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읍(和順邑) 에서 보면 남산 입구에 사거리가 있는데 여기 자치샘이란 빗돌이 서 있다.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오랜 이 고을의 역사를 말해 주는듯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이젠 그 도 지난간 세월에 시달리다 지쳐서 말라죽은 고목이 되어 버렸다.

이 물로 빨래를 하면 옷이 깨끗하고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다고 하며 이 속에는 철분과 염분이 없어서 물맛이 좋고 오랜 가뭄에도 샘물이 끊어지지 않은 명천(名泉) 이었다. 옛날에는 이 고장의 명물로 손꼽힌 두부와 초병(기정떡) 이 모두 이 샘물 때문에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얽힌 전설로는 관직(官職) 은 모르나 옛날 오자치(吳自治) 라는 지리술수(地理術數) 에 밝은 분이 화순을 지나는데, 그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겨 이 곳을 파도록 하였다고 한다.

(玉水) 가 솟아 올라 그 샘을 자치샘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설은 진각국사(眞覺國師) 의 태생에 얽힌 이야기다. 옛날 고려중엽의 일이었다. 화순읍에 배씨성을 가진 아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관속(官屬) 인 만큼 그 고을 사람들 사이엔 적지 않은 세력(勢力) 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산(家産) 도 여유가 있어 아무런 구애 됨이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배씨 부부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늦게야 겨우 딸 하나를 얻어 금지옥엽(金枝玉葉) 처럼 귀엽게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 배씨내외는 모든 희망을 딸에게 걸고 어린 것이 자라는 것에 낙을 삼았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로 인생길은 그리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금지옥엽처럼 키우던 그 딸이 열여섯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아버지인 배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별안간 당하는 일이었으므로 온 집안은 근심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우기 딸과 아내는 날마다 눈물로 지내는데 효심이 지극한 딸은 하루도 빠짐없이 손수 미음을 끓여 아버지께 바치었다.

하루는 물동이를 이고 샘으로 가는데, 아직 이른 새벽이라 먼동이 텄을뿐 어슴프레한 아침이었다. 하늘에는 샛별이 떠 있고 주위는 죽은듯 고요할 따름이었다. 배씨처녀는 샘가에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맑은 물을 뜨려고 바가지를 든 순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저게 무엇일까?」 배처녀가 놀라 물위에 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분명히 <참외>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에 참외가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그머니! 한겨울에 참외가 왠일일까? 」 배처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참외를 건져 들었다. 그것은 아무리 달리 보고 냄새를 맡아 보아도 틀림없는 참외였다. 신기하듯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던 그녀는 별안간 그 외가 먹고 싶은 생각이 충동적으로 일어 무심결에 외를 먹고 말았다. 이른 새벽의 참외 맛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참외 한개를 다 먹어 치운 다음 물을 길러 가지고 돌아와 미음을 쑤워 아버지가 갇혀 계시는 옥() 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참외를 먹고 난 뒤, 배처녀는 두달, 석달, 달이 가고 날이 갈수록 그녀의 배() 는 불러만 갔다. 처녀의 몸으로 수태를 하게 된 배처녀는 이상하기도 했지만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근심속에서 날을 보내었다. 「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차라리 죽어 버릴까? 」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무심한 배는 날이 갈수록 더 불러만 갔다.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된 그녀는 어느날 저녁에 어머님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어머님, 저어...... 」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얼굴을 숙인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아니, 왜 그러느냐? 어디 몸이 아픈 모양이로구나.」「 아니예요, 어머님, 으흐흐흐......」「 왜 말은 않고 울기부터 하느냐? 네가 내 앞에서 못할 말이 뭐란 말이냐?」「 저, 저 저에게 태기가 있어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처녀의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 뭐? 그게 웬말이냐! 그럼 도대체 그게 뉘애란 말이냐? 어서 바른대로 말하여라.」 딸을 다그치는 어머니의 전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배처녀는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은 양 정신을 가다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딸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는 어이가 없었다. 「참 해괴한 일이로구나. 어찌됐던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들의 이목도 있으니 문밖 출입을 금하여라.」 어느덧 만삭이 되어 옥동자(玉童子) 를 낳았고, 때마침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이 되었던 배씨가 혐의가 없음이 판명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집도 안간 딸이 옥동자를 낳은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행실을 못되게 해서 낳은 아이인가, 의심하여 철저히 꼬집고 힐문하였다. 그러나 배처녀는 전혀 그런 일이 없고, 차천(車泉) 으로 물을 길러 갔다가 샘물에 뜬 외를 한개 건져 먹고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아버지도 참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딸을 책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남보기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집 뒤에 방 하나를 새로 들이고 그곳에서 얼마동안 아기를 길렀지만 밖에 누설이 될까 두려워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아무도 모르게 읍에서 서쪽으로 3㎞쯤 떨어진 숲속의 큰 정자나무 밑에다 버리고 돌아왔다.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갖다 버리기는 하였으나 배처녀는 모정의 아픔을 걷잡지 못하고 남모르게 울기만 하였으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도 마음이 언짢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밤에 처녀의 어머니는 어린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남몰래 등불을 들고 숲속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아기는 한마리 학의 날개 속에 품겨 있었다. 그것을 보고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한편 다소나마 안심을 하고 그대로 되돌아 왔다. 그 이튿날도 배처녀의 어머니는 또 숲속에 가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몇마리의 학들이 나무밑에 모여 발로 땅에 우물을 파가지고 물을 머금어다가 아기에게 먹이기도 하고 다른 큰 학은 날개를 펴서 어린애를 품고 간간이 입으로 젖을 토하여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가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씨부인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참! 이상한 일인데 ......」 배() 씨도 부인의 말을 듣고 몸소 그 숲속으로 가보았다. 역시 학이 날개를 펴고 어린애를 품고 있는것이 아닌가! 참외를 먹고 수태하여 아이를 낳은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거니와 어린애를 내다버려도, 학이 보호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 그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닌 모양이오. 그러니 다시 데려다 기르는 것이 어떻겠오.」 배씨는 아내에게 아기를 기르자고 했다. 그러자 아내도, 「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첫째, 인생이 불쌍해서 안됐고, 둘째는 날 때부터 보통 다른 애들과 다른 데가 있어요. 내다 버려도 새가 와서 보호하는 것을 보아 아마 큰 사람이 태어난 것 같으니, 우리가 그대로 두었다간 천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저 애도 늘 슬퍼서 울고만 있으니 보기에 안되었구려......」 아내도 남편의 뜻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귀한 딸의 장래를 생각하면 아버지 없는 자식을 낳았으니 앞날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연히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는 수가 없을까 하고 의논해 보았다. 「 여보, 좋은 수가 있소. 당신이 어디 갔다 오다가 길에서 얻은 것처럼 데려와서 기르면 되지 않겠소 」「 참,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두 내오는 합의를 보았다.

이튿날 배씨부인은 일부러 능주에 있는 일갓집을 다녀오는 길에 짐짓 놀란 표정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동행하던 아낙네들에게 말했다. 「 저 소릴 좀 들어보오. 저기 정자나무 밑에서 어린애 우는 소리가 나질 않아요.」 아낙네들도 모두 한마디씩 떠들었다. 「 글쎄요, 어린애 소리군요.」「 어디 가 봅시다. 누가 이 숲에 어린애를 버렸는가 보오 」 배씨부인은 동행하던 부인과 함께 정자나무 밑으로 갔다. 거기에는 과연 전과 다름없이 학이 어린애를 품고 있었는데, 그들이 가까이 가자 어린애를 남겨둔 채 푸드득,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 에그머니! 이런 곳에 웬 아기가......?」「 정말 웬 어린애일까? 가엾어라. 쯔쯔......」 배씨부인은 달려가서 어린애를 안아들었다. 같이 갔던 부인들도 가엾이 여기며 어린애를 어르고 야단이었다. 「 참, 잘도 생겼네.」「 몹쓸 사람들도 다 있지. 누가 어린애를 나아서 이런데다 버렸을꼬?」 그들은 이렇게 주고 받으며 어린애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쯤되자 길에서 내버린 아기를 주워 왔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소문을 내었고, 그 소문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가듯 인근에 널리 퍼졌다. 이렇게 하여 배처녀가 내다 버렸던 어린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들은 정성껏 아기를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두 살이 되고, 세살이 되고......, 이렇게 자라 갈 수록 어린애는 얼굴이 뚜렷해지고 총명이 넘치니 배씨부부는 물론이고 배처녀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럭저럭 아이의 나이가 열살이 되었다. 어느날 그의 집에 스님이 찾아 왔다. 스님은 어린애를 보자 몹시 놀라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아이로군. 허나 애석한 일이다.」 이 말을 들은 배씨는 스님의 거동이 이상하여 「 무엇이 애석하느냐 」 하고 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뜻을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다가 자꾸만 따져 묻는 배씨부부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스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 아이를 댁에서 그냥 기르면 단명해서 열다섯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요, 그러나 내가 데려다 불공을 드리고 기르면 수명을 누릴 수 있소만......」 스님은 또 다시 애석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배씨는 그 말을 듣고 적지아니 놀라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스님에게 물었다. 「 오래 살고, 잘 되게 하시려면 그 애를 나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절에 데려다가 수양을 쌓게 하고 공부를 가르치면 후일 크게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그 아이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청했다. 배씨는 안에 들어가 가족들과 의논을 했다. 정리로 보아서는 차마 내주기가 어려웠으나 단명한다는 말과 후일 잘되게 해 준다는 말에 그들은 스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 길로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절로 떠났다. 이 스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시 유명한 대사인 보조국사였던 것이다. 보조국사는 그 아이를 열심히 가르쳤다.

워낙 총명한 재질이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통해 날로 달로 학식이 넓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슴에는 감각(感覺) 의 바탕이 숨어 있어 드디어 묘공(妙空) 의 법을 얻었으니 이가 바로 후일에 진각국사가 되신 분이었다. 진각국사(眞覺國師) 가 절에 온지 얼마 후 배씨부부(裵氏夫婦) 는 세상을 떠났고 진각국사 어머니 배처녀는 시집을 가지 않고 그대로 공구(空驅) 만 지키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화순의 만연산 성주암(聖住庵) 에는 몇 십년 전까지도 진각국사 영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 없고 다만 순천 송광사의 국사전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이요, 진각국사 어록(語錄) 등 여러 기록에서 좀 더 자세한 국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진각국사께서는 서기 1178(명종 8) ~ 1234(고종 21) 의 고려때 스님으로 속성(俗姓) 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 이며 호() 는 무의자(無衣子) () 는 영을(永乙) 이다. 나주속(羅州屬) 화순현인(和順縣人) 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부친은 휘(), 자는 완() 으로 되어 있으며 향공진사(鄕貢進士) 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께서는 배씨(裵氏) 였다. 꿈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번개 우뢰가 세번 치는 것을 보고 임신(姙娠) 이 되었는데 12개월만에 낳았고, 태포(胎胞) 가 몸을 감아 흡사 연() 잎과 스님의 예복인 가사와 같았다. 태어난지 7일 후에 눈을 떠 맑아졌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고 난 즉시 몸을 돌아 눕고 앉았다. 부모께서는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고 생계가 어려워 품팔이를 하려 할 때 어머니께서 꾸중을 하시며 글 공부를 권하였다. 항상 불경과 주문(呪文) 을 독송(讀頌) 하다 마침내 득력(得力) 하여 요사스런 무당과 음탕한 복자(卜者) 들을 물리치고 왕왕히 병자를 구하였으며 1201( 신종 4) 에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여 대학(大學) 에서 공부하다 어머님의 병환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의 친가이신 외종형(外從兄) 배광한(裵光漢) 씨 댁에서 어머님의 병환치료를 할 때 관불(觀佛) 삼매지경(三昧之境) 에 들어 성심껏 기도를 드리자 어머님 꿈에 제불(諸佛) 보살이 사방에서 나타나 보호하였다. 그 후 즉시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외종형 무부(外從兄 武富) 도 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님은 그 후 일년이 지나 돌아가셨다

그때 마침, 보조국사께서 조계산에 수선사(修禪寺) 를 새로 지어 도() 를 세상에 널리 펴고 있었는데 여기 수선사에 어머니의 제() 를 모셔 구천명도(救遷明途) 를 밝혀 드리고자 참례(參禮) 하여 지성껏 기도를 드렸다. 이날 밤, 그의 외숙(○) 은 꿈에 그녀가 승천(昇天) 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삭발하여 중이 될 것을 보조국사께 청하였는데 쾌히 허락을 하였다. 잔각께서 처음 국사를 뵈올 때 국사께서 보니 중이었는데 다시 보니 속인(俗人) 으로 보이었다. 먼저 꿈에 설매헌(薛梅軒) 선사께서 입원(入院)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상히 여겼는데 다음날 진각께서 찾아오니 더욱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찌기 오산(鰲山) 에 머무르면서 수도할 때 한 반석(盤石) 에 앉아 주야정진(晝夜精進) 에 매일 새벽 오경(五更) 의 계송이 십리밖에까지 들려 새벽시간을 계송과 목탁 소리로 마을 사람들이 짐작하였으며 또 지리산(智異山) 오대암(五臺庵) 에 자리하고 대상(臺上) 에서 정진 할 때, 적설(積雪) 이 목에까지 덮어 있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혹시 얼어 죽지 않았는지 흔들어 보면 숨을 쉬고 있었다고 한다. 용맹으로 정진한 각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생과 사, () 과 해() 를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어떻게 이 경지를 이르랴. 그 후 을축(乙丑) 의 가을에 보조국사께서 억보산(億寶山) 에 계실때 선문도화(禪文道話) 로 통하여 무의자제서도 대오(大吾) 의 경지에서 달관 함을 바르게 보시고 국사께서 깔깔 웃음으로 대소하시며, 무의자를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가 다시 모든 법을 밀전(密傳) 하시며, , 「 오기득여사무한의(吾旣得汝死無恨矣) ! (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 하시었다. 보조국사께서 국사의 자리를 물려 이어주시고 규봉암(圭峰庵= 무등산) 안주(安住) 하니 진각께서 굳이 사양하여 지리산으로 자취를 감춰 그림자까지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대안경오(大安庚午) 에 국사께서 입적(入寂) 하신 후, 부득이 그 자리를 받들게 되어 입원계당(入院啓堂) 하였는데 사방에서 도학일사(道學逸士) 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고 팔도의 귀족, 공경(公卿) 들이 모두 큰 스님의 도풍(道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그 외에도 많다. 고종께서 선사(禪師) 로 재수(除授) 하였고 그 후 다시 대선사(大禪師) 로 재수되었다. 그 후 기묘년(己卯年) 에 단속사 주지(斷俗寺 主持) 를 하였다. 여러차례 사양하여 그 이듬해 송광사(松廣寺) 로 돌아왔다. 그 후로 항상 송광사를 자기 처소로 삼았다고 한다. 계사(癸巳) 11월에 병으로 눕게 되니 고종께서 들으시고 즉시 어의(御醫) 를 보내 치료(治療) 케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월등사(月燈寺) 에서 정양을 하였으나 선사께서 몸이 더욱 통심(痛甚) 하니 이에 계왈(偈曰), 중고부도처( 衆苦不到處) 별유일건곤( 別有一乾坤) 차문시하처( 借問是何處) 대적열반문( 大寂涅槃門) ( 중생의 고통이 이르지 못한 곳에 별유( 別有) 의 천지( 天地 ) 가 있네 묻건데 이곳은 다름아닌 깨달아 찾아가는 문일러라.) 라고 하였다. 「 이 늙은 몸 금일로 고통을 잊으리라. 」 고 말씀하시며 선사께서는 미소지으며 가부좌로 열반(涅槃) 에 드셨으니 갑오(甲午) 유월 이십 육일이었다. 이십칠일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峰) 의 다비식(多毘式) 에서 영골(靈骨) 을 모시어 본산으로 돌아왔다.

고종(高宗) 께서 들으시고 심히 슬퍼하시며 진각국사(眞覺國師) 라는 시호(諡號) 를 내리셨다. 을미년(乙未年) 중엽(中葉) 송광사의 북쪽에 부도(浮屠) 를 세워 고종께서 사액(賜額) 하시되 원소지탑(圓昭之塔) 이라 하셨다. 향수(享壽) 는 오십칠세요, 법랍(法臘) 삼십이세이다. 국사께서 질병을 얻으시자. 계시던 곳에 홀연(忽然) 바위가 무너지면서 굴러 떨어져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참새떼들이 이 골짜기에 찾아들어 하늘을 가릴 듯이 많이 모여 십여일을 슬피 울었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사는 평생을 통하여 신이(神異) 한 이적(異蹟) 이 많았으니 거북이가 계() 를 받고 두꺼비가 설법을 들었으며 작오(雀烏) 는 합주(合奏) 를 하였고 특히 선사께서 지나가면 소가 길가에서 무릎을 꿇고 일어서지 않고 있다가 지나간 뒤에 일어서는 이적등은 모두 어록에 전하는 사실로서 옛 사람들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선문(禪門) 의 정안(定眼) 이며 육신(肉身) 은 대보살이었다고 높이 찬() 하였다. 이 글은 당시 명세적(鳴世的) 인 문장(文章) 이규보(李奎報) 의 찬으로 되었던 진각국사(眞覺國師) 비문내용(碑文內容) 을 요약한 것이다. 이 비는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에 세워졌으나 그 후 병란(兵亂) 으로 결손(缺損) 되어 모두 읽을 수 없어 동국(東國) 이상국집(李相國集) 의 소재(所載) 을 옮겼다.

전후의 글을 보더라도 아버지의 성은 최 () 씨 였으며 모성(母姓) 이 배씨(裵氏) 였음은 틀림 없고 아버지의 성명(姓名) 까지 밝혔던 것으로 보아 최씨집으로 출가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학서도(鶴捿島) 에 천년 묵은 노목(老木) 이 있었는데 삼사십년전, 1927년 정묘(丁卯) 정월 2일 오후 8시쯤 목동(牧童) 김백만(金栢萬)의 실화 (失火) 로 소진(燒盡) 되었다고 한다. 수령(樹齡) 은 약 천년쯤 되고 직경(直徑) 3미터 둘레가 9미터 쯤 되는 거목(巨木) 이 천년의 역사를 산 증물(證物) 로 서 있었는데 이제는 진각국사(眞覺國師) 의 기이하고 신통하며 위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흔적을 감추고만 셈이다. 또한 자치샘 물마저 이제는 먹을 수도 없게 되어 쓸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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