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분위기 속에서 화기애애하고 번잡한 잔치를 무사히 끝낸 권율 장군이 한시름 놓으면서
사랑채 아랫목에 편안한 자세로 앉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습니다.
'거 참 이상하다. 이상해. 필히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두 사람의 신수가 저렇게 바뀔 리가 없지 않은가?
이상한 일이로군. 어떻게 한다? 그냥 모른 체 하고 넘어가나. 아니면 곡절을 알아보나.'
한동안 상념에 빠져있던 권율 장군이 이윽고 마음을 정했다는 듯 아랫 사람을 불러
"아무개야 가서 큰 서방을 이리 들라 해라." 이 한 마디에 오래지 않아 방에 들어온 신립에게 편안히 앉기를 권한 후에
"우리끼리 한 번 숨김없이 이야기를 나눠 보세"
하며 근간에 있었던 일을 은근히 알려주기를 재촉하니 잠시 망설이던 신립 장군이 얼마 전에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장인 어른께 들려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립 장군이 어느 날엔가 지방에 볼 일이 있어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깊은 산중에서 밤을 맞이하여 어디 한 군데 유숙할 곳이 없나 하고 사방을 둘러보니 먼 곳 어디에선가 희미한 불빛을 발견하고
그 집에 찾아들어 하루밤 묵어갈 뜻을 청하니 소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여쁜 낭자가 슬픔이 가득한 표정으로
"길손을 쉬어 가게 함이 마땅한 줄 아오나 그리 하면 길손께서 죽음을 면치 못하겠기에
외람되지만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이해하여 주옵소서." 예의를 깍듯이 갖추면서 이리 말하니
깊은 산 속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자리잡은 곳도 이상한데 소복을 차려입은 낭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게
괴이쩍고 궁금하기도 하여 "낭자. 필히 말못할 사연이 있는 듯 한데 어디 한 번 들어 봅시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그 어려움을 풀어드리리다."

낭자가 보아하니 어느 곳을 보아도 잘 생긴 모습이며 믿음직한 헌헌장부인 신립의 위용에 저으기 안심이 되어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낭자의 안내로 대문 안에 들어서니 그 커다란 집에 사람의 기척이 전혀 없으니
더욱 의아하고 궁금증이 들었지요. 낭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부모님은 굉장히 큰 부자였고 인품 또한 원만하여
남의 원망을 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엔가 문득 세상이 싫어졌다며 재산을 정리하여 산수가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평생을 지내기로 마음을 정하고 이곳으로 찾아 들었는데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그럭저럭 편안한 여생을 보내던 날에 이곳에 올 때 함께 들어온 하인의 마음이 무섭게 돌변하여 함께 하던 동료들을 모조리 죽이더니
낭자의 부모까지 위협하며 딸과 결혼 시켜 달라고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더란 겁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깊은 산중에서 이토록 무서운 꼴을 당하고도 어디에다 알리지도 못하고
그냥 냉가슴만 태우는데 이런 환경을 약점으로 삼아 집요하게 요구를 하건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모의 입장에서나 낭자의 처지에서나 도저히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더니
내친 김에 부모까지 죽이더니만 낭자에게 이르기를 "이제 너는 혼자 되었으니 앞으로는 나를 서방이라 불러야 되느니라."
하면서 오늘밤에 낭자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이에 낭자는 부모까지 죽인 철천지 원수하고는 도저히 밤과 낮을 함께 할 수 없는지라
부모님께 마지막 제사를 드린 후 죽을 결심을 했다는 기가 막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의협심을 느낀 신립 장군이 "저런 천하에 못 쓸 놈은 내가 대신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겠소이다."
"아니 되옵니다. 그 못된 놈이 힘이 얼마나 장사인지 장정 대여섯 명이 대들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 낭자께서는 심려하지 마시오. 봇짐 속에 활이 들어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그 못된 놈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낭자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낭자로 하여금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하인을 맞아들이고 술을 권하는 동안에
내가 다락에 숨어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화살을 날리면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테니 안심하시오.
막다른 길에 도달한 낭자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길손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이렇게 해서 하인을 맞이하여 도저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며 거나하게 취하게 만들어 놓으니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기다리던 신립 장군이 때는 이때다 하며 대갈일성 꾸짖으며
"이 못된 놈아 너같은 놈은 마땅히 죽어서 없어져야 하느니라." 화살을 날리니 그 순간에 낭자의 원수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지요.
사태를 수습하고 낭자하고 헤어질 때가 되어 "낭자. 앞으로 몸을 잘 보전하여 잘 살도록 하오."
이별을 고하니 낭자가 울면서 "아니, 그냥 가시려고요. 이 못난 소저도 함께 데려가 주시옵서소."
"아니 되오. 이 몸은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오."
"그래도 좋습니다. 생명의 은인께서 이 몸을 거두어주시면 측실이라도 좋으니 평생을 모시고 살겠습니다."
간곡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노라고 냉정히 돌아서는 신립 장군에게 이별을  고한 낭자는
신립 장군을 향하여 "서방님을 모실 수 없으면 이 몸은 죽음을 택하겠나이다."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으니 아까운 청춘 하나가 산중고혼이 되었습니다.

큰 사위의 말을 다 듣고난 권율 장군은 사위의 행위를 칭찬하기는 커녕 낭자의 뜻이 그러할진데
신서방은 마땅히 한 목숨을 끝까지 구제해야 했느니라 하면서 사위를 나무랬다고 합니다.  
사위를 밖으로  내보내며 권율 장군은 속으로 탄식하며 진정을 담은 여인의 소원을 멀리하여 여인의 억울한 혼이 씌어서
얼굴에 가득했던 서기가 사라지고 요기가 대신 들어찼으니 장차  닥칠 이 불행을 어찌한다 하며 사위의 앞날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이야기기 긴 듯하여 2편으로 이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