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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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라는 것 말고는 이 소설에 대한 사전 지식이 나에게 거의 없었다. 제목과 책 표지만 보고서는 과연 이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 스릴러 같은 것은 절대 아닐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즉, '재미' 면에서 일단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굳이 읽은 이유는, 시도 그렇지만 소설도 결국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것인데, 나보다 어린 작가가 과연, 얼마나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래서 그 시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심사위원들이)상까지 줘가며 번듯한 작가로 입성시켜 줬는지, 한 마디로 얼마나 잘 썼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별로였다는 것이다.
역대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의 수는 이 책을 포함하여 총 11권이고, 이중에서 나는 8권을 읽었다. '달의 바다'는 역대 수상작들에 비해 상당히 밋밋한 소설이었다. 박민규나 박현욱 같은 유머(재미)나 패기도 느껴지지 않고, 김영하나 안보윤 같은 파격적인 시도도 없었다.(물론 파격에서도 또, 박민규가 최고였다) 굳이 비슷한 분위기를 찾자면 4회 수상작인 이신조의 '기대어 앉은 오후'가 떠오르지만, 역시 이신조 만큼의 새로움과 신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으로 작년 수상작인 '내 머릿속의 개들'보다는 나았다.
기둥 줄거리만 말하자면 간단하고, 진부하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를 하던 20대 중반의 여자가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할머니의 부탁으로 미국 고모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고모를 만나서 별 일 없이 밋밋하게 지내다가, 마지막에 고모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지만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고모를 보고 주인공도 삶에 열정을 되찾는다는 70년대 신파극 혹은, 초등학교 단체관람용 영화같은 분위기로 막을 내린다.
경장편이니 기둥 줄거리는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줄기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에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에피소드들은 대부분이 진부했다. 물론 따뜻함 같은 것은 느껴졌으나 그 역시도 진부한 느낌이었다. 또한 이런저런 문장들에서 등장하는 비유들도, 뭐 딱히 새롭거나 좋은 게 없어, 종종 한숨만 나왔다.
특히 이 소설에서 재미와 공감을 느끼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들 때문이다. 나는 도무지 캐릭터들에 동화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나는 느낄 수가 없어, 자꾸 거리감만 생겼다. 그 이유는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하나의 목소리만 들렸기 때문이다. 모두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가령 민이라는 친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이 친구를 여자로만 생각했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읽혔다. 그러니 나중에 수술, 어쩌고 하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부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제는 민이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그랬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버지도, 고모도, 고모의 친구도, 중학생 남자 아이도... 모두 한 목소리였다. 할머니의 대사는 전혀 할머니스럽지 않았다. 나이를 대충 따져봐도 70은 넘었을 텐데, 말투는 2,30대 젊은 여자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잦은 말다툼도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들의 대사만을 보고 있으면 도통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이유는, 아니 꽤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렇다. 심사위원들이 입을 모아 찬사를 쏟아냈던, 바로 그 편지 글들 때문이다.  
나는 이 편지글들이 심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심사평까지 읽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설의 시작, 첫 번째 편지를 읽을 때의 감동은 꽤나 컸다. 박민규에 이어서, 신인답지 않은 신인이 등장했구나, 이런 기대와 설렘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메인 스토리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기대는 무너졌다. 주인공이 자살 리스트를 작성하는 대목에서, 역시 신인의 글이구나 싶었다.
문제는 편지 글과 메인 스토리의 문장들이 '문학적 감식안' 같은 게 미약한 나 같은 평범한 독자가 봐도 제법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한 작가가 썼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두 부분의 문장은 확연하게 선이 그였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났다. 선 저쪽의 눈이라면 과연 신뢰할 만한 작가의 눈인데, 글쎄 선 이쪽의 눈이라면...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중간에 등장하는 작은 반전도, 나는 그래서 이미 예측을 할 수 있었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편지 글의 내용이 메인 스토리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이 편지들은 어쩐지 따로 놀고 있는, 잘 씌어진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편지 글은 그저 편지 글들 나름대로 참, 멋졌을 뿐이다. 그래서 만약 그 멋진 편지 글들이 빠졌다면 정말로 이 소설은 당선이 되지 못했지도 모른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편지 글에 너무 많은 신경을 쏟다보니 정작 메인 스토리를 이어나갈 때는 힘이 빠졌던 것인가... 알 수 없다.
 
정한아라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작가의 역량은 다음 작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 같다.
정한아의 진짜 색깔이 무엇인지, 그녀의 시선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적어도 다음 작품까지 봐야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달의 바다'의 아름다운 편지 글들 같기를 기대한다.

일곱 통의 편지들은 정말 좋았다. 특히 첫번째와 마지막 편지의 몇몇 문장들은 가슴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 편지 글을 쓸 때의 깊이 있는 시선으로 계속 인생을 응시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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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0 16:06   좋아요 0 | URL
저도 솔직히 별 셋 이상은 과하다 생각했지만 별 넷을 주고 말았죠.
가능성을 보려구요 ^^

리아트리스 2007-09-12 01: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차기작에서 작가의 진가가 드러날 것 같더군요. 이번 작품은 솔직히 판단하기가 애매했죠.^^
 
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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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딸을 아내로 둔 운 좋은 남자 스기무라. 걱정도 없고, 욕심도 없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이 남자가 탐정으로 등장한다. 물론 탐정 신분증 같은 게 있는 정식 탐정은 아니다. 그래서 더 평범하고, 힘 없는 탐정이며, 사소한 사건을 소극적으로 풀어갈 수 밖에 없다. 미미여사는 이런 아마추어 초짜 탐정을 탄생시킨 것이다.
 
대기업 회장인 장인의 운전기사가 자전거에 치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론 삶을 일순간에 뒤흔들어 놓을 크고,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대단할 것도, 매력적일(?) 것도 없는 사건이다. 사지가 절단되는 연쇄 살인사건이나 수백억씩 횡령하고 도망다니는 범법자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이런 개인의 죽음은 차라리 소박하고 밋밋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죽은 운전기사의 두 딸들이 아버지에 대한 책을 쓰겠다며 스기무라에게 출판을 의뢰해 오면서 이 밋밋한 사건의 중심으로 스기무라는 한걸음씩 걸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아버지(운전기사)를 치고 달아난 자전거 뺑소니범은 누구인가? 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해 나갈수록 초점은 점점 다른 곳을 향한다. 범인이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로 옮겨졌다가, 다시 두 딸들에게로 옮겨진다. 처음의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또다른 의문들이 딸려 올라오고,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의 문까지 열게 된다. 스기무라가 밝혀내는 마지막 진실은 그래서 전혀 엉뚱한 것이고, 그래서 더욱 잔인한 것이 되고 만다. 차라리 이 사건을 맡지 않았다면 더 좋은 결말이 나왔을 지도 모른다. 이런 소박한 사건의 한쪽 끝에 알고 싶지도 않은 전혀 엉뚱한 진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도시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곳곳에 추악하고 무서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전하게 양지로 둘러싸인 도시란 있을 수 없다. 어느 도시나 그늘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양지가 빛나면 빛날수록 음지는 더욱 습하고 무서울 수 있다.
진실도 그렇다.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흙속에 파묻힌 반지를 찾으려 흙더미를 뒤집다보면 원하지 않던 다른 것들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흙속에서 수 많은 다른 것들을 끄집어 낸 후에야 잃어버린 줄 알았던 반지가 고스란히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진실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나타나 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는 듯한 조금은 낯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미미여사 특유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녀의 소설은 늘 그렇다. 타인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사건이지만, 그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무서운 갈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또 그 원인은 당사자들과 멀리 동떨어진 타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하나의 범죄 속에는 개인과 사회의 욕망과 이기심이 모두 녹아 있음을.
이유, 모방범, 화차 같은 역작에는 못미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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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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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 너무 웃긴다. 이 작가, 전직이 코미디언 아냐? 싶을 정도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예상치 못한 유머들이 마구마구 튀어 올라, 시종 웃다가 책장을 덮게 된다. 그리고 웃음의 자락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경쾌한 힘이 가득가득 실려 있다.
2004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공중그네'의 주인공 이라부와 마유미 커플이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인더풀'은 2002년에 출간되었고, '공중그네'에 앞서 먼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하지만 출간 시기 따윈 상관없다. 엽기 커플이 엮어가는 에피소드들은 제각각 독립적이라 어느 것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이라부와 마유미만 등장하면 그저 만사가 OK다!
(물론 전체적으로 '공중그네'가 '인더풀'에 비해 별 반 개 정도 더 앞선다. 보다 완성된 이라부 캐릭터를 보고 싶다면 '공중그네'를 필히 읽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세상 모든 고민과 문제들을 일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엽기 커플이 있다. 어린 아이 같은 대책없는 순진함과 황당한 장난끼로 똘똘뭉친 거대한 체구의 엽기 의사 이라부와 매사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사만 놓는 육감적인 몸매의 미녀 간호사 마유미가 그들이다.
환자(처음에는 분명 환자라고 인식한다)들은 그들의 지하 세계로 발을 들인 후, 차츰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끝내 멀쩡한 사람이 되어서 지상으로 걸어나간다. 그 지하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마법사도, 초능력자도, 외계인도 아니다. 특별한 약물을 투여하는 것도, 거창한 수술 같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꾸준히 주사만을 놔 줄 뿐이다. 그리고... 그냥 노는 거다. 주사 맞고, 한바탕 신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병 따위는 없다. 자신이 지극히 정상인으로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라부의 처방은 간단하다.
환자와 똑같은 위치에서 같이 노는 거다. 그렇게 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완화시킨다. 완화된 문제를 환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직시할 수 있도록 만든다. 가만히 직시하면 지금껏 심각하게 끙끙 앓아왔던 그 문제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스스로 자각한다. 자각의 순간 환자는 더이상 환자가 아니다. 환자는 유쾌한 발걸음으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라부는 환자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찰싹)달라붙어 그저 신나게 논다. 신나게 놀고 나면 환자는 사라지고, 그저 인간만 남는다.  지하 세계에서 장난꾸러기 이라부와 무뚝뚝한 섹시녀 마유미와 더불어 잘 놀고 지상으로 올라서면, 환자는 인간으로 돌아가고, 덤으로 세상을 살아갈 충천된 힘까지 얻게 된다.
 
현대인은 많은 문제와 스트레스 속에서 늘 인상을 찌푸리며 살아간다.
무엇을 하든 인상을 찌푸린다. 거지도, 부자도, 잘난 놈도, 못난 놈도, 학생도, 어른도... 그래서 찌푸리는 게 병인줄 안다. 심각하게 병원을 찾아와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고 있는지를 토로한다.
그러나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99%는 그저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다. 찌푸린 인상을 그저 펴기만 하면 대부분 사라지는 문제들이다. 더구나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99%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이 억지로 문제를 껴안고 있는 경우들이다.
이라부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가슴에 안고 있는 문제들을 스스로 놓아버리게 만든다.
문제 해결은 그렇게 간단하다.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는 일면 엄청나게 심각해 보여도, 또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인더풀'에는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다섯 명의 환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환자가 아니다. 환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환자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환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마다 안고 있는 문제들은 현대인들의 99%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바로 '강박증'이다. 현대인은 대부분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강박증은 따로 치료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강박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도 대단히 어려울 수도 있고, 또 대단히 쉬울 수도 있다. 지상의 세계에서 본다면 어려운 일일 수 있으나, 이라부와 마유미가 사는 지하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된다. 그래서 이라부는 환자들의 고민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 이라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고민이 전혀 심각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라부는 자신과 똑같은 심정을 환자가 느끼도록 해 준다.
즉, 네가 안고 있는 문제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 나처럼 해 봐라. 나를 따라 해봐~ 아, 그 전에 일단 주사부터 한 대 맞고~ 명색이 병원이니 주사는 맞아야지~ 더구나 엄청나게 섹시한 미녀가 놔 주는 것이니 안 맞을 수 없잖아~ 자, 한 대 맞고, 노는 거야~ 놀다보면 인생은 즐거워지고, 그 딴 고민은 인생을 즐겁게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당신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는 어쩌면 아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지하 세계에서 이라부와 마유미를 만나보면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즐겁고, 천진난만하게, 이라부처럼 말이다.
 
'남쪽으로 튀어', '공중그네'에 이어서 세번째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으며 새삼 감탄한다.
이 작가, 정말 프로다! 작가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 정도 유머에, 이 정도 스토리는 만들어 낼 줄 알아야 작가지! 그 참, 이야기 같지도 않은 구태의연하고 싱거운 이야기를 들고 작가랍시고 폼 잡는 짝퉁 작가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오쿠다 히데오 같은 출중한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필시 행운이다. 고민남녀가 이라부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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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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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두번째 소설집은 대체적으로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무 이상 없이 견고하게 지켜왔다고 믿어온 당신의 오늘이, 가치관이, 어느 순간 금이 가거나 무너져 내린다면, 벌어진 틈새 사이로, 무너진 조각들 사이로 당신이 전혀 짐작하지 못 하고 있던 진실이, 혹은 생의 이면이 드러난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당신의 오늘은 과연 안전한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주제를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삼풍백화점'이다. 고도로 성장한 자본주의의 표상과도 같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나'의 마음 한 켠도 무너진다. 그 한 켠에는 20년 가까이 제도교육의 장에서 길들여 진 나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종속되어 구태의연하게 지내왔던 지난 24년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것들이 무너지면서 기성세대가 이룩한 사회 가치관에 편입되어 어정어정 걸어왔던 나의 삶에도 변화가 생긴다. 24년을 지배해 온 무료하고 무력했지만, 무탈했던 세계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즉, '나'는 그 이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분히 작가의 자전 소설로 읽힐 수 있는 '삼풍백화점'은 이 소설집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담고 있음은 물론, 전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실린 소설들과는 시선과 주제와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 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첫번째 소설집 이후 4년만에 정이현의 시야는 더욱 먼곳까지 틔였으며, 말하고자 하는 주제 또한 보다 보편적인 공감과, 대중적인 감동을 아우를 수 있는 쪽으로 변했다.
정이현은 확실히 변했다. 첫번째 장편인 '달콤한 나의 도시'는 다분히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연장선 상에 있는 듯 했으나, 두번째 소설집인 '오늘의 거짓말'은 앞서의 두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정이현 특유의 순발력과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으나, 시선은 더욱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워졌으며, 다루는 이야기와 주제는 보다 넓고, 깊어졌다.
 
또한 번득이는 상상력도 전작들에 비해 훨씬 좋아졌는데, 그래서 이번 소설집에서 그야말로, '소설적 재미'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이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든다. 현실을 뒤흔드는 생각(상상)지도 못한 난감한 사건(균열)이 발생하고, 이야기는 위태롭게 약동하며 결말을 예측할 수 없게 한다.
이혼한 전처가 키우던 개가 어느날 택배로 배달되어 지고, 마흔아홉번째 생일날 아들이 저지른 기막힌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고, 아파트 위층에서 이미 죽은 전직 대통령을 만나고, 담배를 사러 나왔다가 아파트 문이 잠겨 거리를 배회하고 몸에서 이상한 악취가 나기 시작하고, 2022년 미래의 한 연구원이 2004년 과거 한 여고생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게 되고, 정신상태가 스물다섯살에서 멈춰버린 친구를 만나게 되고, 유아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남편을 의심하게 되고, 흠 잡을 것이 없어 보이던 유능한 남자친구의 기이한 성적 취향을 알게 되고...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섬뜩한 현대인의 초상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신선한 문장들로 속도감있게 그려진다. 가슴을 졸이며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리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솔직히 정이현이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첫번째 소설집을 읽었을 때만 해도...
시종 인상을 찌푸리며 정말 짜증스럽게 읽었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비해 '오늘의 거짓말'은 같은 작가가 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읽었다. 흥미진진하게, 감탄을 하면서...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분위기로 소설을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여성들의 쿨한(척 하는) 연애담은 이제 그만 쓰고, '삼풍백화점'이나 '오늘의 거짓말' 같은 소설들을 더 많이 써 줬으면 좋겠다.
이런 소설집이라면 책값 만 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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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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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은 한 마디로 지겨운 소설이다.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심사위원 평 중의 하나다. 김형경은 이 소설을 두고 '도박과 여자에 관한 이야기의 모든 뜨거운 통념들을 조용히 배반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조용히 묻고 싶다. 그럼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도박과 여자에 관한 이야기의 모든 뜨거운 통념은 무엇이냐고? 이 평은 아무리 봐도 그저 생각없이 툭 던진 주례사 평에 지나지 않는다. 세번째 수상작의 면면을 살피기 위해 일년을 기다려온 독자들을 조용히 배반하는 평인 것이다. 
 
미리 얘기하는데, 나는 이 소설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칭찬을 해 줄 것이 없다. 우선 김형경이 한 저 평을 그대로 뒤집는 것이 나의 첫번째 평이 될 것이다. 
즉, 이 소설 '슬롯'은 
'당신이 도박과 여자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뻔하디 뻔한 통념'
바로 그 이야기들이다. 
바로 내가 생각하고 우려했던 그 뻔하디 뻔한 통념들이 조금의 배반도 없이 그대로, 오히려 짜증스러움만 더 가중되어 묵묵히 펼쳐지고 있었다.  
 
도박과 여자에 관한 이야기란다. 그건 맞다. 그러나 지리멸렬한 도박과, 지리멸렬한 여자 이야기다. 밋밋하게 시작해서, 지루하게 전개되고, 짜증나게 늘어졌다가, 다시 밋밋하게 끝난다.
 
남자가 카지노로 간다. 헤어졌던 옛 애인과 함께.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카지노를 어슬렁거리면서 슬롯머신을 당기거나 재미도 없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지루한 인용만 늘어놓는다. 가끔씩 박식한 척도 하지만 매력적이지도 않고, 감탄스럽지도 않다. 
매력있는 캐릭터는 한 명도 없고, 서사는 대단히 빈약하다.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죄다 시답잖은 것들 뿐이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안드는 것은 작가의 여성 판타지다. 
옛 애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남자와 카지노로 가고 한 방을 쓴다. 그 여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며 아직도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카지노에서 젊고, 역시 아름다운 여자를 새로이 만난다. 그 여자도 어쩐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또, 일곱살짜리(도무지 일곱살짜리 같지 않은) 예쁘장한 꼬마 여자아이를 만난다. 그 여자도 어쩐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또, 꼬마 여자아이의 엄마(역시 아름다운)도 만난다. 그 여자도 어쩐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술에 취해서 함께 호텔까지 간다.
장난하나, 지금? 
세상 여자들이 애,어른 할 것없이 죄다 자기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남자가 대단한 미남도, 부자도 아니고, 성격이 좋거나, 유머러스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되면 이건 판타지가 아닌가? 웃기지도 않는 판타지다. 어설프게 하루키를 흉내낸 것도 같은데 하루키 소설만의 멋과 매력이 모두 빠지고, 분위기가 괴상하게 변질되면 이런 지루하고 짜증나는 판타지가 나올지 모르겠다.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여자들의 심리도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짜증날 뿐더러 여자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사 자체도 딴에는 쿨하게 보이려 애썼는지 몰라도 식상함과 어색함이 반반일 뿐이었다. 특히 일곱살짜리 아이 명혜의 말이나 행동은 상당히 유치하고(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어색하고, 거북스러웠다. 꼬마아이를 왜 그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지만, 기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부여되는 각자의 삶과 사연들이 너무도 뻔한 것이거나, 재미없는 것이라 굳이 소설이라는 서사장르를 통해 그것들을 구현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뻔하거나 재미없거나... 이 소설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실에서 크게 실망했다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가까스로 만회가 되었는데, 슬롯에서 다시 미실 이상의 실망을 하게 된다. 단단히 실망을 했다. 실망이란 작가와 심사위원 모두에 대한 것이다.  
정녕 이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없었단 말인가? 이 작품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이 정말로 없었단 말인가? 1억 고료의 세계 문학상 응모작 수준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상의 존폐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심사위원들은 가독성이라는 말로 이 소설을 칭찬하고 있다. 가독성이라는 말이, 특히 최근의 국내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입에서 너무 쉽게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뽑아놓고는 무조건 한다는 소리가 가독성 있는 작품이란다. 그렇게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인데 왜 안 팔리는 것일까? 왜 일본 소설들에 줄창 밀리고 있는 것일까?  왜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까? 
가독성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으면 한다. 
이 소설은 근자에 읽은 가장 실망스런 한국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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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18 21:03   좋아요 0 | URL
솔직한 평가에 맘이 확~ 땡기는군요. 물론 제가 사서 읽지는 않겠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보기는 해야겠어요 ^*^

리아트리스 2007-08-20 00:15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정말 실망했지만, 또 재미있게 본 분들도 의외로 많더군요. 어차피 소설의 평가는 평론가가 아닌 독자의 몫이니, 님은 또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 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