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김혜순 지음, 이피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불의 얼굴

 

 

 

종택에서 한밤중 검은 마루에 나와 앉아

몸에 좋은 약이라도 되는 듯이

어둠 속에서 검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귀신처럼 종부가 다가와 얘기를 한다.

낭랑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번진다.

내일 아침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보여줄 것이 산속에 있다 한다.

 

 

머리채가 더부룩하고

너는 왜 사니 묻고 싶은 풀들이 산속에 지천이었는데

이제 봄 지나 여름 지나 산속을 걷다보니

그 더부룩한 머리털들 끝마다 좁쌀한만 노란 꽃들이 지천으로 달

렸는데

산속이 다 노랗다고.

노란 싸락눈 덮친 것 같다고.

그것을 꼭 보러 가자고 밤중에 않아를 꼬인다.

않아는 안ㄹ아 눈 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그러면 됐다고 종부와 어둠 속에서 승강이한다.

 

 

 

종부는 또 얘기를 한다.

사람들이 자고 나간 뒤에 이불 홑청을 바꾸려 보면 그 사람이 보

인다고.

냄새도 다르고, 이불에 새긴 주름도 다 다르다고.

어떤 투숙객은 이불을 한 번도 펼치지 않은 것처럼, 귀신이 자

고 난 것처럼 흔적도 냄새도 없다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잡의 얼굴도, 몸도 다 다르다고.

우리 눈엔 안 보이지만 산속의 노란 꽃눈싸라기도 다 다를 거라고.

 

아직 오지 않은 과거

 

 

 

 

내일은 갔다.

어제는 올 것이다.

 

 

죽음은 태어났다.

탄생은 멀었다.

 

시의 이름

 

 

 

 

시의 나라는 이름을 지우고 가는 곳.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녀의 서기입니다.

그 소녀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요, 라고 말해도 되는 곳.

 

 

대담하려고 온 시인이 말했다. "선생님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고

난 다음, 자신의 미래를 그려서 들려주십시오."

 

 

'나'의 시는 '나'의 이름을 지우고 가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이름이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는 이름 아래로 추락한 자의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죽음을 나르고 있기 때문에.

시에서는 '내'가 '나'를 제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이름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갔을 때 비로소 시가 시작됩니다.

 

 

시는 '이름'을 넘어서, 정체를 넘어서, 익명으로 번진 내가 그린 무늬.

그 무늬의 도안. 도안 속에는 어디론가 다시 무늬를 그리며

이행에 나아가려는 동사가 된 형용사들이, 동사가 된 대명사들이,

동사가 된 명사들이 흩어지는 곳. 그 도망의 비밀.

 

 

이름 없는 자가

세상에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자 그/그녀가

사람들이 모드 그/그녀의 이름을 잊은 그자가

계곡을 타고 내려온다.

그/그녀가 계곡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다.

푸른 하늘이 그/그녀의 소매 끝에 매달린다.

 

 

음식에 대한 예의

 

 

 

 

오래된 영화 <단포도>를 보면 일본 국수 먹는 법이 나온다.

 

 

먼저 그릇에 대한 예의.

형태를 감상하고, 그릇 본연의 향기를 맡는다.

 

 

그다음 음식이 어우러진 모습에 대한 예의.

국물 위에 기름이 보석처럼 떠다니는 것을 감상한다.

부유하는 파의 향기를 음미한다.

삶은 고기 세 조각에 대한 예의.

국수에서 핵심 역할을 했지만 겸손한 모습의 고기,

그 저며진 모습에 대한 예를 갖춘다.

김이 천천히 올라온다.

김에도 예를 갖춘다.

 

 

그다음 음식 자체에 대한 예의.

젓가락으로 국수가 담긴 표면을 어루만진다.

특히 고기를 건드려주면서 어루만진다.

그다음 고기를 국물에 담가준다.

(그러면서 고기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라고 존칭으로 기도한다.)

면부터 먹는다.

후루룩 소리를 내어 예를 표한다.

면을 먹으면서도 애정을 담아, 고기를 응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지막 예의는 국물에 대한 예의다.

세 번에 나눠서 한숨을 내쉬며 마신다.

 

 

인생의 중요 결정을 내리듯 고기의 물을 털어 고기를 먹는다.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라고 되뇌면서.

 

 

나는 내게 와서 내가 먹는 것이 된 것들의 두려움을 함께 먹는다.

그들의 두려움은 내 불안이 되었을 거다.

내 몸속에 들어와 내 시간이 된 것들의 비명과 공포와 불안을 생

각한다.

 

그런 것들을 꾹 누르고 입을 다문 내 표면적 삶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들

 

 

 

제 몸의 것을 제가 꺼내 먹는 소처럼

저녁 해가 제 몸속 황톳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심심하면 산등성이 너머로

한 동이씩 똥도 내갈기면서.

 

 

큰 소리만 들어도

불은 젖이 쏟아지는 엄마가

나보다 더 젊은 우리 엄마가

초등학생들 가르치고

머릿니를 잡아주세요, 가정통신문 쓰고

달그락달그락 도시락 들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짐을 너무 많이 짊어진 소는

죽을 수도 없어!

불을 대로 불어터진

젖꼭지가 자갈길에 쓸린다.

외로운 해의 핏방울 방울방울

발굽 밑에 스민다.

 

 

저 너머로 해가 지고 나면

어둠을 낳는 엄마들이 소복소복 돌아온다.

 

 

요리 동사

 

 

 

다음 애록어 요리 동사를 날씨를 요리하는 동사, 마음을 요리하

는 동사, 머리카락을 요리하는 동사, 사람을 요리하는 동사, 말을

요리하는 동사로 나누어 서로 연결해보세요.

 

 

말                                       굽다

                                          삶다

날씨                                    데치다

                                          볶다

                                          지지다

마음속                                 끓이다

                                          졸이다

마리카락                              데우다

                                          타다

                                          (얼)버무리다

사람                                    찌다

 

사물의 말씀

 

 

주인님이 난처하시면 저를 리셋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사이의 일은 지워집니다.

그 말을 들은 않아가 로봇의 뺨을 갈겼다.

로봇이 말했다.

저는 아픔을 모릅니다.

 

시는

한 그루 나무

 

 

 

시는 세상을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립시킨다.

물론 그 순간 세상에는 그 나무 한 그루만 살아 있는 것

같다.

 

외할아버지의 서점

 

 

 

 

않아는 외할아버지의 서전에서 태어났다.

오래된 책의 냄새와 오래된 집의 냄새가 섞여 있는 집이었다.

2층에는 재고가 된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책꽂이에서 책을 빼내 외할아버지의 초록색 벨벳 회전의자에 파

묻혀 책들을 읽었다.

어른들의 책을 보았다.

간혹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있어 바닥에 엎드려 읽다보면

2층 마루가 책의 무게로 약간 기울어져 있어서 않아의 몸이 마루

끝에 처박히게 되었다.

창문 아래 책방 간판의 녹슨 양철이 만져질 듯 가까웠다.

책을 한 권 다 읽고 난 다음엔 그 책을 꼭 안아주었다.

외할아버지가 큰 병원으로 떠날 때도 책을 보고 있었다.

책을 보며 울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주검이 도착했을 때도 책을 읽고 있었다.

않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동생을 낳고 젖이 나오지 않는 엄마가 아기에게 먹일백설기를 2층에 말리고 있었는데

않아는 떡 몇 덩이와 책을 싸들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외할아버지와 함께 가출했다.

이제 책들은 사라지고 않아도 그 집도 사라졌다.

책의 글자들도 사라졌다.

 

 

며칠 전에 친구들과 여행을 하면서 외할아버지의 무덤 밑을 지났다.

않아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인사했다.

우리집은 서점도 아닌데 할아버지의 재고처럼 책을 꽂아놓고 살아요.

그렇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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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6-04-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詩는 정말 어렵다..^^;;
그래도 이 책은 무척 마음에 든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