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 바위
각시 바위는 원북면 신두리 3구의 백사장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기슭에 있다. 이 바위는 큰 바위와 주변의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를 각시 바위라 부르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아가씨가 이 동네로 시집을 와서 살고 있었는데, 시집살이의 구박이 심하고, 갈수록 고된 생활만 쌓이고 쌓였다. 몸은 점차 쇠약해지고, 앞으로의 희망 마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으니, 그녀에게는 오로지 괴로움과 슬픔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매일 저녁 이 곳으로 나와 슬피울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계속되던 어느날, 시어머니의 혹독한 구박에 슬픔을 이기지 못한 새색시가 구슬프게 울다가 쓰러져 죽고 말았는데, 시신(屍身)이 변하여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생긴 뒤부터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 바위를 가리켜 각시 바위(달리 치마바위라고도 부른다) 라고 부르게되었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 바위를 건드리면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바위를 건드린 사람은 물론 그의 측근자까지도 화를 입는 것이었다. 어느날, 이 마을 청년이 이 곳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무의식중에 각시 바위를 건드린 것이 화근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후 이 청년의 동생까지 까닭없이 앓아 눕더니 일어나지도 못하고 신음만하다가 죽으니 이 집의 대가 끊기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난 뒤부터 동네 사람들은 이 각시 바위 근처는 물론 멀리에서 조차 그 바위를 바라보는 것을 꺼려했다 한다. 각시 바위가 있는 이 곳에는 서해의 하와이로 불리는 신두리 해수욕장이 있는데, 탁트인 백사장과 깊고 푸른 바닷물이 태평양의 한 바닷가를 연상케 한다. 모래가 깊은 백사장은 꼬마들이 모래성을 쌓기에 안성맞춤이다. 또한 해수욕장 주변은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농촌 풍경을 볼 수 있어 도시인들이 향수에 젓어 드는 곳이기도 하다.
잿 말
농촌 지역일수록 법정 지명(法定地名)의 호칭보다는 통속적인 자연부락명으로 부르는 것이 더욱 친근감이 있고 정서적이어서 좋다. 또한 이 자연 부락의 명칭은 그 유래가 매우 다채로와서 많은 흥미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지명 연구에는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태안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명칭이 무려 1,024개에 이르고 있다. 이제 기술하고자 하는『잿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잿말이란 마을은 원북면 이곡리 2구에 있는 자연 부락의 명칭이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간척 사업으로 인한 방조제가 축조되기 전까지는-바닷물이 이 잿말 앞까지 들어 왔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입구에는 커다란 차돌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차돌 마을이라 부를 정도로 상징적이었다. 이 차돌 바위 가까이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한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욕심이 많기로 이름난 구두쇠여서 노랭이 영감으로 불리었다. 이 영감은 남에게서 받는 것만을 좋아할 뿐,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줄줄 모르는 지독한 구두쇠였기 때문에, 이집을 찾아오는 시주승 역시 주인으로부터 시주는 커녕 번번히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에 은근히 화가난 스님들이 어느날 시주차 이 마을의 입구를 지나가다 우연히 이 욕심장이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시주승은 이 노인에게 말하기를 “이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니 저기 입구에 우뚝 솟은 차돌바위를 깨뜨려 버리면 이 마을은 물론 영감께서는 이 마을 제일가는 갑부가 될 것이오.” 하고는 총총 걸음으로 건너 마을로 사라져 갔다. 이 말을 들은 욕심꾸러기 영감은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서 다음날 아침에 인부를 동원하여 차돌을 깨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약 대여섯 시간쯤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깨어지는 돌이 재로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에 놀란 인부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입을 다문채 서 있었다.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웬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다. 인부들은 작업을 중지하고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 갑자기 가난이 닥쳐오고, 욕심꾸러기 영감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이 있은 뒤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차돌이 부서져 재로 변했으니 이 마을을『잿마을』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명칭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수십년 전래되어 오면서『잿마을』이『잿말』로 줄어서 지금은 잿말로 불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