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4 - 한국고전걸작유머
김현룡 엮음 / 자유문학사 / 2008년 1월
절판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淳厚)하고 인심이 두터워 친분이 있고 아는 사이에서는 선물을 교환하고, 자신들의 지역에서 나는 물자를 서로 나누며 살았다.
그리하여 서울의 경대부(卿大夫) 가문에서는 시골 친지들에게 그 친분의 정도에 따라 붓과 먹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쥘부채를 주기도 하며, 정초에는 역서(曆書:달력)를 많이 마련해 보내기도 하면서 훈훈한 인정을 베풀었다.
한편, 시골에서도 그 보답으로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생선이나 과일, 생치(生雉), 닭 등을 정성껏 마련해 보냈고, 더러는 담배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상호간의 친분을 더욱 두텁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인정이 오가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사람들의 인심이 각박해지면서, 옛날의 좋은 풍습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곧 서울에 사는 경대부들이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서 집에 쓰고 남는 물건들을 저자에 내다파는 풍조가 일기 시작하자, 시골 친지들에게 보내던 선물은 점점 사라지기에 이르렀다.-74~75쪽

이에 시골에서도 그 물건들을 못 받게 되어 자연히 서울 저자로 나가 사올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니 서울로 보내던 물건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그들 역시 선물을 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루는 서울에 사는 한 경대부가 대궐로 들어가다가 평소 선물을 보내 주던 시골 친지를 만났다. 이에 경대부는 인사를 하고,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아, 이 사람아! 지난날에는 자네가 늘 명절 때마다 닭을 보내 주더니, 근래에는 통 볼 수가 없구먼. 사람이 살아가면서 전에는 참으로 후하게 대접하다가, 이제 와서 그리 박하게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자 시골 사람 역시 크게 웃으면서 응대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세상 인심이 그리 되었나 봅니다. 우리 시골에선 얻기가 어려우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곧 전날 대감께서 보내 주시던 쥘부채와 역서 같은 것이들이옵니다. 한데 이제는 부득이 선물로 드리던 닭을 팔아 그런 것들을 사야 할 처지가 되었사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경대부는 뭐라 할 말이 없어 잠자코 헤어졌다. 그 시골 사람의 말 속에는 서울 경대부의 인색함을 조롱하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74~75쪽

훗날 경대부가 서울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멋쩍게 웃었다.

여기에 야사씨는 다음과 같은 평을 붙였다.
이 이야기에서 서울의 재상은 인색하여, 자신의 물건은 주지 않고 남의 선물만 바라면서 한마디 농담을 건넸다가 도리어 조롱을 당했도다. 이 어찌 '네게서 나온 것은 네게로 돌아간다'는 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비록 시골 사람은 분명히 밝혀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속에는 풍자의 뜻이 담겨 있으니, 곧 서울 재상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도다. 시골 사람은 참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할 만하도다. <명엽지해>-7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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