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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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달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돌아오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초봄의 뜰 안에

 

 

초봄의 뜰 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황폐한 강변을

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의 파편이

저 멀리

흐른다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 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 냄새가 술 취한

내 이마에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의 다른데

옷을 벗어 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고독은 신의 무 재주와 사기라고

하여도 좋았다

 

 

 

 

 

부정한 마음아

 

 

밤이 밤의 창을 때리는구나

 

 

너는 이런 밤을 무수한 거부 속에 헛되이 보냈구나

 

 

또 지금 헛되이 보내고 있구나

 

 

하늘 아래 비치는 별이 아깝구나

 

 

사랑이여

 

 

무된 밤에는 무된 사람을 축복하자

 

 

 

싸리꽃 핀 벌판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 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심연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 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들을 바라본다

진개(塵芥)와 분뇨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

그러나 심연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 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산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돼지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느데

올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라 갈 동네 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 두고

   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 버린 미소이다

 

 

허튼소리

 

 

 

조그마한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힘은 손톱 끝의

때나 다름없고

 

 

시간은 나의 뒤의

그림자이니까

 

 

거리에서는 고개

숙이고 걸음 걷고

 

 

집에 가면 말도

나지막한 소리로 걸어

 

 

그래도 정 허튼소리가

필요하거든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제일이지만

 

 

이북에 가면야

꼬래비지요

 

 

꼬래비 '꼴찌'의 전라도 사투리

 

 

 

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참음은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10분 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기적(奇籍)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신앙이 동하지 않는 건지 동하지 않는 게

신앙인지 모르겠다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

어제를 시를 다시 쓰러 가자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상허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상하지 않는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무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빝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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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5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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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1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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