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의 유래

백운산의 산행기점인 광덕고개는 일명 '카라멜고개'라고 부른다. 그렇게 불리게 된데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도로가 비포장이었던 6.25때의 일이다. 이 지역을 관할하던 사단장이 광덕고개를 오를때면 그의 운전병이 자꾸만 졸았다. 운전병이 졸지않을 방법을 궁리하던 사단장은 방법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고개를 오를 때 운전병에게 카라멜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운전병의 조는 습관이 고쳐졌는지는 모르지만 이 고개 이름이 카라멜 고개로 바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역시 6,25때의 일이다. 미군병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니는데 고개가 높아 너무 힘이 들었다. 그들은 그 지루함과 힘이 드는 것을 잊기 위해 고개를 오를 때 카라멜을 먹었다. 한통을 다 먹고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넘었고, 그때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설은 광덕고개의 꾸불꾸불한 모양이 낙타의 등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카멜(Camel: 낙타)이 카라멜로 변하여 카라멜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패산의 유래 

사패산은 경기도 의정부와 양주에 위치한 산으로 동쪽으로 수락산을, 서남쪽으로 도봉산을 끼고 있다.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사패산은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온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리 군왕이라도 평범한 이들과 다를바가 없었던 모양이다. 사패산에는 바로 자식을 사랑한 군왕의 마음이 닮겨있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훈훈함을 느끼게 한다. 조선 선조임금의 여섯째 딸은 정휘옹주였다. 임금은 남달리 옹주를 사랑하였는데 혼기가 찬 딸은 유정량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선조임금은 사가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산을 하사하는데 사패산이란 이름은 그런 연유로 붙여졌다.

소요산의 유래

소요산은 뛰어난 경치 때문인지 이곳에 자취를 남긴 인물이 많다. 이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소요산의 아름다움에 반한 두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화담 양봉래과 매월당이었다. 이들은 자주 이 산을 찾았는데 소풍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이 그들의 유유자적하듯 이 산을 소요하는 모습을 보고,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리산의 유래

이 산은 옛날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하여 구봉산 불렸었다. 그후 지명산, 미지산, 형제산, 자하산, 광명산 등의 이름을 거쳐 신라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속리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속리산이 이처럼 많은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명산으로서 세인의 관심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속세와 이별하여 수도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의미의 속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주사가 창건된 지정된 지 233년후인 신라 선덕왕 (784) 때의 일이다. 진표율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이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렇게 뉘우치는 마음이 절실한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감응이 없겠느냐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산 수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속리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수락산의 유래

수락산은 의정부시와 남양주군을 경계로 위치하고 있다. 산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얼핏보기에는 삭막하고 볼품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락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곳곳에 다양한 볼거리를 지니고 있다. 수락산에는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방랑하였던 김시습의 자취가 어려있다. 세종은 5세때 신동소리를 듣던 김시습을 무척 아꼈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어린 세손인 단종을 향해 '너를 귀히 등용할 두 군왕이다'라고 했을 만큼 김시습의 재주를 높이 샀다. 세월이 흐른 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통곡했다. 그후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그는 중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정처없이 발길 닿는대로 다니던 그의 발길이 이곳 수락산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은거하였던 김시습은 수락산 정상을 비로봉이라 이름짓고 다른 봉우리들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식장산의 유래

옛날 식장산 자락에 어린 아들을 둔 가난하고 효성이 지극한 젊은 부부
가 살고 있었다. 이 젊은 부부는 아들로인해 큰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산과일이건 나물이건 어머니에게 드리면 어린자식이 먹어치우고 어머니에게 몰래 드리기 위해 아들을 업고 나가면 크게 울어대는 통에 어머니가 마음놓고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분 밖에 없는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한 부부는 자식은 또 낳을 수 있다는 생각 끝에 아들을 숲속 멀리 묻어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아들을 묻으러 땅을 파던 부부는 땅 속에서 그릇 하나가 나오자 괴이한 생각이 들어 아들은 다른 날 묻기로 하고 그릇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심코 이 그릇에 담뱃재를 털었는데 다음날 눈을 떠보니 담뱃재가 그릇 그득히 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음식을 조금 담아놓았더니 그릇의 음식이 가득 불어나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 부부는 근심이 없어졌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려던 부부의 크나큰 효에 하늘도 감탄하여 큰 보물을 내렸던 것이다.부부는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그릇을 산의 어느 곳에 묻었다고 한다. 밥 그릇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월아산의 유래

월아산은 진주시의 상징적인 산으로 금산면과 문산읍, 진성면에 걸쳐 있다. 월아산의 두 개의 봉우리중 북쪽을 달임산이라 부르고, 남쪽 봉우리는 장군대라고 한다. 이 봉우리를 장군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지리적 특성상 진주는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치열한 왜군과의 격전지일 수 밖에 없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살육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논개가 이곳 진주에서 왜병장을 안고 물에 뛰어들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당시 김덕령 장군은 왜군이 진주로 진격해 오자 월아산에 목책성(木柵成)을 쌓고 왜적을 무찌르는 본영으로 삼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이 봉우리에 장군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월악산의 유래

충북 제천과 충주에 걸쳐있는 월악산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 또는 국사봉이라 부르는데, 산의 정상을 영봉이라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둘뿐이다. 『 비결잡록』에는 \'병화불입지지\'라 하여 난리가 나도 안전한 땅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러나 왜 월형산이란 이름을 붙였고 언제부터 월악산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길을 없지만 대신 여러 가지 추측이 전해온다. 어떤 이는 월()자가 붙은 산이 대개 인가가 많은 지역의 동쪽이나 남쪽에 있어 사람들이 그 산위로 솟은 달을 보게 된다는 것과 연관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근처가 서울이 될 뻔하다가 와락 미끄러져 와락산이라 부른 것이 월악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왕산의 유래

경북 청송면에 위치한 주왕산은 전설의 산이라고 할만큼 많는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주왕산은 원래 높고 깎아지른 바위들이 골짜기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하여 석병산이라 불렸다. 그후 신라 왕자인 주원이 이 산에 은거하게 되면서 주방산이라 하였고 이후 대둔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라 때의 일이다. 중국 동진의 왕족인 주도는 스스로 \'후주의 천황\'이라고 칭하면서 나타났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당나라 덕종 15년에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곽자의에게 패하고 주도는 요동을 거쳐 어찌어찌하여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은신처를 찾던 그는 산 하나를 발견하였다. 지세가 험하고 은거하기에 적합하다 판단한 그는 여기에 머물렀다. 한편 신라 조정은 당의 재촉을 받고 장군을 보내어 주왕을 토벌케 했다. 결국 주왕은 타국땅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후 이 산을 주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축령산의 유래

축령산에는 남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그를 잃은 백성들의 안타까움이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남이섬, 남이바위등 아직도 그의 이름이 붙은 지명들로 해서 그가 역사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인물이 아니라 축령산과 함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남이(14411468)장군의 본관은 의령으로 그의 어머니가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옹주니 그는 태종의 외손이다. 세조3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남이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후의 일이다. 궁중에서 숙직을 하던 남이는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것이 나타나게 될 징조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유자광은 왕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했다. 오래전 부터 남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예종은 이것을 빌미로 남이를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남이는 스물 여덟의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그가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어려서 무예를 닦던 산을 축령산이라 이름붙였다.

치악산의 유래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고려의 유신 운곡은 고향인 치악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하기 전 이방원에게 글을 가르쳤던 적이 있다. 왕이 된 태종은 스승 운곡을 찾아 어릴 때 머물며 글을 읽었던 치악산 각림사를 찾았는데, 운곡은 조선의 왕인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관련된 여러 명소가 전해오고 있다. 태종이 잠시 머물었던 횡성군 강림면의 태종대(주필대), 태종이 운곡의 행방을 묻었을 때 할미가 엉뚱하게 가르쳐 주었던 바위, 황지암을 비롯하여 후일 임금에게 거짓말을 한 죄를 뉘우쳐 할미가 빠져 죽은 늪, 노구소(할미소,구연)등이 그곳이다. 이밖에도 운곡이 숨어 살았던 고깔바위(변암)가 치악산 동남쪽에 있으며, 태종의 수레가 지나갔던 수레너미재, 대왕재, 원통재 등의 고개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비로봉 서쪽의 입석대 아래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운곡의 묘가 있으며 바로 아래에 운곡의 재실이기도 한 석경사가 있다.

칠갑산의 유래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칠갑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아흔아홉계곡을 비롯한 까치내, 냉천계곡, 천장호, 천년고찰인 장곡사 등 절경지대가 펼쳐져 있다.두개의 대웅전으로 유명한 장곡사는 그윽한 산사의 기품이 넘치는 사찰이다. 칠갑산은 본래 이름은 칠악산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곱 성인의 칠()자와 십이간지의 첫 자인 갑()자를 합하여 붙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 속에 명당자리가 일곱군데 있다고 해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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