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붉은 사랑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그대가 있었다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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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소식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조계산 선암사에 전화를 넣었습니다.

 

 

 

"스님, 매화는 언제쯤 핀답니까?"

"글쎄요, 나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아, 그래도요?"

"그러게요, 그게 꽃의 일이라서."

"아이 참, 그러지 마시구요?"

"거 참, 때가 되면 어련히."

 

 

 

그 자리에서만 생육한 지 육백 년입니다.

매화는 육백 번을 피었겠으나, 그 속마음을 아는 이가 여태 없습니다.

이 봄에도 그 마음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만큼 기다렸으면 예고편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P. 22~23

꽃밭에서

 

 

"엄마, 방안까지 향기가 몰려들어 시끄러워 죽겠어."

"글 쓰는 데 방해되거든 사정없이 내쫓아 부러야. 향기라도 봐주지 말구."

"꽃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못 참아 내는 내가 공부가 모자란 거지."

"니는 좀 냄새에 둔하면 좋을 텐데 코가 눈보다 밝으니 어쩨겠누."

"치자도, 천리향도 엄마가 아끼는 꽃에선 다 엄마 냄새가 나서 좋아."

"나팔꽃 좀 봐. 저것이 야리야리해도 공중곡예 선수여, 선수!"

""나팔꽃도 색깔이 다 달라. 흰 것도 있고 보라도 잇고 분홍도 있고."

"그래도 나팔꽃은 보라지. 보라가 조강지처고 딴 것들은 다 첩이여."

"엄마는 참, 애먼 데가 희한한 비유를 섞고 그러네."

"접시꽃은 흰 색깔이 제일이구."

"난 분홍이 좋아."

"하이고, 남우세스러운 거. 가시나 속곳에나 쓰는 야한 색깔을 사내 자식이 좋아한다냐?"

"나 참, 빨랫줄에 걸린 엄마 빤쓰도 분홍이더만?"

"그것이 분홍이것냐? 정밋빛이었는데 바래서 그런 거지."

"하이고, 분홍이나 빨강이나 거기서 거기지."

"아서라, 니 눈에는 맨드라미하고 분꽃하구 같아 보이냐?"

"그야 생판 다르지. 분꽃이 풋사랑이면 맨드라미는 상사병 수준이지."

"암만, 니 말 잘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빨강이여. 사람이 지조가 있어야지."

"그럼 엄마는 그리도 빨강이 좋다면서 작약이랑 모란이랑 철쭉이랑 분홍 때깔 나는 저것들은 왜 저리 많이 심어 놨어?"

"아야, 나는 삼시 세끼 밥만 묵고 사냐? 가끔 가다 수제비도 묵고 백설기도 묵고 짜장면도 묵고, 안 그르냐?"

"얼라리, 엄마는 꽃 이야기 하다가 왜 스리슬쩍 먹는 얘기로 넘어가?"
"꽃이나 밥이나 매한가지라는 거지. 사람이 밥만 묵고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니니께.

니는 꽃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것냐?"

"하루도 못 살지."

"긍게 꽃도, 사람도 색색대로 있어야 하잖것어?"

"얼라리, 엄마 시방 또 철학하는 거지?"

"워따, 니가 이 어미를 얕잡아 보는 것이냐?"

"나 참, 알았어. 멍석 깔 테니 읊어 봐요."

"세상에 좋은 것 나쁜 것이 어디 있것냐? 다 이유를 갖고 생겨났을 것인디.

내가 좋아하는 것과 니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일찍이 좋아한 것과 나중에 좋아하게 된 것이 있것지.

세상에 나쁜 건 없는 법이여. 열아홉 처녀 적에 좋았던 것, 애 낳고 보니 좋았던 거, 늙어지고 나니

좋아지는 거가 있을 뿐인 거지."

"나는 태어나기 전에도, 어렸을 적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항상 좋은 게 하나 있어."

"그게 뭐다냐?"

"엄마지!"

 

 

P. 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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