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울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너울, 쓰개치마부터 개화기 양산까지, 편하지는 않았던 전통

여성들은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곤 한다. 개인의 피부 관리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사회의 요구에 의해 가려야만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사회가 변화하면서 여러 목적으로 얼굴을 가리게 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가리개는 주로 머리에 쓰는 것이기 때문에 쓰개류로 분류되는데, 조선시대의 풍속화에는 다양한 가리개의 사용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당시는 사회적인 윤리의식에 의해 착용이 강요되던 시기였다.

여성의 가리개 가운데 너울(羅兀)이라는 것이 있다. 남양 홍씨의 가승(家乘)에 의하면 너울은 “비단으로 만들어 사면으로 드리워서 얼굴을 가리고 어깨까지 덮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시대의 분묘에서 기록과 일치하는 너울들이 출토되었다. 둥근 원립(圓笠) 위에 라직물과 같은 투공성있는 직물을 씌워 아래로 드리워서 외부에서는 착용자의 모습을 가늠하기가 어려우나 착용자는 망사와 같은 직물 덕분에 앞을 투시할 수 있다.

너울은 이미 조선시대 이전에도 사용되었는데 서역에서 사용하던 것이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몽수, 유모, 멱리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자신의 할머니가 쓰시던 멱리가 옛날 상자 안에 남아있으며 당시는 궁인의 종들만이 멱리를 쓰고 있다고 하였다. 이익보다 후대의 학자인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궁녀들이 너울을 썼는데 직책에 따라 색상이 달라 검은색은 귀하고 푸른색은 천한 젓”으로 전하고 있어 후에 너울이라고 불렸으며 색상에 의해 계층이 구분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의는 장옷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말기까지 사용되던 대표적인 가리개이다. 조선 초기에는 남자들의 겉옷으로 착용되었던 것인데 여자들이 따라 입기 시작하였고 점차 쓰개용으로도 사용되었다. 형태는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소매 끝에는 끝동을 넓게 대었다. 외출할 때에는 머리에 쓰고 얼굴만 드러내도록 하고, 앞은 마주 여며지도록 하였으며, 때로는 머리 위에 이고 다니기도 하였다.

쓰개치마와 장의를 착용한 여인들 ([안릉신영도]의 일부)

 

장의와 비슷한 것으로 쓰개치마가 있다. 장의는 소매가 달려있는 반면 쓰개치마는 이름 그대로 치마와 같은 형태인데 치마 허리쪽을 얼굴에 두르고 턱 밑에서 양쪽 끝을 맞잡아 착용한다. [안릉신영도]는 1786년 황해도 안릉에 신임 현감이 부임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전모를 쓰고 쓰개치마를 어깨에 두른 인물들이 있다. 전모는 머리에 써서 가리개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쓰개치마는 한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두르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어 얼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갈대나 대오리를 엮어 우산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는데 가장자리를 육각형으로 엮은 것을 삿갓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모두 착용하였던 것으로 김홍도의 ‘가두매점’에 삿갓을 쓰고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이 쓴 삿갓은 근처에 서있는 남성이 쓴 삿갓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후대가 되면 주로 이북 지역에서는 삿갓을 크게 만들어 여성들의 가리개로 착용하였는데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직경이 90㎝ 정도로 몸을 가리고도 남는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방갓이 있다. 삿갓의 가장자리가 육각형인데 반해 방갓은 사각형으로 만들어 붙여진 이름으로 역시 여성의 가리개로도 사용되었다. 삿갓이나 방갓은 크기가 커서 두 손으로 잡고 다녀야만 했는데, 길을 가다 사람과 마주칠 때에는 갓을 앞으로 약간 숙여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다지 사용하기에 편해 보이는 가리개는 아니다.

 

 

가두매점의 일부                                                                               삿갓을 쓴 여인

 

유교의식이 철저했던 조선시대가 끝나가고 개화기에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가리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로 양산의 도입이다. 외국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던 여학교에서 장옷과 쓰개치마를 못 쓰게 하자 당시의 윤리의식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우므로 자퇴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학교당국이 마련한 자구책이 바로 검은색 우산이었다. 우산이기는 하나 대낮에 썼으므로 양산의 기능을 하였고 여학생의 얼굴가리개 용도로 사용되었다. 양산은 새로운 문화에 관심을 갖는 신여성들에게는 필수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 가리개의 용도뿐만 아니라 신여성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물건이 되었다.

미인의 기준은 사회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선호해왔는데 얼굴 가리개는 시대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착용되던 적도 있었으나 요즘은 깨끗한 피부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아마도 가리개의 착용이 강요되는 시대는 다시는 없을 것이다.

 

글 박윤미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복식사를 전공했으며 저서로는 [덕혜옹주 - 그의 애환과 복식], [대가야복식], [한국전통복식조형미], [조선조왕실복식]이 있다.
자료제공
문화재청 헤리티지 채널 (http://www.heritagechannel.tv)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