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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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같은 예술가들은 천성적으로 대책 없이 순진하지.

 

 

 

“아빠 말이 할아버지가 예전에 유명한 화가였대요. 하지만 그 일을 그만두셔야 했다면서요.”
“난 은퇴한 거란다, 이치로.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일에서 손을 떼게 돼 있어. 그건 당연한 거야. 그때가 되면 휴식이 필요하니까.”
“아빠 말이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만둔 건 어쩔 수 없어서였대요. 우리나라가 전쟁에 졌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44~45

 

 

 

 

 

 

은퇴를 하게 되면 시간이 남아돌게 마련이다. 사실, 고된 노동과 성취에서 손을 놓았다는 사실에 느긋한 심정이 되어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하루 종일 빈둥거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은퇴 생활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57

 

 

 

 

 

“화가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가난하게 산다.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온갖 유혹이 들끓는 세상에 살고 있지. 내 말이 맞지 않소, 사치코?”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하지만 어쩌면 그런 함정을 피하면서 화가로서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한둘쯤은 있지 않을까요.”    -64쪽

 

 

 

 

“사실 애석한 일입니다. 때때로 저는, 사죄의 의미로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한데 너무 비겁한 나머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고귀한 행동은 저희 회장님 같은 이들이 떠맡는 거죠. 벌써 전쟁 중에 있던 자리로 복귀한 사람들도 많답니다. 그중에는 전범이나 다름없는 이들도 있고요. 정말 사죄해야 할 사람들은 그런 이들일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조국에 대한 충성으로 싸우고 일한 사람들을 전범이라고 부를 수는 없네. 요즘 그 표현이 너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지 않나 싶네.”
“그렇지만 바로 이들이 조국을 잘못된 길로 이끈 당사자들입니다, 선생님. 그들이 마땅히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게 옳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비겁합니다. 그리고 나라 전체를 대표해서 그런 과오를 저지른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비겁한 짓임에 분명하고요.”    -77~78

 

 

 

 

환하게 불 켜진 그 시절의 술집들과, 등불 아래 모여 어제의 그 젊은이들보다 어쩌면 더 활기차고 그만큼 유쾌하게 웃던 그 모든 사람을 이따금 떠올릴 때, 과거와 그 옛날의 이 지역에 대해 절실하게 향수를 느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도시가 어떻게 재건되는지를, 최근 몇 년 동안 얼마나 빨리 복구되는지를 지켜보니 순수한 기쁨이 차오른다. 우리나라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이제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어 나갈 또 하나의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저 젊은이들이 잘해내기만을 바랄 밖에.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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