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하루만의 사랑과 원한
홍 총각의 정처 없는 발길은 전라도 고흥 땅에 이르렀다.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은 수려했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지만 불행히도 낙방만 되어 벼슬길을 놓치고 있는 터라 초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홍 총각이 길을 나선 것은 조급하기만한 과거에의 꿈을 잠시 잊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리해보자는 속셈에서였다.
한려수도란 말로만 들어온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문자 그대로 온갖 잡념을 잊어버리게 하는 그림 같은 섬과 섬, 나무와 나무 유리같이 맑기 만한 바다였다. 홍 총각은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상쾌한 풍경에 도취되고 말았다.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더위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바다 바람은 시원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작고 큰 포구와 포구, 마침내 풍남이라고 하는 포구에 이르렀다.
때는 마치 서산낙조가 아름답기만 하고 어쩌면 인생의 최후기도해서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는 느낌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록 과거에는 빈번히 낙방했을망정 마음만은 의젓해야 하겠는데 주머니 속은 비었고 비는 쏟아지고 갈 데라고는 막연하여 급기야 다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홍 총각은 이곳저곳 원근을 둘러보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저쪽 언덕에 조그마한 초가 한 채가 보였던 것이다. 홍 총각은 다 죽어가는 마당에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허둥지둥 무조건하고 그 집으로 뛰어들었다. “주인양반 이거 죄송하오나 길 가던 나그네가 돌연히 비를 만나 잠시 비를 좀 피하려고 이렇게 무례하게 들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인사치례를 하고는 마루에 걸쳐 않았다.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주인 여인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름답고도 순박한 그 여인은 입을 열면서 길 가시는 행인이신 모양인데 걱정 마시고 비가 그칠 때까지 잠시 쉬어 가십시오. 하는 여인은 목소리까지도 몹시 고왔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쓸쓸하고 외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홍 총각은 그 목소리를 듣고 가슴속에 이상한 충동이 뭉클거리는 것을 느꼈다. 식구들은 모두 어디 가셨습니까? 하고 물으면서도 속으로 얼굴을 붉혔다.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 부인은 대답하기를 이집엔 다른 식구는 아무도 없고 오직 저 혼자 있사옵니다. 뜻밖에 여인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홀로 있는 여인이라 어찌된 일이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살게 되었단 말인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은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은 임이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는 물론 온 고을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아무게 집 딸 하면 모든 총각들이 입맛을 다시고 장가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남의 입에 미모로써 오르내리던 임녀도 마침내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출가한지 일년 만에 그 남편은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그녀는 절세가인이라는 미모마저도 자랑스러운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세상만사가 귀찮아지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딴 대밭가운데다 초가삼간을 짓고 그럭저럭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홍 총각은 그 말을 듣고 저런 앞길이 만리같은 청춘에 참으로 안되었구나 하고 못내 안타깝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런 미인을 만나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천재일우의 호기회라고 생각하고 싱글벙글 해지기까지 했다.
소나기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으며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차차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홍 총각은 마음속으로는 일이 잘되어 간다고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체모를 잃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의젓하게 보여야 한다고 하고 되뇌고 있었다. 어허, 이거 참 큰일 났는걸. 갈 길은 먼데 비는 거치지를 않으니 어쩌면 좋다하고 홍 총각은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녀에게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임녀로서도 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는 오고 날은 어두웠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두워지는 빗속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만 같았다. “누추하지만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어서 방으로 올라 오시지요” 하는 임녀의 말을 듣고 홍 총각은 예로부터 남녀가 유별한데한방에서 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을 나설 수도 없으니 정말 난처합니다. 하는 말에 임녀는 안방을 치우기 시작하면서 올라오라고 하는 그 마음씨나 언동까지가 모두 곱고 아름다웠다.
염려 놓으십시오. 저는 부엌에서 하룻밤 지낼까 하오니 방으로 드십시오.
홍 총각은 펄쩍 뛰었다. 주인을 내쫓고 객이 방을 차지 할 수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밖에서 자겠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신세를 끼쳐서 대단히 송구스럽다고 말끝마다 덧붙였다. 한참동안 말이 오고 가다가 결국 한방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홍 총각은 아랫목에서 임녀는 윗목에서 자기로 한 것이다. 막상 잠자리에 들었지만 홍 총각은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밖에서는 세찬 빗소리가 한결같이 계속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그러나 생각은 자꾸 임녀에게로만 가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임녀 그녀도 잠이 오질 않는 모양이다.
이따금 가냘픈 한숨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청상과부의 설움이 사무치는 모양이었다. 홍 총각의 가슴은 후들거렸다.
더운피가 금방이라도 끓어오를 것 같았다. 참을 길 없는 욕정이리라.
그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임녀의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손을 뿌리치려 했다. 아이 망측해라.
왜 이러시는 거예요. 부인, 나는 부인을 첫눈에 보고 설레는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소. 부인, 나와 혼인해 주시오. 우연히 이렇게 만나 신세를 지는 처지이지만 이것도 큰 인연인가 하오. 하는 홍 총각의 목소리는 떨리고 가슴은 달대로 달아올랐다. 네 혼인을요?
그런 농담은 거두십시오. 어찌 총각의 몸인데 불행한 과부를 아내로 맞겠다는 것입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침착하기만 했다.
이런 판국에도 할말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총각은 꼭 처녀를 맞아 결혼해야 한다는 법도 없잖소.
아니 되오. 이 몸은 홀로 지내야 할 운명이요.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함은 예로부터 도리가 아니었던가요. 물론 남편을 잃었다지만 홀로 수절하는 것이 이 몸의 굽힐 수 없는 결심이오. 임녀는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결심을 표명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면 홍 총각의 몸은 더욱 바짝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대장부가 한번 뺏던 칼을 다시 집어넣을 수 있으랴.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홍 총각은 덥석 여인을 안았다.
그리고 간절한 말을 여인의 귓속에 대고 속삭였다. 하늘을 두고 나의 사랑을 맹세하오. 장부 일언은 중천금이라고 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다. 한쪽으로는 달콤하면서도 위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임녀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샘솟듯 흐르고 있었다.
슬픔과 기쁨의 엇갈림 속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이었다. 절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 슬픔이었다면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는 혼인의 기쁨일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홍 총각은 자꾸 더운 입김으로 여인의 결심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뿌리칠 수 없는 사태였다. 분명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옵니까?
거 무슨 소리요. 하늘이 무너져도 결코 변하지 않겠소. 임녀는 눈물을 거두었다.
그리고 홍 총각의 우람한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만일 당신이 나를 버리면 이 몸은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말려 죽일 것이요. 여인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어허, 공연한 걱정을 다하는 구려. 날이 새면 당장에 고향에 가서 혼인 차비를 해가지고 올 텐데. 밤은 깊어가고 한 몸이 된 홍 총각과 임녀의 달콤한 꿈은 무르 익어가고?서야 홍 총각은 고향 길을 향하여 떠났다.
비록 하룻밤의 사랑이었지만 임녀로서는 십년을 같이 산 남편을 떠나게 하는 기분이었다. 홍 총각도 마찬가지로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꽃가마를 가지고 모시러 오겠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었다. 홍 총각이 떠난 지 열흘이 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임녀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내일하고 기다리는 날이 달이가고 해가 바뀌었다. 홍 총각의 소식은 점점 아득하기만 했다. 뒷동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먼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별수 없었다. 임녀의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증오의 불길이 일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돌아오기만 하면 뛰어가서 안기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임녀는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던 처지라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의원들이 와서 보고는 누구나 고개를 흔들었다. 상사병이어서 백약이 무효라고 했다.
홍 총각과 만난지 꼭 일년이 되는 날 임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온 홍 총각은 임녀와의 관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책만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운이 트였는지 그 이듬해에 과거에도 급제를 해서 함평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양가의 규수를 맞아 장가도 들고 팔자 좋게 거덜거리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현감은 술이 지나치게 취해서 잠자리에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이날따라 현감의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스르륵 그것은 커다란 구렁이가 방으로 기어드는 소리였다. 아니 구렁이가게 누구 없느냐 . 빨리 저 구렁이를 때려잡아라. 현감의 아닌 밤중 호령에 놀라 통인 놈은 사령들과 같이 뛰어들었다. 현감의 침실방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현감의 황급한 호령은 안방에서 대단하지만 문을 열수가 없었다. 몽둥이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손에 모두 쥐가 내려 손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놈들 무엇하고 있느냐. 빨리 구렁이를 때려잡지 못할까. 아악! 현감은 말을 미처 마치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구렁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현감의 몸뚱이를 칭칭 감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이 꽉 꽉 막혀오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현감은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징그러운 구렁이가 대가리를 추켜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아닌가. 현감은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만을 찾으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여인의 목소리가 구렁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여보, 나를 모르겠소. 괴이한 일이었다. 구렁이가 말을 하고 게다가 자기를 모르겠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신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임녀요. 명세를 저버리면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한 그날 밤을 잊었구려. 기다리다 지쳐 죽은 나는 상사뱀이 된 거요. 구렁이의 목소리는 바로 고흥 땅에서 하룻밤을 같이 한 임녀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아! 내가 지은 죄의 업보를 받다니 현감은 총각시절의 그 잘못을 뉘우치면서 탁식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밤이 깊어지면 이 상사뱀은 현감의 잠자리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새벽녘이 되면 온데간데없이 구렁이는 자취를 감추곤 했다. 밤마다 구렁이에게 몸을 칭칭 감긴 채 날을 새워야 하는 현감의 소름끼친 생활은 형언할 수 없었다. 자연 병든 사람처럼 몸은 누렇게 메말라가고 만사가 징그럽게 끔찍하게만 생각되었다.
유명하다는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한다. 처방을 한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구렁이는 밤마다 찾아오는 것이었다. 생각다 못해 어느 도승을 찾아 간곡히 사정을 고했다. 도승은 임녀가 살았던 초가집을 헐고 아담한 암자를 짓도록 하라고 하면서 크게 위령제를 올리라고 했다.
도승의 가르침대로 현감은 암자를 짓고 위령제를 정성껏 모셨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구렁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 현감이 지은 암자가 바로 전ㄴ설과 함께 의연히 서 있는 고흥의 수도암이다.
조선 세조 때 지어졌다는 이 암자는 한 때 여승들의 수도 처로서 삼십여 명의 속세를 등진 여승들의 도장이 되고 있었다 한다. - 출처 네이버 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