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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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녀

 

 

그 아기가 살아남아 그 젖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악착같이 숨을 쉬며, 입술을 움직거려 젖을 빨았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고 쌀죽과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한 여자가 된 뒤에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 때마다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38페이지

 

 

 

 

 

..................................................................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스라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39~40페이지

 

 

 

눈송이들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54~55페이지

 

 

 

 

흰개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그 수수께끼의 싱거운 답은 안개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개의 이름은 안개가 되었다.

하얗고 커다란, 짖지 않는 개. 먼 기억 속 어렴풋한 백구를 닮은 개.

그해 겨울 그녀가 다시 본가에 내려갔을 때 안개는 없었다.

자그마한 갈색 불독이 예의 쇠줄에 묶인 채 그녀를 향해 야무지게 으르렁거렸다.

    그 개는 어떻게 됐어요?

    어머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이 팔고 싶어도 차마 못 팔고 여름을 났는데, 서리 내리고 갑자기 추워졌을 적에 죽었단다.

    소리 한번 안 내고 저기 엎드려서..... 사흘인가 나흘인가 암것도 안 먹고 앓다가.

 

 

-62페이지

 

 

백발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기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한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

아 있을 때.

 

 

-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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