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로 가는 길
박재완 지음 / 연암서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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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날

 

 

 

남의 말에 매달려 사느라

마음은 늘 바람 같고

바람 같은 마음 붙들고 사느라

그 그림자 늘 갈대 같아라

 

 

 

아침엔 안개 낀 마당을 걷고

저녁엔 책장에 책을 쌓으며

지나간 시절로 시를 만들고

어쩌다 찾아온 근심으로 공부하면서

쏜살같은 시간 살다 갔으면

 

 

고백

 

 

 

죄인으로 삽니다.

어쩌다 하늘의 구름만 봐도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살다 갑니다.

 

 

산사의 가을

 

 

 

법당엔 향 한 그루 뜨겁게 서 있게

시절 없는 석탑 위로 드높은 하늘

 

 

간밤에 추웠던 마당 위를 행자는 걷고

깊은 곳 어딘가 짙어가는 노장의 기침소리

 

 

깊어진 하늘을 구름이 채웠으니

지난날의 가풍은 누가 이을 것인가

 

 

 

차가운 바람이 처마 끝으로 사라지고

법당 바닥에 누군가 또 좌복을 편다

 

 

또 한 시절이 끝나는가

담장 너무 단풍이 날아든다

 

 

수수께끼

 

 

산다는 것은 답을 하는 것

간밤엔 마침내 선사가 답을 했고

오늘은 도량의 연꽃이 답을 한다.

 

 

산중의 선사가 가부좌를 벗고

연못에 연꽃이 말없이 피도록

여직 수수께끼인 것은 나뿐인 듯하다.

 

 

약속

 

 

흔들리지 않고 서 있고 싶다.

가끔 흔들리지만 약속은 지키고 싶다.

사랑하겠다는 약속.

 

 

 

너와 나

 

 

 

오늘 하루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너였을까.

나의 말(言)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고, 너의 말도 모두 너의 것이 아닐 텐데.

어디까지가 너이고 어디까지가 나인가.

그것만 서로 알아도 눈물짓는 일은 없을텐데.

 

 

길과 나

 

 

스무살에도 이별은 아팠고, 지금도 이별은 아프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얼마나 남았을까. 길은.

스무 살에도 석양은 하나였고, 지금도 석양은 하나뿐이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이 길은. 어디로 가는가. 나는.

 

 

새처럼

 

 

 

마음을 비우면 날 수 있다.

벗어날 수 있다.

어제에서, 조금 전에서.

하늘은 '공간'이 아니라 '영역'이다.

 

 

법당

 

 

 

다리가 아픈 사람이 있었고,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무릎부터 앉았고, 마음이 아픈 사람은 눈물부터 흘렸다.

법당에 대중이 모였다.

 

 

"스님은 왜 산에 계십니까?"

    환속을 결심한 기봉 스님이 큰스님에게 물었다.

큰스님은 법당 처마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남에서 온 제비야 고향길은 어디로 나 있더냐? 네가 물어간 볍씨 한 알에 황금빛 수선화는 입을 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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