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9
김준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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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수토끼 한 마리가 곰의 굴에 들어갔는데, 어미 곰은 밖에 나가고 새끼 곰만 있었다. 토끼가 새끼 곰에게 말했다.
"네 어미가 있었다면 내가 마땅히 그 음문에 한번 흘레라도 했을텐데....... 마침 네 어미가 없으니 한탄스럽고 애석하구나."
어미 곰이 돌아오자 새끼 곰은 토끼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어미 곰이 화를 내며 말했다.
"호랑이는 산군山君이로되, 세상의 수많은 영웅들은 그래도 내가 먼저고 호랑이는 나중이라 하지. 하물며 쇠 입에 긴 수염을 가진 괴상한 존재인 토끼가 감히 나를 욕보이다니. 만약 다시 온다면 내 마땅히 그놈을 잡아 한입에 삼켜버리리라."
그리고 어미 곰은 숲 속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토끼가 지나다가 다시 그 굴에 와서 새끼 곰에게 전과 같은 말을 했다.
그때 숨어 있던 어미 곰이 즉시 튀어나오자, 토끼는 깜짝 놀라 달아났다.
몸이 작은 토끼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어미 곰도 토끼를 쫓아갔지만 워낙 몸이 커서 우거진 나무 사이를 뚫지 못하고, 오히려 칡과 등나무 덩굴에 끼이고 말았다. 그러자 토끼는 되돌아와 어미 곰 뒤로 가서 겁간을 하고 달아나며 말했다.-333~335쪽

"이래도 내가 네 지아비가 아니더냐?"
그때 마침 하늘을 돌며 날던 큰 수리가 토끼를 낚아채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러자 곰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시나요?"
그러자 토끼가 대답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약에 쓰려고 수리를 보내 맞이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내가 수리를 따라가는 것이고."
수리는 두려우면서도 화가 나 말했다.
"내가 너를 잡아먹는다 해도 배에 차지 않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너를 풀 한 포기 없는 섬에 던져버려 굶어 죽게 하리라."
수리는 모래섬에다 토끼를 던져버렸다.
토끼는 모래섬에 떨어진 후 오랫동안 굶주려 장차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별주부鼈主簿란 놈이 물결 위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끼는 별주부의 화를 돋우려고 따지듯이 말했다.
"외로운 놈, 친척도 없는 자라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물고기와 자라는 모두 내 친족으로, 이들이 바다를 모두 덮는다면 바다가 오히려 좁을 게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와롭다고 하느냐?"
"네가 정말 그들을 불러 바다를 메울 수 있어?"
그러자 별주부가 그의 무리들을 불러 바다를 차례로 덮게 했다.-333~335쪽

"그렇다면 내 마땅히 수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지."
그러면서 토끼는 자라의 등 위로 뛰어올라 차례차례 걸음을 옮겼다.
"한 자라, 두 자라....... 천 자라....... 만 자라......."
물가에 이르자 토끼는 육지로 뛰어오르면서 말했다.
"넘어가는 자라!"
그렇게 뽐내면서 가다가 토끼는 갑자기 시골 사람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 거기에서 빠쟈나올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붉은 머리를 한 쉬파리가 토끼의 눈자위에 와서 앉았다. 토끼는 또 쉬파리를 흥분시키려고 말했다.
"너는 자손도 없으면서 어찌 감히 내게 오느냐?"
그러자 쉬파리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자손은 '수레이 싣고 말[斗]로 될' 만큼 많아서 그 수를 셀수 없을 정도다!"
토끼는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정말 네 자손이 그렇게 많다면 불러 모아서 내 몸의 털 하나마다 알 하나씩 낳을 수 있느냐?"
쉬파리는 즉시 앵앵하며 소리를 냈다. 그러자 다른 쉬파리들이 무더기로 모여들더니, 토끼의 털에 알을 낳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더기가 온몸에 가득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토끼는 숨도 쉬지 않고 거짓으로 죽은 척했다.
그때, 그물을 걷는 사람이 와서 보고는 탄식하며 말했다.-333~335쪽

"그물에 걸린 지 오래되었구나. 썩어서 구더기까지 생겼으니...... 이를 장차 어디에 쓰리오?"
그러고는 산 구릉에 던져버렸다. 토끼는 뛰어 달아나며 말했다.
"달리는 자라가 마침내 죽음을 면했네."
토끼는 처음에 자라로 인해 목숨을 건졌던 까닭에 또한 기쁨이 지극해지자 자기 스스로 다시 자라라고 칭했던 것이다. 자라는 곧 별鱉의 속명이다.-333~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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