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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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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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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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용을 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파묻힌 거인'은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었다. 

'남아 있는 나날'은 회고를 통해 자신의 삶과 영국의 역사를 되짚는 전형적인 고전 형식의 드라마였는데, '파묻힌 거인'은 용과 도깨비, 전사와 기사가 등장하는 판타지다. 


국적도, 연도도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의 어느 세상의 어느 인간(혹은 종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판타지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드라마는 빛을 발한다. '남아 있는 나날'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훗날 회고를 통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반성, 자기 성찰 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자신의 주인을 한없이 훌륭한 신사였다고 믿었고, 그런 주인을 성심을 다해 모셔온 자신 역시 최고의 집사였다고 자부하는 스티븐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티븐슨은 그토록 훌륭하다 믿었던 주인이 나치를 위해 일한 전범이었으며, 유대인 하녀들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하는 등 그리 훌륭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인을 악당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을 악당으로 치부한다면 그를 위해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한 스티븐슨의 삶조차도 무너지게 된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악당의 충실한 부하 노릇밖에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스티븐슨은 예전부터 자신의 주인이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것을 종종 지켜봤었다. 적어도 그런 낌새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주인의 허물들을 애써 지워나갔던 것이다. 집사로서 누구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흠결하나 없는 훌륭한 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년에 가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만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려 한다. '스티븐슨의 역사'를 송두리 째 부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파묻힌 거인'에서도 비슷한 고뇌와 갈등, 반성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암흑의 시대를 무력과 전쟁으로 종결지은 아더 왕의 역사가 등장한다. 무력과 전쟁, 피와 폭력으로 성취한 평화와 영광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무력으로 성취한 평화는 언제든 무력으로 다시 깨질 수 있다. 이쪽 종족이 모조리 죽어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저쪽 종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쪽 종족이 남아 있으면 이쪽 종족의 평화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는 저쪽을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전쟁과 평화. 반복되는 전쟁과 평화 속에서 쓰이는 피의 역사. 작가는 이 피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바라보고, 상기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들의 마을을 찾아 떠나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등장한다. 그들은 망각의 입김을 지닌 용의 횡포로 인해 과거의 기억들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서서히 기억이 돌아올수록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잊었던 기억은 잊었던 역사를, 잊었던 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진 기억들은 모조리 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때 칼을 쥔 내 손으로 어린 소년에 불과한 적병의 목을 친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평화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젊은이들의 육신을 베고, 찌르고,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수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인들에게서 아버지와 남편을 앗아간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던가.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런 만행들이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만행은 되풀이될 것이다. 피의 역사는 번복되지 않으면, 반복된다. 

액슬은 괴로워한다.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면 역사도 부정된다. 평화의 의미도 퇴색된다. 기억과 망각의 기로에서 액슬은 고민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용의 처단을 두고 늙은 기사와 젊은 전사가 대립하는 소설의 절정 부분에 있다. 

늙은 기사는 용을 지키고 싶어 하고, 전사는 용을 죽이려 한다. 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기사와 전사의 마지막 싸움은 읽는 이를 숨 막히는 전율로 몰아간다. 

피로 승리를 쟁취하고, 피로 역사를 세운 장본인은 역사의 전권을 손에 쥐는 순간 '피'는 지우고 '역사'만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울 수만 있다면 '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려 드는 것이다. 그에게는 망각의 입김을 내뿜는 용이 필요한 것이다. 용의 죽음은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다시 깨진다. 피 흘리며 죽어간 종족의 후예들이 눈을 뜨는 순간 다시 세상에는 피가 뿌려진다. 그래서 늙은 기사는 이미 병들고 지친 용을 끝까지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작품은 결말로 갈수록 깊은 비애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강하고 무서웠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하고 몰락하기 마련이다. 한때 사바나를 주름 잡았던 건강한 수사자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병들기 마련이고, 결국 또 다른 젊은 수사자에게 무리를 빼앗기고 쫓겨나거나 죽음을 맞는다. 목숨을 걸고 용을 지키려는 늙은 기사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용을 죽이려는 젊은 전사의 먼 훗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전사도 나이 들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을 부수고 없애고 싶어 하는 누군가와 맞서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잔인한 것이고, 역사는 잔인한 시간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상처와 후회의 그림자를 남긴다. 

역사 속에 깃든 망각의 그림자들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망각의 그림자 속에 덮힌 핏자국들을 다시 일깨워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의 줄기 속에는 더 이상 핏자국도, 그것을 덮을 망각의 그림자도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    

이 쓸쓸한 판타지를 통해 작가가 던진 질문들은 간단하다면 간단할 수도 있는데 나는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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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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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크리스마스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코패스의 광기와 유머.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와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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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앤 드 마르켄 지음, 송예슬 옮김 / 허블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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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부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처음에는 좀비를 소재로 한 아포칼립스 소설처럼 읽혔다. 매우 사색적이고 몽환적이고 또 아득한 애수가 깔려 있었다. 소설을 읽어 나갈수록 공포를 다루는 게 아니라 상실과 애도를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하거나 참담한 묘사도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거나 몸이 절단되며 썩어가는 장면이 등장해도 크게 무섭거나 좀비를 소재로 한 기존의 공포소설 같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마치 그 장면을 꿈속에서 응시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비애, 아득한 슬픔이 느껴질 뿐이었다.


작품 속 화자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 있는 존재다. 어떻게 해서 좀비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오랜 시간 좀비로 살아왔다. 어느새 왼팔이 떨어져 나간 신세가 되었다. 어떤 이는 손가락을 잃고, 어떤 이는 더 중요한 신체 부위를 잃기도 한다. 좀비의 몸이란 그런 것이다. 주인공 여자는 한동안 떨어진 자신의 왼팔을 들고 다니다가 끝내 불태운다. 왼팔이 없는 존재. 심장이 뛰지 않는 존재. 그럼에도 뇌는 살아 있는 듯 끊임없이 사색하고 회상한다. 그녀는 텅 빈 자신의 몸 한 쪽에 죽은 까마귀를 넣고 다니기도 하며, 또 다른 신체가 분리되기도 한다. 이러한 신체 훼손은 공포나 고어를 위한 묘사가 아니라 화자가 조금씩 자기 자신을 상실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몸이 망가지고 사라질수록 그녀의 상실감과 고독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렇게 좀비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상실을 그린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어간다는 건 조금씩 몸을 상실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화자는 끊임없이 '너'라는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이 '너'라는 존재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처음에는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독자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작품 속 그녀가 유산을 경험한 적 있음이 밝혀진 이후부터 '너'의 존재가 다르게 해석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아닐까. 간혹 '너'가 '우리'로 변하는 장면에서 더 안타깝고 애절한 감상이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상실하기에 앞서 먼저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했던 것이다. 한때 같은 몸 안에 존재했던, 그러나 생살을 찢는 듯한 아픔을 남기며 떠나가 버린 소중한 존재에 대한 상실감.

이 소설은 어쩌면 작품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애도문일지도 모른다. 유산은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경험이다. 소설 속 화자의 상실은 정신적인 슬픔에 그치지 않고 육체 전체에 각인되어 있다. 그녀가 죽은 까마귀를 몸속에 품고 다니는 장면 역시 사라진 존재를 몸에서 떼어내지 못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죽은 아이를 대신해서 몸 안에 키우는 죽은 까마귀. 그것은 기괴하면서도 동시에 처절함이 느껴지는 짙은 비애와 허무의 절정처럼 보였다.


소설 속 화자는 사실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듯했다. 몸은 흩어져 사라지길 원하고, 마음은 계속해서 과거를 붙잡고 기억하려 하는 것이다. 소설 결말 부는 그래서 더욱 아련하고 비극적이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분리된 화자의 신세가 처량하고 안타까웠다. 조각조각 떨어졌던 몸은 결국 본능이다. 본능은 실체를 찾아 떠난다. 마음은 이성이다. 이성은 끝까지 기억할 수 있는 것에 머물고 붙잡으려 한다. 몸은 마침내 돌아갔지만 의식은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 결국 남겨진 것은 슬픔을 기억하고 상실을 생각하는 정신뿐이다. 비극은 그렇게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극. 삶의 비극.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나는 존재의 비극.

이 작품에 대한 독서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처음에는 서서히 마음에 진동을 일으키다가 나중에는 온통 마음을 뒤흔들었다. 문장은 시처럼 함축적이고 몽환적이며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편적이지만 그것이 바로 상실 이후의 감각인 것이다. 독자는 그 감각을 추체험할 수 있다. 설명되지 않는 슬픔, 끝나지 않는 애도, 현실과 기억이 뒤섞이는 상태가 문체 자체에 스며 있었다. 공포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결국 상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찰이고 드라마였다.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몸이 사라져도 기억은 남을까. 잃어버린 존재는 정말 완전히 사라지는가. 존재는 사라져도 존재에 대한 기억은 남는다. 그 기억을 붙들고 산다면 존재도 살아 있는 것일까. 작가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과 상실에 대한 아득한 애수와 노스탤지어가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출간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2024년 어슐러 K. 르 귄 소설상을 비롯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화를 준비 중이라고 하는데 기대된다. 분량은 짧지만 홍보 문구의 호언처럼 독서 후 깊은 감상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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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앤 드 마르켄 지음, 송예슬 옮김 / 허블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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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의 사색. 애도의 기록. 잃어버린 ‘너‘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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