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 호랑이가 잡아준 묘지 

조선조 중엽 인천 먼우금에 정시성 연일정씨란 소년이 있었다.
그는 글공부를 하기 위해 문학산 남쪽 기슭을 지나가는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린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린 학동이라 그는 겁이 나서 주춤 하다가 용기를 내어 호랑이 앞으로 다가가 
 
"이 산중호걸인 네가 어찌 감히 인간을 헤아리지 못하느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호랑이는 꼼짝도 아니하고 입을 벌린 채 고통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조금 가까이 가서 호랑이 입속을 들여다 보니 호랑이 목구멍에 은비녀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음을 눈치채고 정시성은 손을 넣어 그 비녀를 빼내 주었더니 호랑이는 입을 다물고 머리로 신호하며 따라오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한곳에 멈추고는 머리를 끄떡끄떡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그 호랑이는 산기슭을 한바퀴 돌고 어슬렁 어슬렁 사라져 버렸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사실 이야기를 하였더니 어른들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자기를 구해준 사람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는 동물이다.

그러니 그곳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는 그곳에 다시 가 보았더니 묘를 쓸 수 있는 명당자리였다.
그래서 그는 부모의 묘를 쓰고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였다.

★ 울산 - 베리끝의 애화

어느해 여름의 일이었다.
며칠동안을 두고 큰 비가 쏟아져서 태화강은 홍수로 뒤덮여 있었다.
며칠동안을 내리던 비도 멎고 날은 좋아졌으나 강물은 아직 여전하게 위험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에 젊은 신랑 신부가 시집가지 않은 누이 동생과 함께 베리끝을 지나고 있었다.

강물은 길에 까지 넘쳐 남창 남창하고 홍수는 사납게 구비치며 흐르니 길손들은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사나이의 뒤를 따라오던 두 시누이와 올캐가 아차하는 순간 그만 발을 잘못 디뎌 강속으로 떨어졌다.

큰 비명에 놀란 신랑은 뒤를 돌아 보았으나 처와 누이 동생이 한꺼번에 성난 탁류에 휘말리고 떠내려 가는 것이었다.
응겁결에 자기 앞에 떠내려 가는 옷자락을 잡아 겨우 건져보니 자기 아내였다.


이렇게 하는 순간 숨을 돌려 보았으나 자기 누이 동생은 강 한가운데로 떠내려가면서 한번 얼굴을 솟구치더니 그만 탁류속에 돌아 오지 못하는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 애처로운 일이 있은 뒤의 일이었다. 누가 지어 불렀는지 모르는 일이나 한 슬픈 노래가 불리어 졌다.
남창남창 베리긑에
무정하다 우로라바 
나도죽어 후생가면 
남군님부터 정할래라.  

광주 - 무등산의 정기를받은 김덕령  

4백년 전 광주 땅에 김덕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무등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힘이 장사하고 술법에 능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공을 세운 장수였다.
김덕령의 어머니가 그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원래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팔자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김덕령의 어머니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늙은 중 한 명이 나타나서

'나는 중이 아니라 호랑이이다'
라고 소리치면서 재주를 세 번 넘고 나니 호랑이로 변했다.
그리고 밭 주위를 돌더니 다시 재주를 넘어서 중이 되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중이 말하기를
'암만해도 저 여자를 잡아먹지 못하겠다. 밭으로 들어가서 잡아 먹으려 했더니 불칼이 나타나서 잡아먹지 못하겠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뻔했으나 무등산의 정기를 탄 김덕령이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신이 불칼을 내려서 김덕령을 살린 것이다.  

경상북도 - 호박엿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의 일이다.
처음에는 태하의 서달령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열대여섯 가구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른 봄이 되어 육지에서 가져온 호박씨를 울타리 밑에 심었다.
이 호박은 나날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박이 다 익기도 전에 그 처녀는 혼처가 생겨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처녀가 시집을 가고나서 호박 넝쿨에는 큼직큼직한 호박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다가 방안 가득히 채웠다.

그리고 겨울이 닥쳐와 눈이 내리고 일없는 날들을 계속 보내게 되었다.
하루는 그 호박으로 죽을 쑤었는데 그 맛이 엿과 같이 달았다.

그것은 호박맛이 아니고 엿맛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호박을 많이 재배하게 되었고 겨울에는 그 엿맛과도 같은 호박죽을 쑤어먹게 되었다.
이로서 호박엿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호박을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울릉도 호박엿이라는 소리를 안들어 본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 속사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울릉도에서는 호박으로 엿을 만들지 않았고 옥수수로 엿을 만들었는데 이 엿맛도 일품이다.
요즈음의 호박엿은 진짜로 호박을 집어 넣어 만들지만 이는 관광객의 요구에 부응한 때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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