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귀신 - 김시습과 금오신화 창비청소년문고 7
설흔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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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에서 죽었을 때 나는 덩치만 큰 소년이었습니다. 염라국에서 미래의 왕으로 낙점받으면서 나의 고통과 번뇌와 슬픔은 그대로 살이 되었고, 내 덩치는 더욱 커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살만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로소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탓에 또다시 이승의 삶을 겪었지만 말입니다. 강물에 뛰어드는 나를 무사들이 보고만 있었던 것도 결국은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는 아직 열일곱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열일곱입니다. 덩치가 더 커지고 생각이 조금 자란 열일곱입니다. 언젠가 삼촌을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삼촌을 그저 죽은 자 중의 하나로 대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제 다리를 건널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파주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생의 죽음에 대한 사과였고, 상아를 데려가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행위였습니다. 김생에게는 할아버지의 친필이 담긴 종이를 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닙니다. - 259~263쪽

나는 그것을 보기만 해도 충분하지만 김생은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니 김생에게 주어야 마땅합니다. 다시 상아의 손을 잡았습니다. 파주댁은 통곡했고, 김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나는 상아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살짝이기는 했지만 손을 빼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함께 느꼈습니다. 하지만 손을 빼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상아 또한 이미 죽은 자이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떨리는 손을 꼭 잡아 주는 것뿐입니다.
다리 위를 걷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승에 갔던 것은 상아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생의 죽음도 상아와의 만남도 결국에는 하나, 즉 인연이었습니다. 내 생각을 눈치챈 걸까요, 상아가 갑자기 내 손을 세게 쥐었습니다.
그러고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당신은 내 아빠를 죽인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나는 상아의 아비를 죽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상아는 나를 받아들였습니다.
상아의 결단이 없었다면 나는 영원히 이승을 떠도는 요귀로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상아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 259~263쪽

나는 상아의 손을 쓰다듬으며 내 마음을 전했습니다.
파주댁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 그친 긴 둑에는 풀빛이 가득하고요, 남포항에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는 내 마음을 흔든답니다. 대동강은 언제가 되어야 마를 수 있을까요, 해마다 이별 눈물이 더해지기만 하니.'
상아도 그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상아가 파주댁에게서 배웠던 것입니다. 지아비를 잃은 슬픔을 치유했던 그 노래가 이제는 상아의 것이 되었습니다. 상아와 파주댁은 분명 다시 만날 터입니다. 김생 또한 언젠가는 내가 다스리는 곳으로 오겠지요. 만난 자는 헤어지나 헤어진 자는 다시 만납니다. 그러니까 애이불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파주댁과 상아의 노래를 들으며 붉은 만월 하나만이 떠 있는 저승의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259~263쪽

"불타는 집이 바로 연화인 것을!"
"뭐라 하신 겁니까?"
불길은 사라지고 의아해하는 선행의 얼굴만 남았다. 김생은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꿀밤을 마저 먹인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 너에게 『금오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쓰는 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들어라. 그런 글을 쓰려면 이 집을 불태우고 저승에 가야 하는데, 저승이 어디인고 하니......."

●연화(連花)ㅣ 불교에서 그리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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