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지국 막내공주전 1
신순옥 지음 / 청어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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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내 아가.
너를 버려 후계를 얻으려는 네 아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너를 지킬 생각은 않고 꿈속으로 달아나기만 했던 이 어미도 용서하지 말거라.

아가, 내 아가.
지금 어디를 떠다니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
살아 있기는 한 것이냐. 벌써 풍랑에 휩싸여 저승 문턱에 닿았으냐.

아가, 내 아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버려진, 바리데기 내 아가.
함에 넣어져 바다에 버려진, 바리데기 내 아가.
어미도 너를 따라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지만,
너의 여섯 언니들이 너무 어리디어리구나.
어미 없는 이 궁에서 여섯 공주가 겪을 설움을 생각하니,
차마 너를 따라갈 수가 없구나.

아가, 내 아가.
어화둥둥, 품에 안고 젖 한 번 못 물린 내 아가.
아비 어미는 너를 버렸으되, 너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란다.
왕자가 필요한 이 왕조가 공주를 버렸을 뿐, 네가 버려진 것은아니란다.

아가, 내 아가.
네가 만약 하늘의 뜻으로 살아난다면
이 비정하고 참혹한 궁으로 돌아오지 말거라.
네 만약 살아 난다면
너를 버린 이 궁을 그리워하지도 찾지도 말고,
버려졌다 슬퍼하지도 말고 잊혀졌다 아파하지도 말고
훨훨 자유롭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거라.-17~18쪽

아가, 내 아가,
너를 버린 이 아비 어미를 용서도 이해도 하지 말거라.
살아만 있다면, 살아만 난다면 꼭 그리하거라.
어미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 몸 안의 씨앗을 말리고 너를 잊지 않는 것 뿐이구나.

그날 밤 가락이 대동해 온 의원이 왕후의 처소를 다녀간 후, 길대부인 다시는 회임하지 못하였다.-18쪽

한편 왕후가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낸 다섯 딸들은 제각각 처한 입장 복잡하여 제가 사는 나라에서 늦게 출발하니 아흐레가 되도록 도착하지 못하였다. 누구는 시아버지 상중이고, 누구는 남편이 다쳤고, 누구는 자식이 아프고 또 누구는 해산을 앞두고 있으니 쉬이 친정으로 걸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오지 못하고 있는 다섯 공주와 중해져 가는 어비대왕의 병세로 궁 안팎이 소란스러운데, 바리는 바리대로 길대부인이 명하여 받는 가르침마다 일을 터뜨렸다. 글공부하라 글선생 붙여주니 글선생과 내기 장기 두어 글선생이 갖고 있는 서책이며 문방사우를 싹쓸이로 쓸어담고, 무예 익혀라 칼선생 붙여주니 어디서 그런 암수는 배웠는지 검으로 제압당할 것 같아지자 모래를 확 뿌려대 칼선생 눈을 이레 넘게 장님을 만들고, 국궁 쏘아라 활잡이 붙여주니 뒷산에 있는 토끼 잡는다고 마구 활을 쏘아대 내관 엉덩이에 활을 꽂지 않나, 이번엔 기마라도 익혀라 경마잡이 붙여주니 어떻게 말을 몰았는지 궁궐 대대로 가꿔 온 모둠꽃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뿐이면 아직 배움이 설어서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막내공주 하는 짓이 또 가관이었다.-246~247쪽

시동 아이들 모아놓고 품바타령 가르치니 궁 이곳저곳에서 얼씨구씨구 절씨구씨구 안 죽고 또 왔다 노래를 해대고, 겨울 대비해야 한다면 궁 뒷산에 있는 귀하디귀한 소나무 잣나무를 베어다가 차곡차곡 장작을 쌓아놓질 않나, 냄새 잘 맞는 검덕이 풀어 시녀와 내관들이 제 처소에 숨겨놓은 곶감이며 밀과를 싸그리 빼내어 할매 할매 갖다준다 숨겨놓으니 이를 지켜보는 시녀와 내관들이 막내공주 오늘은 무슨 일 칠까 불안불안 제 처소에 둔 음식 사라졌나 기웃기웃 정신이 없었다.
허나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바리가 일을 치는데, 왕후 길대부인 대왕마마 중해진 용태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 아니면 바리 하는 짓이 모다 귀엽기만 한 것인지 시녀와 내관들이 꼬박꼬박 막내공주 사고 친 일을 아뢰어 바칠 때마다 흐뭇해하며 고개만 끄덕이는구나.
막내공주가 글선생과 내기 장기한 일에는 우리 막내가 그리 영특하냐며 되묻는가 싶더니, 칼선생에게 모래 뿌린 일에는 우리 막내 맞대응이 보통이 아니구나 칭찬을 하고, 내관 엉덩이에 활 꽂은 일은 우리 막내 그 조그만 사람 엉덩이 어떻게 활을 맞혔을꼬 신기해하고 -246~247쪽

모둠꽃밭 쑥대밭 만든 일은 원래부터 그 꽃밭 진력이 나던 참이었는데 이참에 갈아엎고 새로 심어야겠다며 역성을 드시었다. 그뿐이랴. 시동 아이들에게 품바타령 가르친 일은 궁 안에서도 바깥세상 알아야 하느니라 오히려 제대로 배워라 훈계하시고, 소나무 잣나무 베어낸 일은 우리 막내가 그리 부지런하냐 흐뭇해하시고, 검덕이 풀어 궁에 있는 요깃거리 싹 쓸어가는 일엔 애가 못 먹고 커서 그런다며 가슴 아파하시니 시녀와 내관들 막내공주 좀 다스려 달라는 심정으로 달려왔다가 한숨만 내쉬며 곤전을 나섰다.-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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