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귀신 - 김시습과 금오신화 창비청소년문고 7
설흔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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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은 너를 잡으러 온 거야! 저놈이랑 있으면 네가 죽게 된다고!'
'엄마, 그게 아니에요!'
상아도 지지 않고 맞섰습니다. 파주댁은 더 격하게 상아를 몰아 붙였습니다.
'제 아비랑 똑같구나. 네 아비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다가 결국 개죽음을 당했다. 내 말만 들었으면 살 수도 있었는데.......'
'엄마!'
'너도 그렇게 죽고 싶은 게냐? 네 아비의 곁으로 가고 싶은 게냐? 안 된다! 아직은 안 된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된다!'
파주댁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부적을 든 손이 떨리는 게 똑똑히 보였습니다. 어리석은 여인입니다.
자신이 아는 세상이 세계의 전부라 믿고 있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행태를 보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어딘지 익숙한 광경입니다. 나를 몹시도 미워했던 누군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나쁜 놈! 내 이승의 삶을 열일곱으로 끝나게 했던! 자라다 만 덩치 큰 소년으로만 남게 했던! 눈물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못하는 나이로 죽게 했던!
주먹을 움켜쥐었습니다. 뜨거운 기운이 손목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가슴도 타올랐습니다.
손을 가슴에 댔습니다.- 179~182쪽

하나로 모아진 기운은 불길이 되어 눈앞에서 타올랐습니다. 어렴풋한 얼굴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불장난은 아이들이나 하는 법이다. 하긴 네놈이 어른은 아니니.'
그렇습니다. 나는 아이입니다. 이미 죽었으니 어른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내 잘못이던가요?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재수 없고 짜증 나는 목소리를 향해 불길을 던졌습니다. 목소리는 허허 웃으면서 사라졌고, 대신 파주댁이 불길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나는 불길이 하는 짓을 보았습니다. 파주댁의 부적이 순식간에 불타 없어졌습니다. 부적은 사라졌지만 내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불길을 모았습니다. 불을 던지려는데 상아가 파주댁 앞을 막아섰습니다. 상아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나를 보았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입을 꼭 다문 상아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들리지 않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비 그친 긴 둑에는 풀빛이 가득하고요, 남포항에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는 내 마음을 흔든답니다.'
상아의 구슬픈 노래가 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맑은 남포항에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내 분노의 불길을 단번에 꺼뜨렸습니다. - 179~182쪽

쉽게 타오르고 쉽게 꺼지는 불길이었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타오른 허무한 불길이었습니다.
꼴만 그럴듯했지 실속은 없는 불길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나는 몸집만 컸지 실상은 아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되지 못한 것, 그게 바로 내가 열일곱 나이에 죽은 까닭일 터입니다.- 179~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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