고 있으면 문득 솟아오르는 아련함에 가슴이 한없이 따스해지고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빠져들다 이내 눈물이 핑 돈다. 이런 감성이라면 여자 작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최현진 작가는 남자다! 잘 그린 일본 만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다분히 한국적인 감성이 살아 숨 쉬는 그림들. 인생에서 한 번쯤 겪을 법한 아름다운 순간을 모아 상상이 아닌 눈앞에 펼쳐준 작가는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감성 마법사다. 해리포터의 마법 지팡이가 있어야 뚝딱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그림을 손으로 쓱싹 그려내다니... 이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분 좋은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마냥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그림 출처: 째찌님 그라폴리오 (https://www.grafolio.com/jjaejji)

 

 

 

  흩날리는 벚꽃 아래서 오롯이 느낀 분홍빛 봄, 후드득 내리는 소나기에 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너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한 여름. 알록달록 물든 단풍 위로 쏟아지는 금빛 햇살에 그대로 멈춰있고만 싶은 가을, 새하얀 북극곰에 올라타 눈부시게 빛나는 흰 눈 위를 사박사박 걷는 겨울. 겨울에 마신 따끈한 커피, 은은한 달이 빛나던 밤, 머리를 자른 날, 피곤해서 기절한 순간... 순식간에 사라질 그 아름답고 소중한 장면이 화폭에 담겨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다. 문득 서글프고 힘든 날, 유난히 울적한 날, 두근두근 설레는 날, 하늘을 날아갈 듯 기분 좋은 날.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에 한없이 취하고픈 밤, 창문을 활짝 열고 크게 심호흡하고 싶은 날, 흐드러지게 핀 꽃에 푹 파묻히고 싶은 순간... 그리고 하루하루 소중한 모든 날에 이 책과 함께 하고 싶다. 멋진 그림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째찌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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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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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편지

글쓴이: 히가시노 게이고

옮긴이: 권일영

펴낸 곳: RHK / 알에이치코리아


 츠요시와 나오키 형제, 그리고 오가타 할머니와 그 가족. 이들의 인생이 예상 못 한 슬픈 반전으로 바뀐 그 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츠요시를 말릴 수 있을까? 사건이 벌어진 그 날 오후 3시경, 환한 대낮에 범행을 결심한 츠요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돈을 훔치자, 돈만 있으면 동생 나오키를 대학에 보낼 수 있어.' '가난'이라는 야속한 굴레에 부모를 잃은 츠요시는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고 싶었다. 정말 돈만 가지고 나올 생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래 들어간 오가타 할머니 집에서 두둑한 돈 봉투를 발견한 츠요시. 서둘러 나가려는데 하필 그 집 식탁 위에 있던 톈진 군밤이 눈에 밟힌다. 동생 나오키가 좋아하는 그 군밤. 군밤과 돈 봉투를 주머니에 챙겨 넣은 츠요시는 무엇에 홀린 듯이 소파에 앉아 TV를 켠다. 이런 편안한 거실에서 큰 TV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TV를 끈 순간, 바로 그때였다. 빈집인 줄 알았던 그곳에 주인 할머니가 있었고 소리 지르며 신고하려는 통에 츠요시는 이성을 잃고 그만 할머니는 살해하고 만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고장 난 허리 탓에 얼마 못 가 체포된 츠요시. 형이 감옥에 간 후 홀로 남은 나오키. 아무리 씻어내고 노력해도 떼어낼 수 없는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꼬리표. 나오키에게 세상은 참 차갑고 혹독하다. 이 책 『편지』는 살인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나오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살인을 저지른 츠요시와 희생자의 유가족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여실히 엿보게 된다.


 2006년에 출간됐다가 새 옷을 입고 재출간된 『편지』. 일본에서는 이미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쓴 불후의 명작'이라는 띠지 문구를 책을 다 읽고난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절도와 살인은 씻을 수 없는 죄지만 츠요시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기에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이 세상이 야속했다. 하지만 내가 유가족이라면? 혹은 내가 살인범의 가족이라면?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게이고는 아마도 '죄'와 '속죄'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하며 이 소설을 쓴 건 아닐지... 감옥에 간 츠요시와 남겨진 나오키의 삶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비슷해서 두 형제를 보고 있자니 주책맞게 눈가가 자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가난이 죄였을까? 요즘 같은 세상엔 가난이 죄라지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살인은? 죗값을 치른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책을 다 읽은 이 순간 죄의 깊고 얕음 보다는 남겨진 자의 인생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에 나는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옴짝달싹할 뿐이다.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는 츠요시. 하지만 동생이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그 죄에 대한 형벌임을 츠요시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아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그깟 대학 안 보내고 말았을 거다. 살인자인 형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빼앗겨야 했던 나오키는 결국 형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연을 끊고 남남이 되어버리나 불안하고 안타까웠지만, 이 소설은 끝은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다. 츠요시와 나오키는 결국 피를 나눈 형제이니까. 절절한 감동은 없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 못 한 인간의 내면을 유려하게 풀어낸 『편지』.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았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 눈을 씻고 다시 봤던 시간이었다. 담담한 말투로 동생을 걱정하던 츠요시처럼 작가 역시 담담하고 침착하게 독자에게 생각해볼 여지를 만들어준 채 자신은 한발 물러서 있다. 두툼한 두께에 놀라고 보기와 다른 가벼움에 또 놀라고 어쩌면 이렇게 잘 읽을 수 있을까 또또 놀라며 쉼 없이 읽어간 이 책은 오래도록 머물 여운과 고민을 남긴 채 나를 참 많이도 괴롭혔다. 사건이 있던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츠요시를 꼭 말리리라. 제발 그러지 말라고. 동생과 둘이 행복하게 살라고... 문득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아무래도 아까 한 말은 취소해야겠다. 절절한 감동은 없었다고 여겼지만,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난 감동한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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