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왕산 호랑이와 강감찬 장군

옛날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강감찬은 용맹하고
무용담도 많았기 때문에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 남경이라 부르던 서울에는  
호랑이가 무척 많았다. 강감찬은 판관을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정에게
뒷산 양지에서 졸고 있는 늙은 중을 불러 오라고 시켰다.
"너희들이 들끓어서 백성들이 편히 잘 수가 없다. 어서 모두 떠나라."
강감찬이 늙은 중에게 이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이윽고 강감찬이 늙은 중을 가리키며 본색을 드러내라고 소리쳤더니, 갑자기
늙은 중이 크고 사나운 호랑이로 변했다. 이튿날 아침 호랑이들이 한 줄로 늘어서   
힘없이 떠났는데, 그들이 모두 떠나는 데 사흘이 걸렸다.  
새끼를 밴 호랑이를 빼고 모든 호랑이가 두만강을 건너갔고, 남아 있던 호랑이가 늘어나 한국의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2.섬진강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경계를 지으며 흐르는 섬진강은 매화마을 앞 섬진나루에 다다른다. 이곳 나루 앞에는 수월정과 두꺼비 석상 4기가 놓여 있다. 섬진강은 본래 사수강, 사천, 기문화, 두치강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이 강이 '섬진'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385년께의 일이다. 그러나 섬진강을 끼고 사는 광양과 하동 사람들 사이에는 그보다 훨씬 임진왜란 때에 생겼을 법한 두꺼비 전설에서 이 이름이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광양군 진상면 섬거리에 두꺼비가 떼지어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들이 강을 타고 올라오자 두꺼비들이 회의를 열어 나라를 구하는 일에 힘을 쏟자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대행군을 시작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섬진강가는 마치 두꺼비의 만리장성처럼 되어, 이에 놀란 왜구들이 물러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강을 '두꺼비 섬' 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정자에 오르면 나룻배가 띄워진 하동과 광양의 경계를 이루는 섬진강을 굽어볼 수 있다

3.지귀전설.

신라시대에 지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너무나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지귀의 사모하는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화귀로 변하였다. 지귀가 화귀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뒤 백성들은 화재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 여왕이 지어준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몸을 태워 화귀가 되었네. 마땅히 창해 밖에 내쫓아 다시는 돌보지 않겠노라.

4.아랑전설

아랑의 본명은 윤정옥(尹東玉)으로 경상도 밀양부사의 딸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에게서 자란 미모의 처녀로, 음흉한 유모와 통인(通引:지방 관아의 심부름꾼) 주기(朱旗)가 흉계를 꾸며 어느 날 밤 달 구경 나온 아랑을 욕보이려 하였다. 아랑은 통인에게 결사코 항거하다가 끝내는 칼에 맞아 죽고, 대숲에 버려졌다.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하였다. 이로부터 밀양에서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 밤에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어 모두 그 자리를 꺼리게 되었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담이 큰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왔다. 부임 첫날 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이상사는 곧 백가를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주검을 찾아내어 장사지내니 그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영남루 밑에는 아랑의 혼백에게 제사지낸 아랑각(阿娘閣)이 있고, 밀양아리랑》도 이 영남루 비화(悲話)에서 발생하였다 한다.


5.오누이탑 전설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上原祖師)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도를 닦고 있었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목이 아픈 시늉을 하여 보니 목에 비녀가 하나 걸려 있었다. 손을 목에 집어넣어 비녀를 뽑아주고 사람을 잔인하게 잡아먹지 말라고 꾸짖었더니 호랑이는 이제 살았다는 듯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호랑이가 또 나타나 이번에는 정신을 잃은 처녀를 물어다 놓고 사라졌다. 승려는 처녀를 방으로 옮겨 정성을 다하여 치료해 주었다.

며칠 뒤 깨어난 처녀는 경북 상주에 사는 김화공의 딸로 다음날 혼인을 하기로 되었는데 호랑이에게 물려오던 날 밤 뒷간에 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깨어보니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마침 한겨울이라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처녀는 승려와 함께 겨울을 나게 되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부부의 연을 맺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승려는 흔들리지 않고 함께 수도에 정진하자고 거절하였다.

봄이 되어 본가로 돌아간 처녀는 부모에게 승려와 의남매를 맺고 한평생 불도를 닦겠다고 하고 다시 암자로 돌아왔다. 처녀의 부모는 감복하여 암자 자리에 청량사라는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여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두 개의 불탑을 세워 그 뜻을 기렸고, 사람들이 그 탑을 오누이탑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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