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진명의 열녀 송씨의 순절

서해의 푸른 바다 파도는 모질고 물결은 거셌지만 그 끝이 멀다 않고성난 노도는 무차별 조선 땅을 휩쓸었다.

때는 1592(선조 25 4 14) 악독하고 교활한 일본 풍신수길이가 살기 좋은 우리강산을 탐내고 침범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때의 난리가 임진왜란 이었다. 1441(세종 23) 도화 발포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됐고 그 후 한정록이 발포만호로 도임됐으며 부임 초부터 이순신 막하에서 많은 해전에 참전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천명의 수가 다했는지 칠천 양해전에서 혈전 끝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슬하에 1 2녀의 어린자식들을 두고 유명을 달리했으며 사랑하는 부인 송 여사는 세 어린 자식들을 양어깨에 업은 채 발포에 우뚝 서 있는 동영산 기슭 우암절벽에서 왜놈들에게 자식들까지 굴욕당하고 치욕적인 삶을 저주하는 것보다 차라리 낭군 따라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옮은 일이라 판단하고 그만 푸른 바다로 투신 자결했던 만고에 보기 드문 정렬이 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조선환여지승람이란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충무전서 난중일기 등에도 이 사실을 고증하고 있어 우리 고흥땅 발포는 역사적으로 깊은 유적지요 동남의 해상영역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은 영광이 넘치는 유일무이의 관광명소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푸른 강물에 몸을 던졌다.

분명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우리 나라의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극심한 재난이었다. 그러한 국난을 당하여비겁하게 자기의 생명만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기꺼이 자기의 한 목숨을 구국의 길로 내던진 의로운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이고장도화면 발포리 어귀에 있는 동영산 상봉에는 이끼 낀 비각과 먼지를 이고 우뚝 선 비석에 임진왜란때 구국의 길에 나선 남편의 뒤를 따른 열녀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임진 7월 발포만호 황정록이 유군장이 되어 발포 함대를 이끌고 나아가 한산도 해전에서 왜선 1척을 불태우고 적 수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안골포해전을 비롯하여 부산 해전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1597
(정유년) 정유재란의 참혹한 불꽃이 타오르니 가엾은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파리 목숨처럼 무수히 죽어갔다. 조상들이 남긴 값진 유물은 왜놈들의 더러운 손에 일그러지고 불타 없어졌으며 조정에서는 이러한 형편을 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했던 판이었다.

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한 때였으니 충무공은 몇몇 간신들의 시기와 모략 중상 등으로 파직된 뒤 그 해 7월 발포 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황정록 만호는 칠천량 싸움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남편이 출동한 후 가슴을 태우던 부인 송간의 손녀 여산 송씨는 이 비보를 듣고 "남편이 왜놈들 총탄에 맞고 죽음을 당하였는데 장차 우리도 더러운 왜적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거늘 어찌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하며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큰 아이는 양팔에 끼고 마을 동쪽에 있는 우암 절벽에서 깊은 바다로 몸을 던져 남편의 두를 따라 순절하고 말았다.

지금도 우암 절벽에 오르면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슬픔이 담긴 사연을 전하고 그 곳을 열녀절벽이라 일컬어 갸륵한 뜻을 가리고 있다.

임정양난 7년이 지난 후부터 발포의 동민들은 매년 흉년에다 질병이 겹쳐 마을은 평온을 찾을 길 없이 허덕이고 있었는데 어느 날 80된 노인의 꿈에 선몽을 하는 것이다. 내용인즉 발포만호 황정록 부인 송 여사와 어린자식과 더불어 5인 가족의 혼신이 나타나서 우리들은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마을이 편안하려면 동영산 상봉에 제당을 짓고 동제를 지내줄 것을 간청하므로 동민들은 노인의 선몽을 받아들여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400여 년 동안 동제를 지낸 후부터 풍농과 풍어의 시절이 끊이지 않고 동네가 평온했다고 한다.

이 동제를 의열사에서 모신 5년 후부터 구천을 헤매는 황정록 가족이모두 왜가리로 환생하여 봄이면 남쪽에서 이곳까지 날아와 보금자리를 삼고 새끼를 번식하고 가을에 다시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왜가리 떼가 1,000만에 달하여 백색으로 단장하고 창공을 나는 모습은 마치 백의민족이 자유를 얻어 평화롭게 훨훨 나는 듯 하며 자식들은 푸른 바다에 물귀신으로 만든 어머니의 천년만년의 한을 달래주는 듯이 이 왜가리 도래지는 지방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됐다.

오동나무여! 활개바위여! 발포여! 너는 알고 있다!(고흥의 관광명소)

이순신 장군이 이곳 발포만호로 1582년에 도임하여 1 6개월 재임하실 때 군기감 서박이 검열하고 간 후 동원 뜰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가야금 악기재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즉각 베어 올리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때 장군은 그 명령을 여지없이 일축하고 흙 한줌이나 돌 한 덩이라도 국가의 소유재산인데 베어 올릴 수 없다고 거부하고 말았다. 이때 서박은 거짓보고와 음해를 가하여 이순신은 초임지인 발포 만호직을 파직 당했다는 슬픔임난 10년 전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지난 1987년 신형식장관을 중심으로 도화 발포리의 유적지 성역화 사업이 전개되어 현재 내외삼문을 갖춘 충의사가 신축되어 각종 유물은 물론이요. 후세의 교육장으로 또한 고흥 유일의 관광명소로 인정받고 있으며 공원으로 지정받아 발포는 관광지의 관문이자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발포 동북쪽에는 유명한 탕사장이 있어 옛날 젊은 남녀가 정렬적인 사랑이 넘쳐 뜻하지 않은 열병을 얻어 신음하게 됐다.

두 남녀는 피부가 부어터지고 종기 등이 나자 견딜 수 없어 모래를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그 곳에 알몸을 묻었다. 오동나무의 슬픈 사연을 연상하면서 이열치열 하리라하고 모래사장에 장작불을 피어 불에 달군 모래를 이불삼고 15일간 지낸 뒤 차차 쾌유되자 이곳을 탕사장이라 이름하고 하절부터 전국 각처에서 탕사 인파가 극성을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도화면 사덕리 덕흥마을이 옛날 선소로서 거북선을 건조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야말로 발포리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발포 포구에서 1km 떨어진 남쪽 해변에 활개바위가 있어 지나가는 범선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활개바위는 발포선창 남서쪽에 위치하여 발포포구의 절경을 대표하고 있는 곳으로 자연석의 조화는 그 형태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신비의 기절 처라 아니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이 당시 해저탐방의 기술 장비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검푸른 바닷물 가운데 돌출한 활개바위 주위는 큰 군함도 접안할 수 있으며 접안과 동시에 전차, 장갑차, 기타 군용차량이 자유자재로 상륙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임난 때 이곳 경비를 소홀이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활개바위와 나란히 돌출한 바위는 모양이 마치 남자의 X처럼 생겨 그곳을 지나가는 여자들로 하여금 충열이 안되는 자 없다고 하며 이 활개바위 주위를 지나는 모든 범선은 마치 남국의 해변에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들 한다.

왼쪽에 돌출하여 날개를 펴고 있는 여자의 생식기를 노려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열이 오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곳에서 다시 지죽 쪽으로 해안을 돌아보면 금강죽봉이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50m쯤 서쪽으로 가면 해중약수터가 있어 유명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어(하모)가 많이 잡혀 일본으로 직수출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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