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대사 중에-------------

전날 문지방 너머로 들려오던 너의 체읍(涕泣)하는 소리에
내 억장이 다 무너져 내렸다.
온 천지사방(天地四方)이 새까맣게 변하던 그 순간,
내 다시 몸을 돌려 너에게로 달려가고만 싶었느니라.
허나,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뒤꼍을 벗어나오면서
나 또한 너와 함께 울었다.

그 옛날 열다섯의 내 눈에 서린 아픈 눈물을
네가 일곱 살 조막만한 손으로 닦아주던 그날,
내 언젠가 이 보답을 반드시 하겠노라고 다짐하였었다.
너에게만큼은 세상 전부를 주고 싶었었다.

그런데 오늘 웃음만이 피어오르길 바라고 바라는 너의 얼굴에서
굵은 체루(涕淚)가 떨어지고 있다.
다 내가 못난 탓이다.
이 모두가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이다.

세상이 더 이상 나를 서얼(庶孼)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면
너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맛난 음식을 먹일 수 있을 줄로 알았다.
세간에서 나를 나으리라 부르게 되면
너를 인간답게 살게 해줄 힘이 나에게 생길 줄로만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닌가 보다.
하마 아니었던가 보다.

내 밥상에는 언제나 고기가 올라오고 하얀 쌀밥이 수북한데,
너는 여전히 꽁보리밥과 김치쪽 두어 개로 끼니를 때운다.
나는 비단옷에 가죽신을 신고 사는데,
너만은 그대로 무명천을 몸에 두르고 다 헤어진 짚신을 신는구나.

어린시절 산사에서는 너와 나 같은 밥을 먹었고,
같은 나물을 상에 올렸다.
똑같은 무명천으로 의복을 해 입었고,
짚으로 꼬아 만든 신으로 사시사철을 한결같이 지냈다.

그런데 이 우라질 놈의 세속에서는
조선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은 유일한 정인(情人) 장채옥에게
비단옷 한 벌조차 해줄 수가 없다고 한다.
조선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은 하나뿐인 가인(佳人) 정채옥에게
가죽신 한 켤레조차 사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심지어 세상은
내가 널 사모하는 마음이 법도에 어긋난다고 말하더라.
세간에서는 내가 네 머리에 가채를 지워주는 것 역시
예가 아니라고 하더라.

대체 반상(班常)의 구별이라는 것이 무엇이더냐.
이 지긋지긋한 신분의 벽은 누가 만들어 놓았더란 말이냐!
정녕 조선 좌포청 종사관은 수하의 다모를 사랑해선 안 된다고
그 누가 규정을 지었다더냐.

하늘이더냐?
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가
검으로 저 하늘을 두 동강 내버릴 테다.
아니면 백성의 신음에 귀 막고 민심의 고초에 눈 감아버린
조정(朝廷)의 간신배들이냐?
내 그럼 그 자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릴 터이니라.

너는 내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며
네 목숨조차 내 꿈을 위해 내놓겠다고 한다.
그러나 옥아!
내가 꿈꾸는 것은 입신양면(立身揚名)도 아니요,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은 더 더욱 아니니라.

오로지 옥이 너와 단둘이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픈 마음 하나뿐이다.
어깨의 견장 따위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님을
옥이 너는 왜 모르느냐?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조차 아깝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이깟 종사관의 종 6품 벼슬쯤
언제든 벗어던질 수 있음이니라.

그러니 옥아!
날 두고 떠난다는 소릴랑 부디 이제는 하지 말거라.
정녕 네가 나를 아낀다면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다오.
참으로 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제발 나를 힘들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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