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2 - 산문 김수영 전집 2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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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

 

 

우리한테는 사실상 옷이 없다.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요즈음 흰옷을 입는 것은 시골의 농사꾼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소 팔러 들어오는 시골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요즈음 서울 도심지서는 흰옷 입은 사람 구경은 돈을 내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서울의 근교, 아니 내가 사는 마포만 해도 아직은 나이먹은 밭쟁이 영감들이 흰 바지저고리에

마고자까지 입고 사고라져 가는 문턱에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의 주위에는 넝마도 못 걸치고 떨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태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 욕심, 욕심.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東學)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군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그러니까 저 첫번째 별은 너의 엄마별

그러니까 저 둘째번 별은 나의 엄마별

그러니까 저 셋째번 별은 나의 주의 별

 

 

 

자하문 고갯길에

아카시아 낙엽이

돗자리를 깔고

 

 

의좋은 부부라도 지나가면

좀 쉬었다 가란 듯이 ㅡ

 

 

인왕산도

얼룩진 눈물을 닦고

새 치마를 갈아입으니

앳된 얼굴이 참 예쁘고 곱네

 

 

일요일은

꼭 잠긴 창을

곧장 열라고 보챈다

 

 

 

여기는 뚝섬

지난여름의 상황들이

벗어 놓은 헌 옷같이

포플러 가지에 걸려 있다

조랑말 꽁무니에 매달려

인생은

낙일(落日)에 기울어지고

 

 

 

'진달래'와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우고

복권을 사 본다

 

 

가만히 울고 있는

파리한 그림자는

 

 

나와

또 누구인가.

 

 

실은 넌 이 세상 아무 데도 실재하지 않는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돠지요

 

 

날 긇다 말아라

가장(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 붙이면 님이지

 

 

화문석 돗자리

놋촉대 그늘엔

70년 고락(苦樂)을

다짐 둔 팔벼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 얻은 팔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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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진주는

자라난 내 고향

돌아갈 고향은

우리 님의 팔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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