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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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서사 속에 갇혀 운명을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 삶의 서사를 견고하게 써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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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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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소설이라는 장르로 매우 즐겨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이 갑자기 일상의 작은 균열로 인해 이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루키의 중편소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신작 장편 '가호'도 그렇다. 그림책 작가인 스물여섯 살 여자 가호는 언제부턴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원래의 세상이라면 개미핥기가 눈앞에 나타나 사람처럼 말을 걸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루키 소설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 속에서 가호는 원래의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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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문득 드는 생각은 어쩌면 소설 첫 장면부터 가호는 이미 이계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고, 그 이계란 다름 아닌 하루키라는 작가가 써 내려가는 소설 속 공간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가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인물이지만,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거대한 창작자의 캔버스 위에 불쑥 던져진 것이다. 어리둥절한 채 작가가 파놓은 작위적인 설정과 가혹한 플롯에 끌려다니면서 매 순간 위화감과 부조리를 느낀다. 개미핥기가 시키는 대로 먼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들의 심부름을 하는 등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모습은 작가의 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이리저리 휩쓸리는 인간의 모습과 같다.

소설 속 가호는 점점 각성한다. 그 자신도 그림책을 쓰는 창작자인 것이다. 자신이 쓰는 그림책 속 주인공이 잃어버린 길을 찾아 나서고 운명을 극복해가는 것처럼 가호도 피조물의 위치에 마냥 순응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이 세계의 중심은 너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가호를 향한 말이고 가호가 창작하는 그림책 속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고, '가호'라는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하루키가 던지는 말일 것이다. 가호는 작가가 짜놓은 판에 박힌 캐릭터에서 자신의 서사를 직접 이끄는 주도적 주인공으로 변해간다. 결국 소설이라는 이계 속 숙적인 흰개미 여왕과의 최종 승부에 돌입하며 잘못 들어선 세계의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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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는 삼촌과의 대화에서 발터 벤야민이 말한 '좋은 이야기에는 반드시 유용성이 포함되어 있다'라는 말을 되새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가호라는 인물을 통째로 소설이라는 이계에 던져 넣음으로써 우리에게 증명해 보인 이야기의 쓸모는 무엇일까.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이나 악의가 기습처럼 찾아오곤 한다. 하루키는 가호의 모험을 통해 문을 닫고 도망치는 대신 그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일상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한다. 삶의 통제 불능성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 역설한 것이다. 이건 결국 자기 서사의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일 것이다. 방심하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남이 쓴 '소설 속 인물'로 갇혀 버릴지 모른다. 그럴 때는 빨리 각성하고 남의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싸워야 할 대상이 있으면 싸워서라도 반드시 자기 이야기로 돌아와야만 한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도 우리는 싸워야만 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편으로 이번 하루키의 신작은 작가가 과거에 발표했던 단편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실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를 장편화한 게 '가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플롯이나 설정, 캐릭터를 따져보면 유사점이 많다. 그때는 곧 재앙을 일으킬 땅속 거대 지렁이에 맞서 싸웠다. 어쩌면 슈퍼히어로 서사일 수도 있다. 다만 '가호'는 철저히 개인의 서사와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깃든 무수한 타자들, 흰개미 여왕만큼이나 기괴한 그 타자들이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이다. 서사의 중심에 서서 이 세상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루키 소설답게 소설 속에 고양이가 여럿 등장한다. 하루키의 지난 작품들과 비교하면 평년작 수준에 머물 것 같다. 사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나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처럼 단편이나 중편, 경장편 정도로 썼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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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
최인서 지음 / 다이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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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와 세스지의 영향으로 국내에 3류 괴담소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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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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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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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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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용을 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파묻힌 거인'은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었다. 

'남아 있는 나날'은 회고를 통해 자신의 삶과 영국의 역사를 되짚는 전형적인 고전 형식의 드라마였는데, '파묻힌 거인'은 용과 도깨비, 전사와 기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다. 


국적도, 연도도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의 어느 세상의 어느 인간(혹은 종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판타지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드라마는 빛을 발한다. '남아 있는 나날'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훗날 회고를 통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반성, 자기 성찰 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자신의 주인을 한없이 훌륭한 신사였다고 믿었고, 그런 주인을 성심을 다해 모셔온 자신 역시 최고의 집사였다고 자부하는 스티븐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티븐슨은 그토록 훌륭하다 믿었던 주인이 나치를 위해 일한 전범이었으며, 유대인 하녀들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하는 등 그리 훌륭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인을 악당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을 악당으로 치부한다면 그를 위해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한 스티븐슨의 삶조차도 무너지게 된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악당의 충실한 부하 노릇밖에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스티븐슨은 예전부터 자신의 주인이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것을 종종 지켜봤었다. 적어도 그런 낌새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주인의 허물들을 애써 지워나갔던 것이다. 집사로서 누구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흠결하나 없는 훌륭한 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년에 가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만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려 한다. '스티븐슨의 역사'를 송두리 째 부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파묻힌 거인'에서도 비슷한 고뇌와 갈등, 반성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암흑의 시대를 무력과 전쟁으로 종결지은 아더 왕의 역사가 등장한다. 무력과 전쟁, 피와 폭력으로 성취한 평화와 영광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무력으로 성취한 평화는 언제든 무력으로 다시 깨질 수 있다. 이쪽 종족이 모조리 죽어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저쪽 종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쪽 종족이 남아 있으면 이쪽 종족의 평화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는 저쪽을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전쟁과 평화. 반복되는 전쟁과 평화 속에서 쓰이는 피의 역사. 작가는 이 피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바라보고, 상기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들의 마을을 찾아 떠나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등장한다. 그들은 망각의 입김을 지닌 용의 횡포로 인해 과거의 기억들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서서히 기억이 돌아올수록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잊었던 기억은 잊었던 역사를, 잊었던 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진 기억들은 모조리 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때 칼을 쥔 내 손으로 어린 소년에 불과한 적병의 목을 친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평화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젊은이들의 육신을 베고, 찌르고,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수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인들에게서 아버지와 남편을 앗아간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던가.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런 만행들이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만행은 되풀이될 것이다. 피의 역사는 번복되지 않으면, 반복된다. 

액슬은 괴로워한다.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면 역사도 부정된다. 평화의 의미도 퇴색된다. 기억과 망각의 기로에서 액슬은 고민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용의 처단을 두고 늙은 기사와 젊은 전사가 대립하는 소설의 절정 부분에 있다. 

늙은 기사는 용을 지키고 싶어 하고, 전사는 용을 죽이려 한다. 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기사와 전사의 마지막 싸움은 읽는 이를 숨 막히는 전율로 몰아간다. 

피로 승리를 쟁취하고, 피로 역사를 세운 장본인은 역사의 전권을 손에 쥐는 순간 '피'는 지우고 '역사'만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울 수만 있다면 '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려 드는 것이다. 그에게는 망각의 입김을 내뿜는 용이 필요한 것이다. 용의 죽음은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다시 깨진다. 피 흘리며 죽어간 종족의 후예들이 눈을 뜨는 순간 다시 세상에는 피가 뿌려진다. 그래서 늙은 기사는 이미 병들고 지친 용을 끝까지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작품은 결말로 갈수록 깊은 비애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강하고 무서웠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하고 몰락하기 마련이다. 한때 사바나를 주름 잡았던 건강한 수사자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병들기 마련이고, 결국 또 다른 젊은 수사자에게 무리를 빼앗기고 쫓겨나거나 죽음을 맞는다. 목숨을 걸고 용을 지키려는 늙은 기사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용을 죽이려는 젊은 전사의 먼 훗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전사도 나이 들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을 부수고 없애고 싶어 하는 누군가와 맞서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잔인한 것이고, 역사는 잔인한 시간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상처와 후회의 그림자를 남긴다. 

역사 속에 깃든 망각의 그림자들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망각의 그림자 속에 덮힌 핏자국들을 다시 일깨워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의 줄기 속에는 더 이상 핏자국도, 그것을 덮을 망각의 그림자도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    

이 쓸쓸한 판타지를 통해 작가가 던진 질문들은 간단하다면 간단할 수도 있는데 나는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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