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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제목:
편지
글쓴이: 히가시노
게이고
옮긴이:
권일영
펴낸 곳: RHK /
알에이치코리아
츠요시와
나오키 형제, 그리고 오가타 할머니와 그 가족. 이들의 인생이 예상 못 한 슬픈 반전으로 바뀐 그 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츠요시를 말릴 수
있을까? 사건이 벌어진 그 날 오후 3시경, 환한 대낮에 범행을 결심한 츠요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돈을 훔치자, 돈만 있으면 동생
나오키를 대학에 보낼 수 있어.' '가난'이라는 야속한 굴레에 부모를 잃은 츠요시는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고 싶었다. 정말
돈만 가지고 나올 생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래 들어간 오가타 할머니 집에서 두둑한 돈 봉투를 발견한 츠요시. 서둘러 나가려는데 하필 그
집 식탁 위에 있던 톈진 군밤이 눈에 밟힌다. 동생 나오키가 좋아하는 그 군밤. 군밤과 돈 봉투를 주머니에 챙겨 넣은 츠요시는 무엇에 홀린 듯이
소파에 앉아 TV를 켠다. 이런 편안한 거실에서 큰 TV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TV를 끈 순간, 바로 그때였다. 빈집인 줄 알았던 그곳에
주인 할머니가 있었고 소리 지르며 신고하려는 통에 츠요시는 이성을 잃고 그만 할머니는 살해하고 만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고장 난 허리 탓에 얼마
못 가 체포된 츠요시. 형이 감옥에 간 후 홀로 남은 나오키. 아무리 씻어내고 노력해도 떼어낼 수 없는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꼬리표.
나오키에게 세상은 참 차갑고 혹독하다. 이 책 『편지』는 살인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나오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살인을
저지른 츠요시와 희생자의 유가족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여실히 엿보게
된다.
2006년에
출간됐다가 새 옷을 입고 재출간된 『편지』. 일본에서는 이미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쓴 불후의 명작'이라는 띠지 문구를 책을 다 읽고난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절도와 살인은 씻을 수 없는 죄지만 츠요시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기에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이 세상이 야속했다. 하지만 내가 유가족이라면? 혹은 내가 살인범의 가족이라면?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게이고는 아마도 '죄'와 '속죄'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하며 이 소설을 쓴 건 아닐지... 감옥에 간 츠요시와 남겨진 나오키의 삶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비슷해서 두 형제를 보고 있자니 주책맞게 눈가가 자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가난이 죄였을까? 요즘 같은 세상엔 가난이
죄라지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살인은? 죗값을 치른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책을 다 읽은 이 순간 죄의 깊고 얕음
보다는 남겨진 자의 인생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에 나는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옴짝달싹할
뿐이다.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는 츠요시. 하지만 동생이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그 죄에 대한 형벌임을 츠요시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아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그깟 대학 안 보내고 말았을 거다. 살인자인 형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빼앗겨야 했던 나오키는 결국 형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연을 끊고 남남이 되어버리나 불안하고 안타까웠지만, 이 소설은 끝은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다. 츠요시와 나오키는 결국 피를
나눈 형제이니까. 절절한 감동은 없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 못 한 인간의 내면을 유려하게 풀어낸 『편지』.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았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 눈을 씻고 다시 봤던 시간이었다. 담담한 말투로 동생을 걱정하던 츠요시처럼 작가 역시 담담하고 침착하게 독자에게
생각해볼 여지를 만들어준 채 자신은 한발 물러서 있다. 두툼한 두께에 놀라고 보기와 다른 가벼움에 또 놀라고 어쩌면 이렇게 잘 읽을 수 있을까
또또 놀라며 쉼 없이 읽어간 이 책은 오래도록 머물 여운과 고민을 남긴 채 나를 참 많이도 괴롭혔다. 사건이 있던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츠요시를 꼭 말리리라. 제발 그러지 말라고. 동생과 둘이 행복하게 살라고... 문득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아무래도 아까 한 말은
취소해야겠다. 절절한 감동은 없었다고 여겼지만,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난 감동한
모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