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펭귄클래식 14
김시습 지음, 김경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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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 양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여 홀로 만복사 동쪽에 살고 있었다.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이제 막 봄을 맞아 꽃이 활짝 피어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을 쌓아놓은 것처럼 환했다.
양생은 달밤이면 늘 그 나무 아래에서 서성거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조리곤 했다.

한 그루 배나무 꽃 적막함과 짝하여
가련하게도 달 밝은 밤을 저버렸네
청춘에 홀로 외로운 창가에 누웠는데
어디서 귀한 님 피리를 불어주나

외로이 날아가는 비취새는 짝을 이루지 못하고
짝 잃은 원앙새 맑은 강물에 몸을 씻네
누구와 인연이 있는지 바둑으로 맞춰보고
밤이면 등불 점 쳐보고는 근심스레 창에 기대 있내-7~8쪽

양생이 즐거워하며 좋다고 대답한 뒤 「만강홍(滿江紅)」한 곡조를 지어 시녀에게 부르도록 했다.


처량해라 쌀쌀한 봄날
비단 적삼은 얇아 애간장 몇 번이라 끊어지고
향로 싸늘히 식었는데 해 저문 산은 눈썹 칠한 것 같고
저녁 구름은 비단 우산 펼쳐놓은 듯
비단 장막 원앙 이불 함께 나눌 이 없어
보석 비녀 반쯤 기울여 피리를 부네
슬프다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고
마음속은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등잔불 가물가물하고
은 병풍 나지막하게 둘렀는데
눈물만 닦고 있으니
누구와 좋아하리
즐거운 이 밤 피리를 부니
피리 소리 한 번에 봄날이 펼쳐지네
무덤 속 천고에 맺힌 한 풀어보려
금루곡(金縷曲) 나직이 부르며 은 술잔 기울이다
옛날 품었던 한 후회스러워 눈썹 찡그리고
외로이 잠드네-12쪽

정씨는 태도에 멋이 있었고 구름같이 쪽 진 머리는 살짝 귀밑으로 흩어져 있었는데 한숨을 쉬며 시를 읊었다.


꽃 피는 봄빛 아름답고 달빛 고운데
근심에 잠겨 보낸 봄날 몇 해나 되었는지 아득하구나
저 나란히 나는 비익조(比翼鳥)처럼
짝지어 놀며 푸른 하늘 날지 못했음을 한하노라


무덤 속 동엔 불빛이 없으니 이 밤을 어이할거나
북두칠성 막 이울고 달도 기울어져 가는데
슬픔에 찬 나의 무덤엔 오는 이 없어
푸른 적삼 구겨지고 귀밑머리는 헝클어졌네


매화로 사랑의 약속 했으나 끝내 어그러지고
봄바람 저버리니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네
베개 위의 눈물 자국 몇 개나 그렸던가
정원 가득 내리는 비는 빼꽃만 때리는데


봄을 즐기려던 마음 이미 부질없어져
적막한 빈산에서 그 몇 밤을 보냈는가
남교(藍橋)를 지나는 길손 보지 못하였으니
배항과 운교는 언제나 만날 수 있을까-115~17쪽

오씨는 머리를 뒤로 쪽 지고 있었는데 아리따웠으나 연약해 보였다.
감흥을 이기지 못하고 이어서 시를 읊었다.


절에서 향 사르고 돌아오는 길
동전 몰래 던지더니 누구와 맺어졌나
봄꽃 피고 가을 달 떠오르면 한없는 서러움
항아리 앞에 앉아 한잔 술로 녹여 볼까


새벽이슬 복숭아꽃 붉은 뺨 적시는데
깊은 골짜기엔 봄 깊어도 나비 오지 않네
이웃에서 깨진 구리거울 다시 합한다니 문득 기뻐
새 노래 다시 지어 부르고 금잔에 술을 따르네


해마다 제비는 봄바람에 춤추는데
애끊는 이 내 사랑 헛되기도 해라
부러워라 저 연꽃은 꽃받침과 함께
깊은 밤 연못에서 몸을 씻네
일층 누각은 푸른 산속에 있고
연리지(連理枝)에 핀 꽃은 붉기도 하건만
애달파라 내 인생은 저 나무만도 못해서
박명한 청춘에 눈물만 고인다

김씨는 몸가짐이 반듯하고 의젓하였다.
붓을 적시고는 앞에 쓴 시들이 몹시 음란하다고 꾸짖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많이 말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광경만을 서술하면 되는데 왜 묵은 회포를 늘어놓아 절개를 잃고 인간 세상에 그런 하찮은 마음이 알려지게 합니까?"
그러고는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17~22쪽

두견새 울음 그치자 오경이 되고
희미한 은하수 동쪽으로 이미 기울었네
다시는 옥피리 불어 희롱하지 마시라
사랑 찾는 마음 세상 사람에게 알려질까 두렵네


금 술잔 한 잔 가득 채워드리니
모름지기 취할 따름 많다고 사랑하지 마시라
내일 아침 봄바람 사나워 흙먼지 날리면
이 봄 경치 어찌 꿈이 아닐런가


푸른 비단 소맷자락 나른하게 드리우고
음악 소리 쟁쟁한 가운데 싫도록 마시리라
맑은 흥 다하기 전엔 돌아가지 못하리니
새 가사에 새로운 곡조 지어 부르네


구름 같던 머리 흙먼지에 더럽힌 지 몇 해인가
오늘에야 님을 만났으니 활짝 웃어보세
고당(高唐)에서 선녀 만난 일 자랑하지 말라
풍류 이야기 인간 세상에 알려질라-17~22쪽

유씨는 엷은 화장에 수수한 옷을 입어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법도가 있었다.
말없이 조용히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시를 지었다.


그윽한 절개 굳게 지켜온 것 몇 해던가
향기로운 넋과 옥 같은 뼈 황천에 깊이 묻혔네
봄밤이면 늘 항아(姮娥)와 벗하여
계수나무 꽃 옆에서 홀로 졸곤 했지


우습구나 복숭아꽃 오얏꽃 봄바람을 못 이기어
점점이 남의 집에 떨어지네
평생토록 더러운 것 묻히지 않았는데
곤륜산 좋은 옥에 흠 생길라


화장도 귀찮고 머리는 쑥대 같고
경대에는 먼지 쌓이고 거울은 녹슬었네
오늘 아침 다행히 이웃 잔치에 참석해
족두리꽃 유난히 붉음을 수줍게 바라보네


낭자는 오늘 공부하는 신랑과 짝이 되었으니
하늘이 정해 준 인연 그 만남 향기로우리
월하노인 이미 인연의 줄 이어주었으니
이제부터 서로 양홍과 맹광 같이 대하시라-17~22쪽

여자가 유씨의 시 마지막 말에 감동하여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
"저도 대강 글자를 아는데 혼자 아무 말 없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칠언 사운의 근체시 한 편을 지어서 읊었다.


개녕동 골짜기서 봄 근심에 잠겨 있을 때
피고 지는 꽃 보며 온갖 시름에 잠겼었지
초나라 무산 구름 가운데서 그대 보이지 않아
상강 대나무 아래서 눈물이 넘쳐흘렀네


맑은 강가 화창한 날 원앙이 짝지어 있고
푸른 하늘 구름 걷힌 곳에 비취가 노니네
좋구나 동심결 맺어 두 마음 변치 않기로 했으니
깁부채는 서늘한 가을을 원망하지 마시라-17~22쪽

양생도 글을 잘하는 사람이라 그 시 짓는 법이 맑고 고상하고 읊는 소리 또한 맑게 울리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바로 앞으로 나아가 붓을 달려 고풍으로 장단시 한 편을 지어서 답하였다.


오늘 밤은 어떤 밤이기에
이 아리따운 선녀들을 보는가
꽃 같은 얼굴은 어찌 이리 어여쁘며
붉은 입술은 앵두 같은가
시 짓는 솜씨는 더욱 절묘하니
이안(易安)은 입도 열지 못하리
직녀가 베틀 던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나
항아가 절구 공이를 던지고 달나라를 떠나왔나
옥으로 만든 자리에 곱게 단장한 빛이 비치고
술잔 서로 오가며 잔치를 즐기네
구름으로 엉켰다가 바로 내리는 사랑에 익숙지는 않지만
술 마시고 나직이 노래 부르며 서로 기뻐하네
봉래섬에 잘못 들어와
이 같은 신선 세계의 풍류객 마주하니 절로 즐거워지도다
귀한 술 향기로운 술통에 넘쳐 나고
금사자 모양 화로에서는 상서로운 안개가 뿜어 나오네
백옥으로 만든 상 앞에 향 가루 날리고
가는 바람 파도 일으켜 푸른 비단 같은 물결 이네
선녀가 나를 만나 혼인의 술잔을 올리니
채색 구름은 부드럽게 얽혀 있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문소가 채란을 만나고
장석이 두란과 맺어지는 것을-17~22쪽

사람이 태어나 서로 만나는 것도 정해진 인연이 있으니
모름지기 술잔 들어 서로 어지러이 취해 보세
낭자는 어찌 그리도 가벼운 말을 꺼내는가
그대를 가을 부채처럼 버릴 것이란 말은 하지 마오
다음 세상 또 그다음 세상에도 짝이 되어
꽃그늘 달빛 아래 서로 얽혀 지낸시다-17~22쪽

다음 날 양생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이전의 자취를 찾아가니 과연 임시로 매장한 곳이 있었다. 양생이 제사상을 차려 슬피 통곡하고 그 앞에서 종이돈을 태운 뒤에 땅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글을 지어 애도하였다.


영령은 살아서는 온순하고 예뻤으며 자라서는 깨끗하고 순박했소.
자태와 얼굴은 서시(西施)에 비길 만하고 시 짓는 솜씨는 숙진보다 나았다오.
한 번도 규방을 나간 적이 없고 항상 부모님의 가르침을 들어 난리를 당해서도 정절을 온전히 지키다 왜적을 만나 죽었구려.
쑥대밭에 의탁하여 외롭게 살다가 꽃피는 달밤이면 얼마나 서글펐겠소.
애간장을 녹이는 봄바람이 불면 두견개의 피 울음을 얼마나 슬퍼했겠소.
간담을 찢는 가을 서리 내리면 비단부채처럼 버려진 것을 또 얼마나 탄식했겠소.
지난번 하룻밤의 만남으로 마음이 얽히고설켜 이승과 저승이 떨어져 있음을 알면서도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즐거움을 모두 다 누렸소.
이제 평생토록 해로할까 했지, 하룻밤 만에 슬픔으로 눈물 흘리게 될 줄 어찌 알았겠소.-25~27쪽

달에는 난새를 타고 다니는 항아가 있고 무산에는 비가 되어 나타나는 신녀가 있으나 땅은 아득하여 돌아올 수 없고 하늘은 막막하여 갈 곳을 바라볼 수가 없소.
찾아가자니 너무 황홀하여 말을 할 수가 없고 나오니 너무 아득하여 갈 바를 모르겠소.
영령 있던 휘장을 대하여 울음을 참고 좋은 술 한 잔 따르니 슬픔이 더욱 사무치오.
당신의 그윽한 음성과 얼굴을 느끼고 또렷하던 말을 떠올리오.
아아, 슬프다!
그대의 성품은 총명하고 그대의 기운은 섬세하였소.
삼혼이 흩어져 버릴지리도 어찌 그 영령마저 사라지겠는가.
응당 내려와서 뜰로 올라설 것만 같고 그대의 향은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소.
죽음과 삶의 세계가 다르다 해도 이 애도의 글에 느끼는 바 있기를 바라오.-25~27쪽

그 뒤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밭과 집을 모두 다 팔아 사흘간 천도제를 지내주었다. 그러자 여자가 공중에서 말했다.
"그대의 천도제에 힘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저승과 이승이 떨어져 있지만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대는 다시 불법을 닦으셔서 함께 윤회를 벗어납시다."
양생은 그 뒤로 다시 결혼하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을 캐고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지 못한다.-2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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