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가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면서, 오지 않는 가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했습니다.

내 상상 속의 가을은,

세상에 태어나 그럭저럭 꽤 오래 살아온,

그러나 어딘지 소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남자.

가끔 미소를 지으며 혼자만의 생각이 잠기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조금 쓸쓸해보이지만 따뜻함을 감추고 있는,

휘파람 같은 목소리를 가진,

쌉쌀한 맛의 입술을 가진,

비오는 밤의 하늘 색깔과 같은 눈동자를 가진,

그런 남자.

그는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을 서성이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가끔 방심하기도 하고 그 사이에 내게 들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뛰어가보면

어느새 사라져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혼자 깊은 밤 속에서 그를 생각할 때면

포기하지 말라고, 잊지 말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속삭입니다.

스르르, 소리도 없이 어느새 곁에 와 있는 가을.

그러나 그는 여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내 주위를 서성이다 불현듯 증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심장을 찌르고 위무하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문득 나를 떠날, 가을.

나를 향해 다가온 줄 알았더니

한두 마디 이야기만 나누고 그대로 스쳐가버리던, 해마다의 가을.

그러나 오늘 문득 가을과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가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가 헤어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나란히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내 손을 잡고 걸어온 여름이 자, 이제 가을과 동행하세요, 하고

그의 손에 나를 넘겨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세상의 모든 것은 잊다가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쉽게 정을 주지 않는 건 이별의 무게가 무거울까 봐.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듯,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없을지 몰라요.

이 가을,

가을과 나란히 걷는 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사랑을 하는 일,

나는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나란히 걷기 - PAPER 황경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