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불용침官不容針 사통거마 私通車馬`라는 말씀처럼 앞문은 언제나 바늘 한 개 꽂을 틈조차 없지만 뒷문은 항상 수레가 지나가도 될 만큼 여유롭다. 또 봄비가 내린다. 같은 비인데도 빨래를 널어놓은 뒤에 만났던 그 비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뒷문을 통해 듣는 빗소리를 귀에 착착 감긴다.
마을의 `주전자`는 절집에 오면 `차관`이 된다. 막걸리를 담는 게 아니라 청정수를 올리는 데 주로 쓰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같은 그릇이지만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주전자가 되기도 하고 차관이 되기도 한다. 주전자가 차관이 되는 것처럼 번뇌가 바로 깨달음으로 바뀌는 것이니, 범부의 모습으로 성인이 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수백 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 온 마당 한편의 화강암 수곽은 12월이 되면서 물을 담는 본래 역할을 끝내고 바닥을 드러낸 채 제 몸을 말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 철철 물이 넘쳐 가끔 새들도 와서 목을 축이고 잠자리가 꼬리를 담갔다 사라지곤 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고양이가 지나가면서 울음으로 적막을 깨뜨릴 뿐 한 해가 저물어가는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설사 생명 없는 돌이라 할지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쉼이 해마다 있었기에 그 자리를 오늘까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사람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대낮까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한참 동안 물끄러니 바라보다, 이내 스스로 지쳐 버린 느낌이 싫어 찻상을 당기고는 물을 끓였다. 끓는 물은 올라가면서 소리를 내고 비는 내려오면서 소리를 낸다. 두 소리가 방문을 경계로 묘하게 어우러진다.
김장을 담갔다. 자연산 배추는 별로 볼품이 없지만 어디에 내놓더라도 맛과 향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배추걷이가 끝난 휑한 빈 산밭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 배추로서는 아름다운 마무리이겠지만 김치로서는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눈길을 걸으면서도 뒤는 남는 발자국까지 걱정하지 말라. 사실 그냥 당신 갈 길만 유유히 바르게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판단은 뒷사람의 몫이다. 설사 앞사람의 발자국을 똑같이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할지라도 그건 같은 길이 아니라 뒷사람이 새로 가는 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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