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준한 산으로 둘러쌓인 양산마을은 평화롭기만 했다.기름진 농토가 넓게 펼쳐있고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은 이 마을의 풍요를 대변하고 있었다. 천성이 부지런한 양산마을 사람들은 천혜의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가며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먹을것 넉넉하고 인심 후하고 산수가 수려하니 모두가 좋은 것 뿐이었다. 산수좋은 고장은 예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고 미인이 많다는 얘기가 있다.그래서 인지 이 마을 쳐녀들은 모두 양귀비였다.이웃 마을 총각들이 이 동네 쳐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을 하는 이유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험준한 산은 산세가 너무 험악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아무도 이 산을 넘어 본 사람이 없었다.마을 사람들은 산에 대한 지식과 산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무지할 뿐이었다. 이 마을에서 다른 마을을 잇는 유일한 길은 동쪽으로 빠끔히 뚫려 있는 길 뿐이었다. 이 길을 따라 수십리를 걸어가면 넓은 들이 나타나고, 이 들을 건너가면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양산마을을 신비스러운 별천지로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양산마을과는 왕래가 별로 없어서 양산마을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만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산마을 사람들의 외부와의 접촉도 그렇게 잦은게 아니었다.모든 생활필수품은 거의가 자체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는 일은 공산품 구입을 위하여 수십리 떨어진 읍내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외부와 단절된 양산마을이었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줄잡아 100여 가구가 되는 인구, 거기에 넉넉한 식량과 자연환경이 좋았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 믿고 단결하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져 그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의 마을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젊은이들의 결혼도 거의가 한 동네에서 성씨가 다른 사람들끼리 이루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모두가 친척과 사돈으로 맺어져 있어 앞으로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혼인을 맺어야 할 실정이었다. 다시 양산마을의 뒷산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야겠다. 이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잇는 길은 동쪽으로 빠끔이 뚫려 있는 길이 유일한 길이었는데, 길 옆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어져 있어 이 양산마을은 호수와 같은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에 이 마을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뒷산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 없이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일고 있었다.그것은 뒷산에 대한 의구심과 호기심, 그리고 신비스러움이 섞인 괴상한 말들이었다. “뒷산에 산신령이 살고 있대.” “산신령이 천년 묵은 이무기라면서?” “이무기가 아니라 호랑이라던데.” “아니야, 여우래.천년 묵은 여우래.” 여인들이 두 세명만 모이면 뒷산에 대한 소문이 말에 말을 얹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여인네들 뿐만아니라 사랑방에 모인 남정네들도 이 같은 소문에 호기심이 일었다. “여우가 도술을 부려 사람으로 변한다는데 참말일까?” “아따, 이사람, 누가 보았대? 그런 엉터리 소문을 믿고 있나?” “아니야, 호랑이고 여우고 오래 묵으면 이상한 짓을 한다잖나., 누구드라, 옳지, 범이 아버지도 밤늦게 뒷간에 갔다가 여우에게 홀려 밤새 논배미에서 헤매다가 날이 샜다지 않던가? 헛 소문이 아닐지 몰라.” 이러한 소문이 쉴사이 없이 퍼지고 있던 어느 날, 그 소문이 사실인 것을 뒷받침 하듯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가 없어졌대!” “소가? 누구네 소가?” “돌쇠네 것이래.” “어쩌다가?” “모르지, 외앙간에 피가 흘렀는데, 그 피가 뒷산쪽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거야.” “그렇담, 사람의 짓이 아니잖아.” “사람이 어떻게 소를 산으로 가져갈 수 있겠나.” 그러나 이 마을의 소는 돌쇠네 소 뿐만아니라 자고 나면 한 마리씩 오간데없이 사라지고 있었다.그것도 큰 소만을 골라 가져가고 있어서 농사철이 돌아오는 봄철이 되자 농사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하지만 그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소가 없어지는 까닭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소문대로라면 산에 요괴가 있어 짐승을 잡아간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굉장한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불안과 공포 속에서 편안한 날이 없었다.밤만되면 외출을 삼가고 문을 잠그고 숨어 살듯 하였지만 날이 새면 으례히 소 한 마리가 없어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이제는 밤이 두렵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양산 마을에는 소가 거의 없어졌고, 텅빈 외양간에는 섬찍한 살기만 감돌고 있었다. 이러다간 동네가 폐동이 되겠어.” “누가 아니래, 이러고만 있지 말고 대책을 세워야 해.” “대책을 어떻게 세운다지?” “젊은 청년들을 모아 방위대를 조직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는게 좋겠어.” 다음 날, 이 마을 젊은이들은 모두 촌장 집으로 모여 괴물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조를 짜서 밤새 횃불을 밝히며 감시하기로 했다. “무기가 있어야 해.” “칼과 활을 만들자.” “창과 방패도 필요해.” 키고, 낮이면 칼쓰는 법과 활쏘는 법을 익히는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충천한 사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가 없어지는 사건은 여전히 계속됐다.횃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시퍼런 칼날을 번득이며 보초를 서고 있는데도 요괴는 어느틈에 어디론가 나타나 소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거, 헛수고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런것 같아, 우리의 힘으로는 막을 길이 없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나도 모르겠어.” 마을 사람들은 맥이 풀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밤, 이 날 밤도 동네 청년들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전처럼 망을 보기로 하고 횃불을 준비하여 곳곳에 불을 밝히면서 감시하고 있었다.그러다 밤이 이슥할 때였다.망을 보던 한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모두의 눈이 그 쪽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괴상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척장신인 거구의 한 장수가 갑옷을 입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새가 나르듯 훌쩍 마을로 날아오더니, 한 집의 외양간에서 소 한마리를 번쩍 들고 다시 산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저건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분명 사람이지?” “사람이야!”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의 상이야” “번개처럼 날쌔구먼!” “그러나 저러나 저렇게 훌륭한 장군이 어떻게 소도둑이 됐을까?” “모를 일이야!” 뜻하지 않은 소도둑이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데에 마을 사람들은 실망이 더 컸으며, 도둑에 대한 궁금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시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 도둑은 산적이 틀림없소.” “무술이 뛰어난 산적일 것이요.” “우리도 무술을 더 닦아야 하오.” “그러나 그 날쌘 무사를 어느 재주로 당하겠소.” “그렇다고 그냥 앉아있으려오? 뭉칩시다.싸웁시다.” 젊은이들은 적이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정체가 밝혀진 이상 전보다는 마음의 여유와 용기가 더했으며, 모두가 뭉치면 능히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하지만 젊은이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아무리 철통같은 감시를 해도 어느 사이에 왔다 갔는지 감쪽같았다.매일 훈련을 하고 대장간에서 만들어 놓은 칼과 창, 활이 있지만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그러는 사이에 이 마을에는 소가 점점 줄어 들었고 씨가 마를 판이었다.처음에는 큰 소만 가져가더니 나중에는 송아지까지 마구 잡아가는 것이었다. 수난을 당하는 것은 소뿐만 아니었다.소가 거의 없어지자 이번에는 닭이며 돼지며 집짐승 모두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동네가 망하겠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해.” 사람들은 마을을 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도저히 무서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 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 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그것은 사람이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여자 중에도 처녀가 매일밤 한 사람씩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밤이 무서웠다.자고 나면 밤사이에 처녀 한 사람이 없어지는 이 괴이한 사건은 온 동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분이가 없어졌어.” “벌써 세 사람째가 아닌가.” “이 동네를 떠나야 해.” 사람들은 이 동네를 떠날 결심을 하였고, 이주할 채비도 서두르고 있었다. 한편, 양지바른 윗쪽에는 곱단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곱단이는 이름 그대로 곱지않은 구석이 없었다.마음이 곱고 얼굴이 곱고 살결이 곱고 모두가 고운것 뿐이었다. 곱단이 과년하여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곱단이에게는 아랫마을 에 용범이라는 사랑하는 청년이 있었고, 장래를 약속한 사이었다.용범이라는 청년도 그 이름처럼 용처럼 날렵하고 호랑이처럼 용감하여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용범이도 곱단이처럼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듣는 젊은이었다. 근면하고 성실하며 건장한 용범은 이 마을의 으뜸 청년으로 마을 청년들을 이끌어갈만큼 통솔력도 있었다.용범과 곱단의 사랑은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금년 가을 결혼식을 성대히 치룰 것이라며 국수먹기를 벼르고 있는 처지였다.그런데 호사다마라 했던가.갑자기 곱단이 괴물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그 누구보다도 용범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이놈의 괴물, 내손으로 처치하고 말겠다.” 다음 날 용범은 등에 활을 메고 긴 칼을 차고 뒷산을 향해 올라갔다.그러나 산을 오르기에는 힘이 벅찼다.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솔포기와 나무뿌리를 잡고 의지하며 산을 오르는 용범의 온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손과 발에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그렇다고 그대로 포기할 용범이 아니었다.사랑하는 곱단이 지금 저 산속에서 무슨 변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그일을 생각하면 용범의 분노가 한없이 끓어 올랐다.미끄러져 떨어질뻔한 위험한 순간들을 여러번 겪으며 용범은 드디어 절벽을 오르는데 성공했다. 날이 샐 무렵부터 오르기 시작했는데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 있을 때쯤에야 절벽의 정상에 올랐고, 용범은 어떤 승리감으로 잠시 곱단을 잊기도 했다.용범은 산을 살펴 보았다.처음 보는 뒷산은 수목이 울창하였고, 끝없이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않은 원시림처럼 빽빽한 숲은 길이 하나도 뚫리지 않아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분간하기 힘들었다.금방이라도 사나운 짐승이 뛰어나올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마져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가야만 하는 것이었다.산속 깊이 들어가면 필경 어떤 미지의 세계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곱단이가 있을 것이라는 신념도 생겼다.그는 성큼성큼 숲속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갈 수록 산림은 무성하여 사람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용범은 등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그리고는 나뭇가지를 자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얼마쯤 그렇게 했을까, 날이 어두운 것을 보면 몇 시간 그렇게 숲과 싸운 모양이었다.용범은 날이 어두워 더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용범은 꿈을 꾸었다.긴 수염을 날리는 노인이 꿈에 나타나더니 용범에게 말했다. “지금 너의 행동은 무모한 짓이다.그 괴물은 무서운 괴물이니 되돌아 가도록 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기어히 괴물을 잡아 곱단이를 구하고 마을의 평화도 되찾아야 합니다.노인장! 노인장께서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 좀 도와주십시오.” 노인은 비장한 각오를 한 용범의 눈빛을 읽고 감동한 듯이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길을 잘못 들었다.내일 날이 밝거든 오른쪽으로 열 걸음만 걸어가거라.그러면 괴물이 다니는 길이 있을 것이다.그 길을 따라 가면 괴물이 사는 굴이 있느니라.” “노인장, 고맙습니다.” 용범이 머리를 조아려 노인에게 절을 하고 일어나 보니 노인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용범이 꿈에서 깨어나니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다.용범은 일어나서 노인이 말한 대로 오른 쪽으로 열보를 걸어갔다.과연 노인의 말대로 거기에는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만한 길이 빠끔이 뚫려 있었다.꿈 속에 나타난 노인이 누구였는지 용범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어쩌면 그 노인은 이 산의 산신령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용범은 정신없이 걸었다.그러다가 깜짝 놀라 발길을 멈췄다.나뭇가지에 곱단이의 옷고름이 하나 걸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 올 줄 알고 곱단은 옷고름으로 표를 한 거야.” 용범은 용기가 백배하여 지칠 줄 모르고 뛰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 곱단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면서 곱단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리는 듯 했다. 얼마쯤 그렇게 뛰어갔을까.갑자기 길이 막히면서 앞에 큼직한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보기만 하여도 굉장히 크다고 생각되는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옳지, 이 동굴 속에 괴물이 살고 있구나.” 용범은 주위를 살피며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런데 그때 동굴이 떠나갈 듯이 소리친 것은 사나운 범이었다.그런데 그 범이 내지르는 소리는 호랑이의 소리가 아니고 사람의 말이라는데 용범은 놀랬다. “웬 놈이냐?” 호랑이가 다시 한 번 소리치자 용범은 정신을 가다듬고 호랑이를 노려봤다.호랑이의 눈은 살기에 차 있었다.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용범을 덮칠 것 같은 기세였다.용범은 위기를 느꼈다.한 치의 헛점만 보여도 호랑이가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범은 손을 뻗어 옆구리에 찬 장검을 뽑으며『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격언을 생각했다. “그렇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 그의 손은 어느 새 장검을 뽑아들고 있었다.어두운 굴 속에서도 번쩍번쩍 빛을 뿜었다.이 장검은 양산마을에 괴물이 나타난 이후 용범의 손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았고, 용범이 무술을 연마한 보검이었다.아직 이 칼로 전쟁을 해보았다거나 괴물과 싸운 경험은 없지만 용범의 무술은 호랑이 하나쯤은 처치할 만한 칼 솜씨를 지니고 있는 터였다. 호랑이가 다시 소리쳤다. “웬 놈이냐고 묻지 않느냐? 그리고 이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물러 가거라호랑이의 유창한 사람말을 따질 겨를이 없는 용범이었다.그는 잔뜩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대꾸하고 있었다. “양산마을에서 온 용범이다.이 동굴 속에 곱단아씨를 잡아온 괴물이 살고 있지? 나는 그 곱단아씨를 구하러 왔다.길을 비켜라.” “가소로운 놈, 우리 대왕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냐? 우리 대왕의 일을 방해하는 놈은 아무도 용서할 수 없다.” 말을 마친 호랑이가 달려들었다.용범은 잽싸게 비켜서며 칼을 휘둘렀다.그러나 쉽게 칼에 맞을 호랑이가 아니었다.호랑이 역시 번개처럼 날렵했다. 용범과 호랑이의 싸움은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몇 시간을 그렇게 싸웠는지 모른다.모두 지쳐 있었다.용범의 등줄기와 이마에서는 쉴 사이 없이 땀이 흘렀다.점점 기력이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갑자기 용범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에잇!” 그리고는 칼소리가 사납게 스쳐갔다. “호랑이가 쓰러지는 소리가 동굴 안을 흔들었다.용범이 이긴 것이었다.한바탕 전쟁이 스쳐간 동굴 안은 고요가 흘렀다.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현기증이 일어 났다.용범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얼마쯤 주저앉아 쉬고 있던 용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칼과 활이 제 위치에 있는가 등과 허리를 만지며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몇 걸음을 옮기던 용범은 쓰러져 있는 호랑이를 돌아 보았다.싸울 때는 호랑이가 얼마나 큰 놈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상관하지 않았으나 호랑이를 쓰러뜨리고 나니 호랑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났던 것이다.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호랑이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호랑이는 간곳이 없고, 하얀 털을 가진 마르고 늙은 여우 한마리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용범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그래서 눈을 씻고 다시 들여다 보았으나 거기에는 여우가 쓰러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참으로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었다.분명히 싸울 때도 호랑이었고, 또 사람말로 호통치던 그 우람한 소리도 호랑이의 소리였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여우가 죽어있었던 것이다. 용범은 수수께끼 같은 이 사건에 마음속으로 혼란을 느끼며 굴 속을 향하여 걸어들어 갔다.굴 속은 어두웠다.겨우 앞을 가릴만큼 희미한 빛이 흐르고 있었으나 구름이 달을 가린 밤처럼 스산했다.주위에서는 이따금 박쥐가 날고 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마져 들려 용범을 긴장시켰다. 그렇게 가기를 몇 시간, 갑자기 앞이 환하게 트이면서 햇빛이 확 들어왔다.오랫만에 보는 찬란한 햇빛은 용범의 눈을 부시게 했고 현기증을 일으켜 비틀거리게 했다.싱그러운 바람이 확 풍겨왔고 향긋한 향기마져 코끝을 스쳤다. 용범은 눈을 부비며 앞을 바라 보았다.눈 앞에는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푸른 초원이 한 없이 이어져 있었고, 숲과 강물도 보였다.여기 저기 보지못했던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고, 처음 듣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도 새로운 것이었다.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이 별천지를 넋을 읽고 바라보던 용범이었지만, 곱단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어 아름다운 풍경도 잠시 눈요기에 불과했고, 다시 자기의 할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가야 하지, 물어 볼 사람도 없지 않나.” 용범은 난감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무작정 앞으로 가고 싶었으나 바로 눈 앞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있어 건너갈 수가 없었다.언뜻 보기에도 물살이 사납고 깊고 넓어 도저히 헤엄쳐 건너가기 힘든 강이었다. 초조한 용범이 강가를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는데, 강 건너에서 쪽배 하나가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쪽배에는 젊은 청년이 노를 젓고 있었는데, 사공은 용범을 보자 배를 그 앞에 멈추면서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손님이시오.” “, 나는 양산지마을에 사는 사람인데 괴물을 쫓아 여기까지 왔으나, 강을 건널 배가 없어 이렇게 난감하게 서 있다오.” “괴물이라, 그래 그 괴물이 사는 곳을 알고 있소?” “모르지요.굴 속에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굴을 지나고나니 이처럼 처음보는 세상이 있구려.” “그 괴물이 사는 곳을 내가 알고 있지요.” “그래요? 그게 어딥니까?” “이 강을 건너가면 큰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은 꽃으로 장식된 길이라오.그 길을 끝까지 가면 궁궐같은 집이 나올 것이요. 바로 그 집이 괴물의 집이라오.”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런데 물이 깊어 건너갈 수가 없으니 그 배를 타고 갈 수는 없을는지요?” “좋습니다.내가 강 건너까지 모셔다 드릴터이니 타시지요.” 용범은 뜻밖의 사람을 만나 쉽게 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이 기뻐서 하늘이 자기를 돕는 것이라 생각하며 배에 올랐다. 강물은 잔잔했으나 강 중간쯤 이르니 물살이 거세지고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하지만 용범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산에 오르고, 호랑이와도 싸우느라 지쳐 있었다.그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배 고물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배가 갑자기 요동했다.파도가 뱃전에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물보라는 배 위로 튀어 올라와 갑판을 흥건히 적시곤 했다.용범은 위험을 느꼈다.배가 전복되기 전에 탈출할 생각을 했으나, 곧 물살이 너무 세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았다. 용범은 사공을 보았다 그러나 사공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초조한 빛도 없이 태연히 앉아서 흔들리는 배를 마치 파도 타기라도 하듯 즐기는 모습이었다.이러한 사공의 태도가 용범은 얄미웠다. “여보시오. 배가 전복하려 하는데 사공이 그렇게 태연히 앉아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이 소리에 사공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그 웃음소리는 소름이 끼칠만큼 징그럽게 들렸다. “네 이놈, 내가 누군줄 아느냐? 나는 천년 묵은 여우다!” 이렇게 말한 사공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가 했더니 그의 몸은 어느새 여우로 변해 있었다.그와 동시에 배는 전복되고 말았다.여우의 간괴에 말려든 것이었다. 파도에 밀린 용범이 기절한 상태에서 정신이 들어 눈을 떠 보니 강변에 누워 있었다.죽지않고 살아난 것이었다.그는 부시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렇게 사납던 강물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햇살이 비친 물결은 눈부셨고 그 위로 나르는 물새의 노래 소리가 고왔다. “천년 묵은 여우라고 했지, 그렇다면 곱단을 납치한 괴물도 요사스런 그 여우가 틀림없어.그러나 나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는다.내 사랑 곱단이를 찾을 것이다.” 용범은 강을 따라 올라갔다.여우가 일러 준 큰 길이 나타날 때까지 위로 올라갔다.얼마쯤 갔을까, 과연 숲 속으로 넓게 뚫린 길이 나타났다.이 길을 따라가면 괴물이 살고 있는 집이 나타난다고 했다. 어째서 여우가 이 길을 쉽게 가르쳐 주었을까, 그것은 용범이 물속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용범은 천우신조로 이렇게 살아났던 r것이다. 용범은 길을 따라 걸었다.길가에는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많이 열려 있었다.열매를 보자 시장끼가 밀려 들었다.그는 손을 뻗어 열매를 땄다. “혹시 독이 든 것은 아닐까?” 그는 의심도 해 보았지만 워낙 배가 고픈 그에게 그런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갔다.그 동안 그는 풀뿌리와 나무 열매로 연명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다행이도 그 열매에는 독이 없었다.정신없이 열매를 따 먹은 용범은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풀숲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그는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다.하긴 용범이 양산마을을 떠나 이곳 이상한 동네로 오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해가 지고 낮과 밤이 뚜렷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시간의 개념마져 잊게 마련이었다. 얼마쯤 잤을까.용범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걸었다.길 양쪽의 나무숲에서 산새의 노래가 들려왔다.그 산새소리 역시 용범으로서는 생소한 것이었다.양산마을에서 듣던 그런 산새소리가 아니었다. 모두가 낯설고 모두가 생소하며 모두가 신비롭기만 한, 이 이상한 동네는 도대체 누가 사는 마을인가.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용범의 앞에 대궐같은 집이 나타났다.그 집은 집이라기 보다 옛 동화 속에 나오는 궁궐같은 집이었다. 용범은 발을 멈추고 이 장엄한 대궐에 넋을 잃고 멍청히 서 있었다.어쩌면 이집은 괴물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면 어느 신선이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 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대문이 열리더니 몸집이 거대하고 키가 구척인 장수가 말을 타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그 뒤로 수십명의 군졸이 따르는데 그 위용이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용맹이 천하를 삼킬만 했다. 용범은 잽싸게 몸을 나무 뒤에 숨겼다.그리고 이 뜻하지 않은 군병들의 출현에 가슴 조이며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부터 사냥을 나간다.오늘은 인가에 내려가 많은 가축을 도륙하여 오도록 한다.” 말을 탄 장수의 위엄있는 소리에 졸병들은 머리를 숙여 그 명령에 따르겠다는 복종의 표시를 했다. 용범은 대장의 하는 말 가운데 인간마을에 내려간다는 대목에 서 번뜩 집히는 예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괴물이 사는 집이 분명하다.저 장수는 사람이 아닌 요괴가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용범은 등골이 오싹했고 식은땀이 등에서 흘러 내렸다.정신을 바싹 차려야지 잘못하다가는 큰 일을 만날 것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네 이년, 내가 사냥을 해 올 동안 잘 생각하기 바란다.만일 이번에 돌아와서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굴 속에서 죽게 될것이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대장의 노기띤 고함소리에 용범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쪽을 바라 보았다.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거기 대문 뒷쪽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용범이 찾아 헤맨 그 사랑의 얼굴이 고개를 숙인채 험상한 대장의 협박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용범은 가슴이 갈래갈래 찢어지고 있었다.불같은 것이 가슴 한복판에서 목구멍으로 치솟고 있었다.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어나가 저 요물을 단칼에 요절을 내고 곱단을 구하고 싶었으나 지금 섣불리 굴다가는 일을 그르칠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을 삭이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대장이 곱단을 향하여 다시 소리치자 곱단의 머리는 땅으로 더 향하고 있었다. “사흘이다.사흘 동안 네가 맘 고쳐먹으면 호강을 하며 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더 이상 봐 줄 수 없으니 그리 알아라.” 대장은 그런 말을 남기고 졸개들을 데리고 우루루 용범이 오던 길을 따라 나갔다.그렇다면 저 요물이 곱단을 데려다가 욕정을 채우려 했으나 곱단이 그 동안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제 최후통첩으로 사흘 동안의 사냥에서 돌아와 결판을 내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용범은 어떤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그것은 아직 곱단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것과, 곱단이 죽기를 각오하고 요괴와 싸워왔다는 그 용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터져나오는 긴 호흡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저 집안으로 들어가 곱단을 데리고 나오는가 하는 것이 지금 용범에게 큰 과제였다. 지금 집안에 곱단이 말고 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고 굳게 닫힌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가느냐 하는 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아득히 높아 담을 뛰어 넘기도 불가능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용범은 우선 집안의 동정을 살피기로 하고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용범은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집안은 사람의 자취는 하나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넓은 뜰에는 갖가지 꽃나무와 정원수가 들어서 있었고, 알 수 없는 과일나무에는 탐스럽게 익은 과일들이 열려 있었다. 무릉도원이란 말은 들어보았지만, 지금 이 집안 정원이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용범이 어떻게 하면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을까 궁리를 하며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소스라쳐 돌아다보니 한 군졸이 용범의 수상한 짓에 시비를 걸어왔다. “웬 놈이 남의 집을 엿보느냐?” 군졸은 용범의 대답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어느새 칼을 뽑아 들고 용범의 목을 노렸다.참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그러나 용범의 날랜 몸짓은 군졸의 칼을 피했다.그리고는 그의 손에도 어느 틈엔가 칼이 들려져 있었다. “보아하니 네놈은 사람이 분명한데,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왔느냐?” 졸병은 식식거리며 용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칼솜씨가 범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용범도 칼을 휘둘렀다. “쟁강, 쟁강조용하던 대문 앞이 칼소리로 소란해졌다.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그동안 용범은 곱단을 찾기 위하여 피나는 무술을 연마하였다.웬만한 무사가 당할 수 없는 무예를 닦은 용범이었기에 지금 이 이상한 탈을 쓴 졸병과도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칼싸움은 몇시간을 두고 계속됐으나, 두 사람 모두 기진한 상태로 끝이 날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 용범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다리에 힘이 빠지고, 칼을 든 손은 땀이 배어 흐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며 힘을 내려 애썼지만 용범은 점점 눈앞이 캄캄하고 현기증을 느꼈다.비실비실 뒤로 밀리던 용범은 `이제 그만이구나' 하며 병졸의 칼이 사정없이 내려쳐지는 환각을 느끼며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건방진 놈, 감히 나에게 대들어.” 병졸의 눈에 갑자기 살기가 등등해지더니 용범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용범은 체념했다.그러나 분하고 억울했다.여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와 그를 구하려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처참한 현실이 서글펐다.그 보다도 조금전 곱단의 얼굴을 보지 않았던가, 수척하여 여위었던 그 얼굴, 괴물의 협박에 눈물 흘리던 사랑하는 사람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죽어가다니 참으로 분했다. 용범은 눈을 감았다.그리고 죽음을 기다렸다.그러나 그 때, 병졸을 향해 날아든 비수가 있었다. “내 칼을 받아라!”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소리와 함께 날아든 비수는 병졸의 가슴을 파고 들었고 살기 등등하던 그는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그리고는 하얀 여우로 변하는 것이었다. 비수를 날린 사람은 곱단이었다.안에 있던 곱단이 문밖이 소란하여 나와 보니 용범이 여우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용범이 점점 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곱단은 정신없이 방으로 들어가 방에 있던 비수 한 자루를 들고 나와 여우를 향하여 힘껏 던졌던 것이다. 평소 칼이라고는 부엌일할 때 만져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곱단은 온 힘을 다하여 칼을 던졌던 것이다.그것은 곱단의 힘이라기 보다도 사랑의 힘이었다. “용범씨!” “곱단이!” 얼싸안은 그들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었다.그들의 만남은 꿈꾸듯 상상도 못할 커다란 사건이었다. 한참 후, 곱단이 말했다.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없어요.조금 있으면 다른 여우가 이 집을 감시하기 위하여 순찰을 돌 것입니다.그놈에게 들키면 큰일납니다.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들은 방으로 들어갔다.방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호화로웠다.벽은 금으로 장식돼 있었고, 바닥은 붉은 양탄자를 깔았으며, 침구 역시 용범에게는 처음보는 보료였다. 용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방은 누구의 방이요?” “내가 이곳에 온 후 혼자 사용하던 방이예요.” 그러나 용범이 가장 궁금한 것은 곱단이 그 동안 어떻게 이곳까지 왔으며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소?” “알고 있어요.나에 대한 그동안의 행적?” “들려주시오.” 곱단은 지금까지 지내온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 주었다. 곱단이 잡혀오던 그날따라 곱단은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결혼을 앞두고 흔히 겪는 쳐녀들의 심란한 마음 그것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며 공상에 젖어 있던 곱단은 이상한 인기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인기척은 바로 눈앞의 방문 앞이었고, 언뜻 그림자가 문을 스치고 지나갔다.불길한 생각에 곱단은 머리카락이 솟는 것 같았다. “누구요?” 그러나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들어선 시커먼 물체는 곱단을 번쩍 안아 큰 자루라 생각되는 곳에 담아 휭하니 대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자루 속에 있던 곱단은 기절하였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알 수 없는 어떤 집에 와 있었고, 그의 앞에는 건장한 군복차림의 장군이 버티고 서 있었으며, 그를 옹위하는 수 십명의 병졸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하하,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나.아무 걱정말고, 이 방에서 쉬고 있거라.네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이말을 남기고 그는 병졸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곱단은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병졸이 날라온 이상한 죽을 몇 모금 마셨다. 그런데 하루쯤 지난 뒤였을까? 이곳에는 해가 뜨고 지는 법이 없어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하여 하루쯤 지났을 때, 장군이 곱단의 방으로 들어서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잡아 온 처녀들 보다 네가 제일 예쁘구나.내 마음에 쏙 들었으니 나와 결혼을 해야 한다.” 이 소리에 곱단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무슨 말로든지 변명을 해야겠다 싶어 자기는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이 험상궂은 장군은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우겼다. “정혼한 남자가 있다구? 그야 있을 수도 있지하지만 너는 다시 인간세상에 나갈 수 없는 몸이야.정혼한 남자두 이제는 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발 저를 양산마을에 데려다 주세요.” “이런 법이 어디 있냐구? 바로 여기 있지.그러니 너는 모든 것을 단념하구 내 색시가 되는거야.” 이런 말을 남기고 장군은 밖으로 나갔다.곱단은 이제 영 글렀구나 싶어 자살을 생각했다.아무래도 자기는 이 소굴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곱단이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여러 개의 단검들이 걸려 있었다.그 칼이 눈에 띄자 곱단은 자살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칼을 들어 자결하려 하니 양산마을이 눈앞에 어리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혼자 계신 어머니, 그리고 용범이,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했다. “행여 하늘이 도울지도 모른다.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을 때까지 기회를 엿보자.” 곱단은 요행을 바라며 죽음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얼마후 장군이 다시 들어와 자못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의 준비가 됐느냐?” “장군, 며칠만 참아 주십시오.앞으로 열흘 있으면 저의 아버님 제사입니다.혼자라도 아버님 제사를 모신 다음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열흘이라? 좋아, 내 그 때까지 참지.” “그런데 이곳은 해가 뜨고 지는 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열흘을 헤일 수 있겠습니까?” “옳아, 그렇지.이 마을에는 햇빛처럼 빛나는 광석이 산 허리에 박혀 있거든.그래서 밤낮 환하게 밝은데, 밤이 되면 내 그 광 석을 가리어 줄테니, 너는 오늘부터 열흘이 되거든 내게 말해라.그래야 제사상을 차리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여 곱단은 열흘이라는 유예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 만일 그 때까지도 탈출할 기회가 없으면 죽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열흘이 바로 내일이며, 이제 죽음만이 남아 있는데, 용범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장군이란 자는 누구요?” “천년 묵은 여우랍니다.” “여우?” “자기 입으로 자기의 정체를 밝혔는데, 도술이 어찌나 신통한지 아무도 당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놈을 어떻게 처치하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오늘 밤, 여우는 아버님 제사일로 내 방에 들어올 것입니다. 내가 술을 많이 먹여 잠을 재울터이니 그 때 용범씨가 그놈의 목을 베십시요.” “그거 좋은 방법이구먼!” “그러나, 그 일에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어째서?” “여우는 잠을 잘 때, 갑옷과 투구를 모두 입고 잠을 잔답니다.그 갑옷은 어느 칼에도 뚫리지 않는 답니다.” “그럼, 목을 베면 되지 않소?” “바로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여우의 목은 황금 비늘로 싸여 있는데, 그 비늘을 베는 칼도 없다고 합니다.다만, 여우가 잠을 자며 숨을 들이쉴 때는 비늘이 일어서고, 숨을 내쉴 때는 비늘이 목을 감싼다고 합니다.바로 비늘이 일어설 때 용범씨가 칼을 들어 목을 베십시요.그러나 만에하나 실수하는 날에는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용범은 다락에 숨어 여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얼마 후, 밖에서 큰 발소리가 들리더니 여우의 그 거구가 곱단의 방으로 들어 섰다.곱단은 여우를 맞아 갖은 애교를 부려 여우의 마음을 산다음 여우에게 술을 권했다. “네가 마음을 고쳐 먹은 모양이구나.그런데 어디서 사람 냄새가 나지?” “사람 냄새는 내게서 나는 것이지요.이방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답니다.” 술에 취한 여우가 잠이들자, 곱단은 용범을 다락에서 나오게 했다. “실수하면 큰일 입니다.비늘이 일어설 때 칼을 써야 합니다.알았지요?” 그러면서 곱단은 부엌에 나가 아궁이에서 재를 한 소쿠리 담아왔다. “재는 왜?” “쓸데가 있습니다.” 용범은 칼을 잡고 기회를 엿보았다.그 때 여우가 숨을 들이쉬자 비늘이 위로 올라갔다.이 때다! 용범의 기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에잇!” 그와 동시에 용범의 칼은 여우의 목에 날아들었고, 여우의 목은 뎅그렁 잘리고 말았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잘린 목은 천정으로 튀어 오르고, 몸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네 이놈, 감히 내 목을 자르다니.그냥 놔두지 않을테다.” 그러면서 천정에 있던 목이 날아와서 붙으려 했다.그 때, 곱단이 부엌에서 가져온 재를 잘린 목에 뿌렸다.그 순간 붙으려던 목은 몸에 붙지 못하고 나뒹굴고 말았다. “됐다!” 목과 몸이 붙지 못하고 죽어간 여우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용범과 곱단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빨리 빠져 나갑시다.” 그들은 손을 잡고 허겁지겁 여우의 집을 나섰다.그리고는 부지런히 걸었다.얼마쯤 왔을까, 곱단이 발길을 멈추고 용범이에게 말했다.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데 우리가 너무 서둘렀어요.” “남은 일이라니요?” “가 보시면 압니다.” 용범과 곱단은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광석이 빛을 낸다는 산 중턱이었다.곱단은 산 중턱의 큰 바위 앞에 멈춰 섰다. “여기는 왜 왔지요?” “이 바위를 굴려 내면 동굴이 있습니다.그 안에는 여우가 잡아온 많은 처녀들이 있는데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처녀들이?” 용범은 바위 앞에 섰다.그리고 돌을 굴려 동굴 입구를 열려다가 돌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여우는 여러 마을에서 데려온 처녀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서 자기의 색시감을 골랐으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자 모두 이 동굴에 감금해 놓고 하루 한 번씩 주먹밥을 주면서 큰 돌로 입구를 막아 아무도 탈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용범은 바위를 굴려내려고 떠밀어 보았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바위 밑 한 쪽을 파 봅시다.그러면 바위가 기울어질 것입니다.그 때 밀면 넘어지지 않을까요?” 용범은 칼 끝으로 바위 밑을 팠다.그렇게 하기를 몇 시간, 기어이 바위는 한 쪽으로 쓰러졌고 굴 입구로 사람이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다. 캄캄한 굴 속에서는 쳐녀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 여러분, 빨리 나오십시요.” 그러나 굶주린 처녀들은 밖으로 나오자 비실비실 하며 힘이 없었다.곱단은 집으로 달려가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와 그들에게 먹였다. 처녀들 중에는 얼굴과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린 사람도 있어서 꼭 할머니처럼 늙어보이기도 했다. 기운을 차린 처녀들은 열심히 산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모두 자기들의 고향을 향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그 뒤 용범과 곱단은 행복한 삶을 살았고, 양산마을에도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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