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노인은 일찍 부인을 여의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며느리가 굴비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는 굴비가 밥상에 올라오기를 기대했지만
며느리와 아들이 몰래 둘이서만 굴비를 먹은 것을 알고 신세를 한탄하며 집을 팔아버렸다.
집을 판돈의 반은 아들 내외를 주고 나머진 자기가 가지고 나와 버렸다.
혼자서 지내다 친구의 권유로 새 부인을 맞게 되었는데 새 부인의 심성이 곧고 불심이 높은지라
부인과 오붓이 새 살림을 잘 꾸려나갔다.
어느날 부인은 이제 그만 아들 내외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묵은 감정을 다 버리라고
장노인을 설득해 장노인 내외와 장노인의 아들 내외는 오랜만에 만난을 가지게 되고,
며느리는 장노인에게 울며 지난날의 잘못을 사죄한다.
이리하여 장노인의 집안에는 행복이 찾아왔다.
<불교통신>
[설화내용]
오늘 따라 구멍 난 천정에서 쥐새끼 한마리가 유독 소란을 피우고 있다.
윗목에서 아랫목 천정으로 몇 차례 그 큰 눈을 휘둥거리며 숨을 몰아치던 장노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빗자락을 내던진다.
「빌어먹을 쥐새끼들 조용히 못해‥‥‥」
하고 왕방울 같은 눈을 더 크게 뜨고 소리쳤다.
한동안 방안은 조용해졌으나 구멍난 천정이 날이 갈수록 숫자가 많아져 갔다.
「재수없게 스리―」
장노인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사위어가는 화로 불을 다둑거린다.
방안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빈 입맛을 다신 장노인 쌈지를 꺼낸다.
짧은 대통에 골연 한대를 꼽고 한모금 들이키자 콧속에서 뭉개구름이 쏟아진다.
흥분이 가라않자 막 누우려는 순간 대문이 삐씩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비뚜러진 봉창 사이로 살며시 들여다보니 사랑스런 며느리가 굴비 한 짝을 들고 들어온다.
「웬일인가?」
하여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누웠다.
「사돈마나님이라도 오신다는 말인가?」
다시 일어나 인기척을 바랬으나 전혀 소식이 없다.
「마누라 죽은 지 10년 만에 굴비한번 먹게 되었구나.」
하고 장노인은 침을 삼켰다.
「이 얼마만인가?」
괜히 기분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구워서먹을 것인가. 지져서 먹을 것인가. 아니면 끊여서 먹을 것인가.
어쨌든 몇년만에 굴비한번 먹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에 침이 저절로 돌았다.
저녁 8시 기다리던 밥상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밥상에는 굴비는 고사하고 새우젓 꽁댕이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장노인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술한술 밥을 뜨다 보니 된장국에 김치 한 그릇이 다 없어지고 말았다.
「어찌된 일일까?」
「제사에 굴비가 들어가나」
「집안엔 제사도 아직 멀었는데―」
「아마 시간이 너무 늦어 요리를 하지 못했는가 보다.」
하고 그만 서운한 숟가락을 놓았다.
밤잠이 오지 않았다. 몇 차례 누웠다 앉았다 하는 사이에 또 쥐새끼가 소란을 피웠다.
「저놈의 쥐새끼―」
하고 벌떡 일어나 보면 천정에는 쥐구멍이 또 하나 생긴다.
또 쌈지에선 골련이 튀어나온다.
「원수놈의 담배, 네가 내 벗이로다.」
장생원의 입에 담배가 물리자 바쁘게 연통에선 연기가 보기 좋게 쏟아진다.
「후우―」
한숨섞인 연기 속엔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서문시장에서 일하고 오다가 물 동태 한 마리 사가지고 와서 끓여먹던 그 추억이 눈앞에 선했다.
「아, 그때가 좋았어.」
보글보글한 냄비에서 끓어오르는 고소한 냄새―저절로 코끝이 생긋해진다.
고춧가루물이 불그스레하게 베인 두부한쪽임을 큰 숟갈로 떠서 입에 가득 채우고 술 한잔 마시던 정경, 동태대가리를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며 눈깔 하나먹고 하나 집어 마누라 입에 떠넣어 주던 모습, 가운데 토막은 서로 미루면서 꼬리와 국물로 입맛을 돋구어 가며 깨가 쏟아지게 다정한 생활을 해오던 옛 시절이 한없이 그리웠다.
「설사 저희들끼리 먹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또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는 가운데 벌써 새벽닭이 울어댄다.
「귀신도 닭이 울면 간다는데-자야지.」
하고 간신히 청한 잠이 날이 샌 줄도 모르게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버님, 진지 잡수세요.」
「오냐, 벌써 아침이 되었느냐.」
자리에서 일어난 장 노인은 여느 때와 같이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상머리에 앉으며 상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굴비는 없었다.
「너무 깡깡해서 불려 끓여줄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장생원의 눈에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손님을 기다리는가?」
이렇게 의심을 해보면서 그래도 한가닥 기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마, 사돈영감이 오실 모양이다.」
갖가지 추측 속에 아침식사를 마친 장노인은 마당을 쓸다가 쓰레기통에서 굴비 찌꺼기를 발견했다.
「이 고약한 것들.」
장노인은 눈에서 불이 튀었다.
「이년놈들이 다 먹어버렸구만―」
당장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이웃체면도 있고 해서 그대로 밖으로 훌쩍 나갔다.
원두막 복덕방 영감이 소리쳤다.
「웬일이오, 장노인 아침부터 일찍이―」
「억울해서 내 못살겠소, 당장 오늘 처리해야겠소.」
「그 무슨 말씀입니까?」
「못 먹고 못 입고 애써서 기른 자식이 내 가슴에 못을 박고 불을 지르는 데는 견딜 수가 없어.」
「그러게 내 뭐라 합니까, 진작 처분하고 편히 살라하지 않습니까.」
「그래 영감님 말씀이 옳았어―」
장노인은 짐짓 후회의 눈빛을 보내면서,
「많든 적든 작자가 나는 대로 처분해 주십시오.」
하고 돌아왔다.
오전 10시 장노인이 돌아온 뒤 두어 시간도채 안돼서 복덕방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집좀보러 왔습니다.」
「우리는 집을 내놓은 일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오늘 아침 아버지께서 집을 내놓고 가셨습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듯 며느리는 아버님 방 앞에 가서 물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집을 내놓으셨습니까?」
「오냐, 집 팔아가지고 굴비 한짝 사먹으련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며느리는 말도 못하고 그만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왔다. 집은 흥정되었다.
싯가 5천만원이 넘는 집이 3천 6맥만원에 팔리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백배사죄하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한번 불이 나니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었다. 장노인은 집을 팔아 둘로 나누었다.
반은 아들에게 주어 자유스럽게 살게 하고 반은 자기가 가지고 뒷골 사직마을로 올라갔다.
집은 허름하지만 터전이 있어 좋아보였다.
1천 6백만원에 집을 사고 2백만원은 은행에 예금했다.
땡전 한 푼 없던 사람이 당장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진작 이렇게 사는건데, 자식 믿다가 골병이 터졌어―」
장생원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새로 산 집을 수리하여 이사하였다. 천국이었다.
눈치 볼 것도 없고 코치 볼 것도 없고, 눕고 싶으면 눕고 앉고 싶으면 앉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문자 그대로 천당이요, 극락이었다.
「진작 이렇게 사는 건데 자식이 애물이여.」
장노인은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매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녁때가 되어 밥을 지으려고 장노인은 바가지에 쌀을 퍼가지고 부엌으로 나갔다.
순간 사립문이 스르르 열리며.
「아이구 사돈양반, 이게 웬일입니까?」
하는 소리에 너무 놀란 장노인은 그만 바가지를 땅에 떨구고 말았다.
「아이구 이 어찌된 일입니까?」
자식 잘 가르치지 못한 죄로 남의 집안까지 망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사돈어른.」
장노인은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우선 사돈댁 앞에서 밥을 하려다가 바가지를 떨어뜨렸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장생원은 얼른 부엌문을 닫고 나오며 사돈댁을 모시고 음식점으로 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뇨. 진짜 죄송한 것은 이쪽입니다. 자식 잘못 둔 죄로 굴비 한짝에 집을 팔게 하고 사돈어른까지 고생시키게 하였으니 이보다 죄송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설렁탕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우고 둘은 서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헤어졌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흩어진 쌀을 쓸어 담으며 한탄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 이것이 무엇이라고 이걸 먹겠다고―」
하며 장노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생각해 보니 그래도 마누라가 제일이었다.
좋든 싫든 먹을 것이 있든 없든 둘이는 서로 의논하며 살아왔는데 전생에 무슨 죄업으로 이렇게 외톨이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장노인은 갑자기 쓸쓸한 생각들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바가지를 들고 부엌에 들어가거나 밥을 먹고 그릇을 씻노라면 괜히 옆에서 누가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조이고 가슴이 두근거렀다.
「양반주제에, 이러다가는 또 자식을 욕 먹이는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에라, 차라리 해먹는 것보다는 사먹는 것이 낫겠다.」
장노인은 아예 부엌에 들어가는 일을 그만두고 음식점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한식 내일은 중식―이런 식으로 다니다 보니 음식도 다양하고 새로운 취미가 붙는 것 같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값싸고 깨끗하고 맛좋은 집을 찾아 전전하였다.
하루는 음식점에 갔다가 옛 친구를 만났다.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아가 일러주려 하였는데―」
「무슨 말인가?」
「자네 요즘 이 집 저 집으로 음식을 사먹고 다닌다고 소문이 파다하네.」
「소문은 무슨 소문인가?」
「좋은 음식 먹고 싶어 집 팔아 가지고 따로 산다고―」
그도 그럴만한 일이었다.
굴비 한짝 때문에 집을 팔아먹고 많지도 않는 식구가 흩어져 왕래도 하지 않고 사는데 더구나 또 아버지는 맛 따라 멋 따라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좁은 바닥이라 오직 말이 많으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세상은 이래도 말, 저래도 말이니 차라리 혼자 살 바에야 마누라를 하나 얻게 이렇게 다니다가 병이라도 나면 누가 돌봐주겠는가.」
그도 그럴 일이다
「허지만 내 나이에 마누라를 얻는다면 욕 투성이 될 것이네.」
「그렇지도 않아. 세상은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던가. 아, 재너머 최성도도 60이 넘어 장가갔고 건너 마을 이 장로도 70넘어 장가들지 않았는가.」
그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가슴에 온기가도는 것 같았다.
「허지만 장가를 마음대로 갈 수 있는가.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남의 여잔 데려다 고생이나 시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신세가 비슷해야지―」
「그런 사람만 있다면야 혼자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났겠지.」
「그럼 내가 중매해 보지―」
하고, 친구는 당장 일어서서 카운터 앞으로가 수화기를 들었다.
「게 있느냐, 좋은 사람 소게해 줄께 이리 나오너라.」
장생원은 은근히 미소를 던졌다.
「장난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인가?」
「자네도 싫지는 않는 것 같은데―」
「홀아비가 여자생각 하지 않는 사람 있다던가.」
「아하하―」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그래 어디 그리 좋은 사람이 있어?」
「내 가까운 친척인데 어떻게 하다보니 40이 넘었다네. 인물이 못난 것도 아니고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가정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너무 고르다 보니 때를 넘겨가지고 이젠 아주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는거야.」
「에이 이 사람아. 그런 농담하지 말게. 나이 60에 처녀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로맨스그레이, 말도 듣지 못했는가. 단지 한 가지가 문제네.」
「한가지라니―」
「밑이 좀 뻣뻣해야 할텐테―」
「에잇, 이사람.」
하고 둘이는 또 껄껄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예쁘장하고 통통하게 생긴 소담스런 아가씨가 옆자리에 와섰다.
친구가 말했다.
「어, 벌써 왔나. 이 어른께 인사드려라.」
처녀는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는 처녀의 모습을 본 장노인은 괜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 장이요.」
「미스김 입니다.」
인사가 끝나자 친구는 바쁜 일을 핑계하더니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어느 집으로 간다는 말인가.」
「어느 집은 어느 집이야 자네 집이지.」
장노인은 자고나서 이불도 개지 않고 담배 재떨이도 청소하지 않고 나온 그 지저분한 자기집에 이런 여자를 데리고 갔다가는 큰 망신을 당할 것 같아 망설였다.
「다방으로 가지―」
「무슨 말인가. 홀아비 신세로 사는 자네의 모습을 직접 보아야 일이 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잔소리 말고 자네 집으로 가세.」
장노인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왔다.
「혼자 살다보니 집안 꼴이 이지경입니다.」
「그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미스김은 어색하지 않게 방에 들어가서 이부자리도 개고 재떨이도 치우고 방청소를 하였다.
「어떤가! 싫지는 않지?」
「글쎄―」
「그러면 됐네.」
하고 친구는 나가 버렸다.
미스김은 말없이 한동안 청소를 하고 앉았다.
「남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일찍이 병환으로 고생하시다가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며칠 전에야 시묘가 끝났습니다.」
「고생 했습니다.」
「10년 동안 아버지 시중을 들다보니까 때를 놓쳤습니다. 어제 작은 아버님께서 오셔서 선생님 말씀을 하시더군요.」
「내 말을요?」
「예, 10년 전에 부인을 잃고 외롭게 사는 진실한 친구인데 굴비 한짝 때문에 집을 팔아 먹고, 지금은 따로 살고 있다고―」
「그래서 혹 마음이 내키면 소개해 주겠다고,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괜히 마음이 끌렸습니다.」
「나하고는 20이나 나이 차이 가 있는데」
「진실로 이해만하고 살수 있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옳은 말이었다. 미스김은 그길로 부엌에 나가 밥을 지었다.
장생원도 부엌으로 들어가 불을 지폈다.
술뚜껑을 훔치고 있는 미스김의 뒷 모습은 청결하면서도 단아해 보였다.
장생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이 났다.
그래서 펌프에 물을 퍼서 길러다 주기도 하고 부엌살림을 이것저것 정돈해 주기도 하였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와 불을 때고 이일 저일을 거들어 주는데도 조금도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쌀독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부딪쳤다.
쌀독에 바닥이 나도록 뭘 했느냐 하는 것보다는 서로 내가 이 독에 쌀을 채워 따뜻하게 살아보겠다는 굳은 의지의 눈빛이었다.
장생원은 수건을 쓰고 밥상을 들고 온 미스김을 보고는 불현듯이 장농문을 열었다.
그리고 깊이, 깊이 간직해 놓은 선조의 위패를 꺼내서 벽에 붙이고 함께 인사하자고 하였다.
미스김은 그 밥상을 위패 앞에 갔다 놓고 4배를 올렸다.
「부족한 사람이 이렇게 시봉을 드리게 되어 황송합니다.」
「조상님께서 잘 살펴주셔서 이 집안에 화기(和氣)가 돌게 하옵소서.」
함께 절을 하고 나서 마주 섰다. 미스김이 말했다.
「정식으로 절을 하겠습니다. 예를 받아주십시오.」
장생원도 절을 했다.
「이것이 무슨 인생인지 나도 모르겠소.」
「소매자락 스치는 인연도 5백생을 쌓아야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한상에서 밥을 먹는 인연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겠네요.」
「그러문요.」
하고, 둘이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보면 볼수록 다정스럽고 마음이 끌렸다.
설거지를 마친 여인이 말했다.
「저희 집에도 가서 함께 인사드리고 오십시다.」
「집이 어디오?」
「장안에 있습니다.」
둘이는 서둘러 미스김네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방이 꼬신 냄새가 날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혼자 있기 때문에 구태여 큰 집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고 북쪽 벽에 모서진 어머니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어머님 아버님께 같이 인사하십시다.」
둘이는 신방에 맑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인사하였다.
「어머님 아버님, 인젠 안심하십시오. 좋은 배필을 만나 떠나게 되었으니 결코 가문에 누(累)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황송합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미스김과 장노인은 어두운 밤거리를 헤치며 걸었다.
하룻 사이에 혼례 절차가 모두 갖추어진 셈이었다.
중매장이를 만나 선을 보고 시가에 가서 부모님께 폐백드리고 또 처가에 가서 폐백드린 후 이제 본가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장노인이 말했다.
「참으로 인연도 이상한 인연이오. 이렇게 쉽게 만나 쉽게 이루어지다니―」
「제가 어느 책에서 보니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1천생 인연은 한 국토에 나고
2천생 인연은 하루를 동행하고
3천생 인연은 하룻밤을 같이 자고
4천생 인연은 한 고향에 동족으로 태어나고
5천생 인연은 한 마을에 나고
6천생 인연은 하룻밤을 동침하고
7천생 인연은 한집 가족이 되고
8천생 인연은 부부가 되고
9천생 인연은 형제간이 되고
10천생 인연은 부모 스승이 된다고
그러니 우리의 인연은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적어도 7천생은 넘겠네요.」
둘이는 더욱 다정해 보였다.
집에 둘 다 들어가 자리를 정돈하자 장노인이 말했다.
「초라한 집, 부족한 이 사람을 넉넉하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께서 잘 거두어 주십시오.」
순희는 자리를 깔고 베개 맡에 숭늉 한 그릇을 떠 다 놓았다.
「주무시다가 목이 마르시면 드십시오.」
「늙으면 목이 자주 말라―」
장노인은 어떻게 그렇게 남의 속을 잘 아느냐는 식으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스김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이제 우린 양가 부모님께 맹세를 한 몸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는 정신적인 부부입니다. 또 호적상으로도 분명히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장 선생님께서 끝까지 이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으시겠다 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시봉하며 살겠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순희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만일 이 이야기가 장난기 어린 생각으로 이해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눈치였다.
장노인이 말했다.
「무슨 재미로 삽니까?」
「둘이 사는 재미로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살이 섞인 부부로 알텐테―」
「남이야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두 사람의 마음만 깨끗하면 됩니다.」
옳은 말이었다.
저절로 굴러온 보물덩어리를 그 한 가지 문제 때문에 버릴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미스김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혼자 살 사람이 정신적인 배후자를 만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맹세하였다.
「그러면 이부자리를 두개로 깔겠습니다.」
하고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장노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일이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남녀간에 서로 사귀는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기 마련인데 돈·명예·사랑,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한방에서 잠자리를 할 수 있게 된 사람이 그것마저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마누라 죽은지 10년 동안은 오직 자식 하나만을 위해서 살아왔기 매문에 딴 생각이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칼도 늘 쓰는 사람이 잘 쓰기 마련인데, 10년 동안이나 묵혀 녹이든 기계를 새로 닦아 본궤도에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리라 생각해 왔는데 차라리 이렇게 되고 보니 나이든 사람으로서는 훨씬 마음에 부담이 없어져서 좋았다.
그러나 허리춤으로 살짝 손을 넣어 보니 아주 못쓰게 된 것은 아닌데 서운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생원은 몇번인가 아랫도리를 쓰다듬으며 잠재우느라 애썼다.
미스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이 잠들어 숨소리 한번 크게 쉬지 않았다.
「저렇게 얌전한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혼자 있다가 나 같은 못난이를 만나 시봉하게 되었을까 이것도 다 연분이겠지.」
생각하면서 장노인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소문은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보이기만 하면
「장노인이 처녀장가 들었다네.」
「그러기 위해서 굴비핑계하고 집을 팔았지 뭐―」
「얌전한 강아지가 부뚜막엔 먼저 올라간다 하지 않던가.」
하고 말이 많았다.
「너무 재미가 좋아서인지 얼굴이 꺼칠한데―
요즘, 자네 얼굴이 퍽 젊어 졌어. 젊은 사람과 살다보니 함께 젊어지는가 보지―?」
같은 사람을 보는데도 이처럼 서로 견해차이가 많았다.
사람들이 너무 수다를 떨다보니 이젠 부끄러워서 문밖출입도 하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나가지 아니하면 여편네 치마 자락에 빠져 바깥출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입방아를 찧을 것이고―혼자 살아도 시원찮은 처지에 두 사람이 어울려 살면서 일까지 하지 않다보니 집안이 점점 더욱 어려워져 갔다.
밤이면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착하고 착한 남의 딸을 데려다가 고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고히 잠든 미스김을 바라보면서 장노인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 당돌했어, 어차피 혼자 살 바에는 다른 사람이나 고생시키지 말았어야하는 것 인데―」
하루는 순희의 작은 아버지가 찾아왔다.
「어떻게 지내는가. 혼자 살 때보다는 낫지?」
「괜한 짓 한 것 같아, 남의 처녀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애―」
「그런 얘기하지 말게. 이 세상은 어디가도 구설 없는 곳은 없어. 바르면 바르다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세상은 모두 시비장단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요즘 노인당에 나가는데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때로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나와서 좋은 강의도 들려주니까, 그러니 자네도 별일 없으면 노인당에나 나가서노세.」
「집에 있어도 구설인데 나가면 얼마나 말이 많겠나.」
미스김이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집에 앉아 답답한 것보다는 나가서 대화도 하고 남의 말도 듣고 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리하여 장생원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노인당에 나가게 되었다.
마침 그날따라 서울에서 유명한 선생님이 오셔서 시문학 특강을 하는 날이었다.
노인들뿐 아니라 많은 문인 후보생들이 강당을 꽉 메웠다.
선생은 옛날 한 관료의 부인이 벼랑위의 꽃을 보고 그리워 할때 소를 끌고가던 70노인이 그 꽃을 꺾어 바치는 헌화가로부터 시작하여 선화공주, 광덕스님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반상의 제도가 분명하고 관민사상이 투철한 시대에도 젊은 여인과 노인과의 관계가 대중들이 우러러 보는 가운데서 공공연히 실현되었고 뿐만 아니라 광덕은 대처승이었는데도 일생을 청정히 지내다가 극락세계로 갔는데 반하여 엄장은 비구승이었는데도 마음이 깨끗치 못하여 광덕부인에게 퇴장을 맞고 마음을 깨끗하게 가진 것을 듣고 미스김의 행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만 깨끗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인데 그동안 체면과 이면 때문에 바깥출입을 꺼려하였던 자신이 얼마나 못난 주제였던가를 재삼 느끼고 깨달았다.
장노인은 생각하였다.
「나도 벼랑위의 꽃을 꺾어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리라.
그러고 광덕과 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며 서동처럼 부지런히 일하며 금과 은을 캐리라.」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장노인을 본 순회는 마음이 기뻤다.
「나도 이제 당신에게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그리고 마도 캐서 대령하고―」
「어머나, 진정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나는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신혼기도 지냈고 하니 나가서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 같이 일합시다. 힘이 있을 때까지는 부지런히 일하고 힘이 없을 때는 앉아서 공부합시다. 오늘 시인의 말을 들으니 늙을수록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던데―」
「그래요. 우리 이제부턴 주경야독 합시다. 나도 힘은 모자라지만 열심히 일터에 나가서 일을 할터이니 당신도 일터가 있으면 알아서 하세요.」
「그래요. 그럼 내일부터 당장 실천합시다. 다만 욕심만 부리지 말고.」
「그런데요. 늙을수록 젊은 책을 보고 지혜로운 글을 읽으면 더럽고 어리석음이 없어진다 하였어요.」
하고 순희는 그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읽던 책 한권을 건네준다.
「이거 읽어보세요. 우리 조상의 정신이 한목 다 들어 있어요.」
「이게 뭔데‥‥」
하고 책을 받아든 장노인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다. 오늘 말씀한 시인께서 소개 한 책이―」
「그래요. 그 책이 저 유명한 삼국유사입니다.
이런 책을 미리미리 읽어두면 어둠 속에도 좋은 빛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그리하여 미스김과 장노인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미스김이 말했다.
「여보, 그런데 한 가지 당신에게 부탁드릴게 있어요.」
「무엇 입니까?」
「아들 세인이에게 가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하고 서 너살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고 놀려대는데 며느리가보면 어떻게 생각하게―」
「또 체면 생각하는 겁니까. 한 집안에서 인연을 맺고 산다면 당연히 서로 알고 살아야지요.
이렇게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무색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당신의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갑시다.」
마침 때는 토요일 오후라 가면 아들 며느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스김과 장노인이 세민의 집에 찾아갔을 며느리와 아들이 다리미질를 하고 있었다.
장노인이 말했다.
「세민아, 미안하다. 너의 새 어머니께 인사드려라.」
「 진작 찾아가 뵙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할런지 몰라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을 불러 인사를 시켰다. 며느리가 흐느끼며 말했다.
「아버님. 참으로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실은 두어달 전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잘 참고 지내왔는데 그날따라 장에 갔다가 굴비를 보니 배속에 것이 어떻게 먹고 싶어 하던지 두서 너번을 갔다 왔다 하다가 결국은 반 외상으로 사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시장에서부터 조금씩 떼어 먹으면서 집으로 왔는데 오직 애를 위해 샀기 때문에 누구도 주지 않고 혼자다 먹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무릎을 끊었다.
「얘야. 진실로 내가 잘못했구나. 오죽이나 못난 아버지가 며느리가 아이 밴것도 모르고 살겠느냐.
그 애가 어찌 네 애기만 되겠느냐. 네 남편이 나의 자식이라면 그애도 곧 내 자식이 아니겠느냐.
내 아이 우리 아기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는 가장이 무슨 가장이라 하겠느냐.
용서해다오. 앞으로는 서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속임 없이 이야기해 가며 살자.
귀신도 말을 하지 아니하면 알지 못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범부가 어떻게 알겠느냐.」
며느리는 아버지 무릎에 그대로 엎드려 통곡하였다. 맺혔던 한이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며느리가 눈물을 씻고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절 받으세요. 다시는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깊이 살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옷 받으세요.」
하고 4배나 하였다. 장노인은 물었다.
「옷은 무슨 옷이야?」
「며칠전 월급을 타와서 아버지, 어머니 옷 한 벌씩을 했습니다.
마침 가지고 가기 위해서 다리미질을 하던 참인데 집에 오셨으니 한번 입어 보세요.」
「고맙다. 그래, 너의 새 어머님에게도 인사드려라.」
이렇게 하여 장노인과 김순희는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직동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