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어룡리의 전설

성환읍에서 평택쪽을 향해 국도로 따라가다가 철길을 건너면 어룡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그 형태가 용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마을의 뒤에는 수리조합이 있고 앞은 탁 티어져 있다. 이 마을의 내에 고기가 살다가 변하여 용이 되어서 승천했다고 하여서 어룡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매년 정월 초사흘 밤 12시가 되면 안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정제를 지낸다. 제관은 생기복덕을 가려서 제주 1인을 선정하고 이장, 새마을 지도자, 반장이 함께 참석하며 딴 사람들은 참석할 수가 없다. 제관은 정월 초하루부터 제를 지내는 시간까지 일체 문 밖 출입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여서는 안된다. 집안에서 근신하고 있어야 하며 금줄은 샘과 동리의 길가와 제주집 문전에 느리며 동리의 입구에는 황토를 펴 놓는다.

제수비용은 대동회에서 정제비로 염출하며 제물은 돼지머리와 떡, 삼색실과, 탕을 쓰고 술은 제주집에서 조라술을 담구어 사용한다. 전에는 소머리를 썼으나 요즈음에는 돼지머리를 쓴다. 제일이 되면 마을 안에 있는 공동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띠어 놓았으므로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데 제가 끝나고 나면 제주의 소지를 먼저 올리고 다음으로는 세대주의 소지를 고령자부터 나이순으로 올려준다.

다음날 새벽 1시쯤 정제가 끝나면 마을회관에 모여서 노인들께 먼저 음식을 드리고 모여서 먹는다. 이 마을에서는 제가 끝나면 밤, 대추 등을 우물에 집어 넣는데 그것을 제일 먼저 건져다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서 부녀자들이 서로 먼저 물을 뜨려고 한다.

 2.위례산의 전설

입장면 호당리에는 백제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는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까지 이어졌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정도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정도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쪽으로 깨어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어쨌든 전쟁과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龍王)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왕이 이곳에 올때는 용으로 화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수천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백제군이 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말 할것도 없이 백제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 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공주로 가서 낮에하지 못한 정사를 살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그간 두려웠던 고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백제왕은 새벽에 위례산으로 군사를 지휘하러 간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날마다 낮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임금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불만이 많던 처남은 동생인 왕비에게 임금이 간곳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는 자기 오빠에게 임금은 사람이 아니라 용이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의 처남은 임금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임금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시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임금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마침 해가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임금이 돌아 올 시간이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백제의 임금은 용()이 되어 공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산성(山城)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쟁을 지휘한 까닭에 그는 피로한데다 시장끼까지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용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얼른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왕의 처남은 힘껏 낚시대를 당겨 용을 낚았는데 그 용은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가서 떨어져 죽었다. 그뒤 용이 썩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이곳을 구린내라고 전한다.

한편 용을 낚은 장소를 지금도 조룡대라고 전하며 임금이 죽은 이튿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패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이처럼 싸움에서 지고 울었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3.번개마을의 전설

병천에서 동면쪽으로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동면소재지 700m정도 못미쳐 좌측이 화계리 번개마을이 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흩날 밤 12시부터 보름날 1시 사이에 지내는데 제사를 지낼 제관은 축관 1인과 제관 1인 그리고 불대장이라 부르는 유사 1인을 선정한다. 예전에는 마을에 사람이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나 요즈음엔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일 당일에는 정성을 다하는데 제는 제관 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다. 우물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제관의 집과 우물 주위에 황토를 펴고 제장은 마을의 방위로 따져서 제일에 손이 없는 방향에 차일을 치고 제장으로 삼는 완전한 노제(路祭)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42호가 모여 사는 번개마을은 집집마다 쌀 한 되씩을 걷어서 제수비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일 전날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돼지머리와 삼색실과, 포와 미리 담그어 놓은 조라술로 제사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의 제로 강신-분향-초헌례-고축-아헌례-첨작-종헌례로 이어지며 제일 당일 제관들은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소지는 세대주마다 한 장씩 올리며 보름날이 되면 저녁에 전 주민이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잔치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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