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테르 연인
박소미 지음 / 바른북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흔히 시를 읽는 행위를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는 것과 같은 속도와 방식으로 대하곤 한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시 한 편은 눈길만 스치듯 지나쳐도 금방 다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가벼운 독서 방식은 현대시를 마주했을 때 종종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읽기는 금방 읽었으나 이해나 공감은 전혀 안되기 때문이다.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맥락 없는 파편적 이미지들이 이해와 납득은커녕 ‘읽는 일’ 자체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난해함으로 현대시가 점점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도 결국 읽히기 위해 쓰였을 것이다. 더 많은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창작 작업을 했을 거란 말이다. 그럼에도 결과물이 독자에게 벽처럼 느껴진다면 도대체 그 고통스러운 작업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오랜만에 시집 한 권을 읽으며 시의 감상 방식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집에 실린 시만 해도 반 이상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반은 포기하고 반만 읽고 느낀 걸로 만족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우리가 시를 대하는 ‘읽기의 호흡’에 어떤 오해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 한 권을 읽는 데 열 시간이 걸린다면, 겨우 100쪽짜리 시집 한 권을 읽는 데는 과연 얼마나 걸려야 마땅할까? 우리는 흔히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시집을 단숨에 훑어내리곤 하지만 사실 시집이 얇고 여백이 많은 이유는 그 한 권을 제대로 소화하는 데 소모되는 사유의 밀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설 한 권을 읽는 만큼의 시간을 시집 한 권에도 투자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래야 시집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베르테르 연인'에 실린 시들을 대체로 두세 번씩 읽었다. 한 번에 와닿는 시는 한 번으로 족했으나 한 번에 와닿지 않는 시는 조금이라도 더 와닿을 때까지 재독한 것이다. 그러자 어렴풋이 잡히는 게 있었다. 한 번 읽을 때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던 낯선 문장도 두 번, 세 번 거듭 읽으면 결이 달라진다. 일단 낯설었던 단어와 표현들이 낯익어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네 번, 다섯 번을 반복해 읽으면 모호했던 장막이 걷히거나 흩어져 있던 파편들이 모이면서 서서히 익숙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시에도 결국 세상 사는 이야기가 담긴 것이다. 시의 내면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형상은 대부분 우리가 흔히 아는 익숙한 세상과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비록 시인의 마음을 온전히 가늠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반복의 시간 속에서 독자 스스로 ‘나름의 해석과 공감’에 도달할 수는 있다. 그렇게 나름의 감상을 끝낼 수 있다. 결국 시 감상의 핵심은 ‘재독(再讀)’에 있는 것이다.

박소미의 '베르테르 연인'은 제목에도 언급했듯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정서적으로 맞닿아 있다. 고전이 가진 비극적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시적 은유로 재해석하여 현대 사회의 고독과 무력감, 혹은 안타까움을 그리고 있다. 괴테가 살았던 그 시절이 아니더라도 청춘의 고통과 방황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띤다. 누구나 삶의 특정 시기에는 세상과 불화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이루어질 수 없는 대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시인은 감성적 어조로 세상 곳곳의 풍경을 이야기하며 고독과 상실, 그리고 희망과 치유에 대해 사유한다.

'베르테르의 연인'을 읽으며 시 습작에 빠져 살았던 교교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세상의 스산함과 부조리, 내면의 분노와 조급함만 느껴지던 그때 나는 수많은 시를 노트에 끼적였고 그것이 내 심정을 대변하는 글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옆자리의 친구가 읽었다면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암호문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가족이 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대시의 난해함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멈춰 서서 생각을 채워 넣는 시간, 그리고 몇 번이고 되씹어 읽는 반복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낯선 돌멩이 같던 시어들도 가슴을 탁 치는 선명한 울림의 진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것이 시가 가진 매력이고 가치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는 리더십 - 심리적 안전감을 넘어 책임 안전감을 만드는 ‘AI 시대 리더’의 조건
김유리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기업과 조직의 풍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과거 리더의 주요 임무였던 데이터 분석, 최적의 경로 설정, 업무 분배와 같은 관리와 통제의 영역은 이제 기계와 컴퓨터 프로그램이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해 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방대한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 과거처럼 '나만 따라와라',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지시한다'는 식의 권위적인 리더십은 조직을 건강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힘들다. 리더가 지닌 경험과 지식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시대에 와서는 별다른 자산이나 가치가 되지 못한다. 오늘날 리더는 경험이나 지식, 판단력보다 다른 덕목을 갖춰야만 하는 것이다. 폰 하나만 조작해도 우주의 지식과 정보를 산더미처럼 캐낼 수 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이 시대에 인간 리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 리더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덕목은 무엇일까.




'보이는 리더십'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의 리더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책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의 리더는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조율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AI가 아무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조직이 나아갈 방향성과 윤리적, 철학적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런데 이 기준을 세우는 일조차도 혼자만의 판단과 권위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경청하고 포용하여 기준의 명확성과 가치를 확립해야 한다. 모두의 합의와 공감으로 구축된 기준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에 업무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 탄탄한 기준 위에서 구체적인 판단과 실행을 AI에게 위임할 때, 비로소 기술은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종 결정은 리더의 몫이다. 어떤 기준을 선택할 것인지도 리더의 몫이다. 이 결정이 바로 리더의 책임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다. 리더는 '결과의 주체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져야 한다. AI는 최적의 확률을 제안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한 실패의 대가를 치르거나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인공지능의 제안을 수용하여 내린 결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핑계를 대거나 기계 탓을 하는 것은 리더십의 방치이자 포기일 것이다. 진정한 리더는 AI 뒤에 숨지 않고 과정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만 한다. 실패를 마주했을 때 남 탓을 하는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각성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태도가 리더의 품격을 만든다. 이 책임의 순간에 리더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끝으로 저자는 감정 관리에 대해 기술한다. AI 시대 리더의 가장 대체 불가능한 역량이 바로 감정의 돌봄과 조율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접근하기 힘든 분야가 감정이다. 기술이 가져다주는 변화 속에서 구성원들이 느끼는 불안감, 번아웃,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보듬고 심리적 안전감을 구축하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구성원의 의견에 대한 경청과 포용도 기술적 기법이 아니라 감정의 조율 능력에 해당할 것이다. 감정은 말로도 표현되지만 몸으로도 표현된다. 리더의 말투, 손짓, 태도, 움직임 등이 모두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리더의 모습 전체에서 리더의 감정을 읽고 그 감정이 종종 팀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자세로, 어떤 목소리로, 어떤 방식으로 팀원들에게 다가가고 말을 건네는가에 따라 팀의 결속력과 리더에 대한 신뢰가 달라질 것이다. 구성원들의 감정을 다스리고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오늘날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일 것이다. 리더가 나와 팀원의 감정을 건강하게 다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협동과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리더십은 지식의 양이나 권위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합의와 조율을 통해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결과를 온몸으로 책임지며, 기술이 닿지 못하는 감정의 온기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자동화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인간적이자 본질적인 리더의 조건일 것이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조건과 덕목이 리더의 표정, 태도, 언어를 통해 팀 구성원들에게 보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용을 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파묻힌 거인'은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었다. 

'남아 있는 나날'은 회고를 통해 자신의 삶과 영국의 역사를 되짚는 전형적인 고전 형식의 드라마였는데, '파묻힌 거인'은 용과 도깨비, 전사와 기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다. 


국적도, 연도도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의 어느 세상의 어느 인간(혹은 종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판타지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드라마는 빛을 발한다. '남아 있는 나날'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훗날 회고를 통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반성, 자기 성찰 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자신의 주인을 한없이 훌륭한 신사였다고 믿었고, 그런 주인을 성심을 다해 모셔온 자신 역시 최고의 집사였다고 자부하는 스티븐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티븐슨은 그토록 훌륭하다 믿었던 주인이 나치를 위해 일한 전범이었으며, 유대인 하녀들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하는 등 그리 훌륭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인을 악당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을 악당으로 치부한다면 그를 위해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한 스티븐슨의 삶조차도 무너지게 된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악당의 충실한 부하 노릇밖에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스티븐슨은 예전부터 자신의 주인이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것을 종종 지켜봤었다. 적어도 그런 낌새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주인의 허물들을 애써 지워나갔던 것이다. 집사로서 누구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흠결하나 없는 훌륭한 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년에 가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만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려 한다. '스티븐슨의 역사'를 송두리 째 부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파묻힌 거인'에서도 비슷한 고뇌와 갈등, 반성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암흑의 시대를 무력과 전쟁으로 종결지은 아더 왕의 역사가 등장한다. 무력과 전쟁, 피와 폭력으로 성취한 평화와 영광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무력으로 성취한 평화는 언제든 무력으로 다시 깨질 수 있다. 이쪽 종족이 모조리 죽어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저쪽 종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쪽 종족이 남아 있으면 이쪽 종족의 평화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는 저쪽을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전쟁과 평화. 반복되는 전쟁과 평화 속에서 쓰이는 피의 역사. 작가는 이 피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바라보고, 상기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들의 마을을 찾아 떠나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등장한다. 그들은 망각의 입김을 지닌 용의 횡포로 인해 과거의 기억들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서서히 기억이 돌아올수록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잊었던 기억은 잊었던 역사를, 잊었던 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진 기억들은 모조리 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때 칼을 쥔 내 손으로 어린 소년에 불과한 적병의 목을 친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평화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젊은이들의 육신을 베고, 찌르고,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수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인들에게서 아버지와 남편을 앗아간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던가.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런 만행들이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만행은 되풀이될 것이다. 피의 역사는 번복되지 않으면, 반복된다. 

액슬은 괴로워한다.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면 역사도 부정된다. 평화의 의미도 퇴색된다. 기억과 망각의 기로에서 액슬은 고민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용의 처단을 두고 늙은 기사와 젊은 전사가 대립하는 소설의 절정 부분에 있다. 

늙은 기사는 용을 지키고 싶어 하고, 전사는 용을 죽이려 한다. 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기사와 전사의 마지막 싸움은 읽는 이를 숨 막히는 전율로 몰아간다. 

피로 승리를 쟁취하고, 피로 역사를 세운 장본인은 역사의 전권을 손에 쥐는 순간 '피'는 지우고 '역사'만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울 수만 있다면 '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려 드는 것이다. 그에게는 망각의 입김을 내뿜는 용이 필요한 것이다. 용의 죽음은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다시 깨진다. 피 흘리며 죽어간 종족의 후예들이 눈을 뜨는 순간 다시 세상에는 피가 뿌려진다. 그래서 늙은 기사는 이미 병들고 지친 용을 끝까지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작품은 결말로 갈수록 깊은 비애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강하고 무서웠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하고 몰락하기 마련이다. 한때 사바나를 주름 잡았던 건강한 수사자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병들기 마련이고, 결국 또 다른 젊은 수사자에게 무리를 빼앗기고 쫓겨나거나 죽음을 맞는다. 목숨을 걸고 용을 지키려는 늙은 기사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용을 죽이려는 젊은 전사의 먼 훗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전사도 나이 들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을 부수고 없애고 싶어 하는 누군가와 맞서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잔인한 것이고, 역사는 잔인한 시간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상처와 후회의 그림자를 남긴다. 

역사 속에 깃든 망각의 그림자들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망각의 그림자 속에 덮힌 핏자국들을 다시 일깨워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의 줄기 속에는 더 이상 핏자국도, 그것을 덮을 망각의 그림자도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    

이 쓸쓸한 판타지를 통해 작가가 던진 질문들은 간단하다면 간단할 수도 있는데 나는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의 크리스마스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코패스의 광기와 유머.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와 고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