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 1
이정운 지음 / 동아발해 / 2010년 7월
품절


"기덕아."
집밖으로 나온 후 재야는 한 시라도 환수와 떨어져 있으면 안심되지 아니하였다. 허나 백호는 괘씸죄로 당분간 부를 생각이 없는지라 오래간만에 주작을 부른 것이었다. 주작은 나타나자마자 이리 말하였다.
- 나 요즘 우울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덕배한테 옮은 거야?"
- 나는 그저 우울할 뿐이다. 뼛속까지 조울증 환자인 현문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겠다!
버럭 소리를 지른 주작은 제 기분이 좋지 아니함을 보이려고 작정한 듯 고개를 팩 돌렸지만 그래봤자 얼핏 보면 어른 손바닥만 한 붉은 병아리였기에 귀여울 뿐이었다. 재야는 손바닥으로 주작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누굴 부르지?"
- 청룡 녀석 요즘 심심하단다. 그럼 잘 있어라. 나, 간다.
주작이 팽그르르 돌자 주변에 자그만한 불꽃이 생겼다.
"잘 가, 기덕아."
- 그 이름으로는, 부르지, 마!
주작은 사라지는 와중에도 그렇게 대꾸하였다. 이름에 민감한 것은 비단 주작뿐만이 아니었다. 기덕이(주작), 덕배(현무), 춘삼이(백호). 셋은 제각기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많았다. -60~62쪽

재야의 부름에 첫 번째로 응답한 주작은 자신에게 기덕이라는 이름이 붙자 사방신 체면에 어떻게 그런 이름으로 살 수 있냐면 소환에 응한 것을 석 달 열흘 동안 자학하였다. 두 번째로 응답한 현무는 응답할 당시에는 조증 상태여서 좋다좋다 하다가 신계로 돌아간 연후에 우울증이 도져 자살을 준비하였다. 세 번째로 응답한 백호는 춘삼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제 신세가 서러워 울었다. 그런데 이 세마리의 신수가 한날한시에 위안을 얻었으니, 자학의 밤에서 주작을 해방시키고 현무를 자살하지 아니하게 하였으면 백호의 눈물을 그치게 한 거룩한 이름이 있었다.
"개똥아."
청룡 김개똥.-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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