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암이란 글자 그대로 바위의 생김새가 학같이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학암은 원북면 방갈리(遠北面 防葛里) 2구 가시내의 학암포(謔岩浦)에 있다. 이 학암포에는 큰 분점(大盆店)과 작은 분점(小盆店)이 있는데. 큰 분점의 서쪽 끝(西端)낭떠러지 용낭굴위의 바위를 일컫는 것이다. 학암포란 명칭은 이 학암에서 연유된 것인데, 1968 7 27일 해수욕장의 개장(開場)과 더불어 붙여진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분점포(盆店捕)였다. 이 분점포는 본래 조선조(朝鮮朝)때 중국()과의 교역을  하던 무역항(貿易港)이었다.

양국은 여러 가지 물품을 교역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질그릇(동이 또는 항아리 )를 주로 수출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전만해도 질그릇을 굽던 가마터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지난날을 회상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질그릇을 만들어 수출한데서 포구(浦口)의 명칭을 분점(盆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즉 동이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는 한편 일부는 내수용(內需用)으로 가게서 시판(市販)하였으니. 그 이름 그대로 동이분()자와 가게 점()자를 붙이어 분점이라고 명명한 것은 매우 설득력(說得力)있는 명칭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분점포가 무역항으로서 활기가 넘치고 따라서 근해의 어업 기지로서 중선(重船)을 비롯한 많은 어선(漁船)들의 출입이 잦았던 명실 상부한 어항(漁港)이기도 했다.

특히 어선들이 어로 작업을 마치고 만선(滿船)으로 입항할 때의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오색 영롱한 뱃기를 달고 입항하는데, 깃발의 개수를 보고 그 배의 어획량(漁獲量)여부와 또는 수익금(收益金)등을 점칠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분점포구가 활기에 넘치고 있을 때, 원근 각지(遠近各地)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들었더니, 또한 이 포구는 관광지로서의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따라서 큰 분점의 학암 부근에는 봄철의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필무렵이면 이곳으로 꽃놀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서당의 훈장(訓長)은 학생을 데리고 와서 글을 짓고 즐기는가 하면, 지방의 유지 및 유생(儒生)들은 이 학암 옆에 와서 꽃놀이를 하면서 운자(韻字)를 내어 한시(漢詩)를 짓고 읊조리긷 하였다. 비록 시인이 아니더라도 이 아름다운 경치에 접하면 저절로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수 없는 곳이다.

위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탁 트인 것이 상쾌한 마음을 자아내게 하고 특히 학암 앞의 푸른 바다에 오가는 어선들의 황포 돛대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으니 이 같은 절정에서 유생들이 시를 짓고 읊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450년 전만해도 바위에 써놓고 한시(漢詩)가 눈에 띄었는데, 지금은 풍우(風雨)에 깎기어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학암 밑에 있는 용낭굴을 비롯하여 주변의 기암괴석(奇岩怪石)의 절경은 마치 해금강을 방불할 정도로 아름다우니 이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저절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일찍 금송박승원(琴松 朴昇遠)은 관송팔경(貫松 八景)에서 학암(鶴岩)을 이렇게 읊었다.

금지학암(金池 鶴岩)이란 시제(詩題)로 또한 여름철에 만발하는 학암포 해안가 백사장의 해당화(海棠花)꽃은 이 곳의 명물이 아닐 수없다.

명사십리 해당화(明沙十里 海棠花)란 말이 이곳을 두고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앞에서 열거한 박승원의 관송 팔경에서 명소해당(明沙 海棠)이란 시제로 이렇게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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