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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이 책, 너무 웃긴다. 이 작가, 전직이 코미디언 아냐? 싶을 정도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예상치 못한 유머들이 마구마구 튀어 올라, 시종 웃다가 책장을 덮게 된다. 그리고 웃음의 자락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경쾌한 힘이 가득가득 실려 있다.
2004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공중그네'의 주인공 이라부와 마유미 커플이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인더풀'은 2002년에 출간되었고, '공중그네'에 앞서 먼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하지만 출간 시기 따윈 상관없다. 엽기 커플이 엮어가는 에피소드들은 제각각 독립적이라 어느 것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이라부와 마유미만 등장하면 그저 만사가 OK다!
(물론 전체적으로 '공중그네'가 '인더풀'에 비해 별 반 개 정도 더 앞선다. 보다 완성된 이라부 캐릭터를 보고 싶다면 '공중그네'를 필히 읽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세상 모든 고민과 문제들을 일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엽기 커플이 있다. 어린 아이 같은 대책없는 순진함과 황당한 장난끼로 똘똘뭉친 거대한 체구의 엽기 의사 이라부와 매사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사만 놓는 육감적인 몸매의 미녀 간호사 마유미가 그들이다.
환자(처음에는 분명 환자라고 인식한다)들은 그들의 지하 세계로 발을 들인 후, 차츰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끝내 멀쩡한 사람이 되어서 지상으로 걸어나간다. 그 지하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마법사도, 초능력자도, 외계인도 아니다. 특별한 약물을 투여하는 것도, 거창한 수술 같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꾸준히 주사만을 놔 줄 뿐이다. 그리고... 그냥 노는 거다. 주사 맞고, 한바탕 신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병 따위는 없다. 자신이 지극히 정상인으로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라부의 처방은 간단하다.
환자와 똑같은 위치에서 같이 노는 거다. 그렇게 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완화시킨다. 완화된 문제를 환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직시할 수 있도록 만든다. 가만히 직시하면 지금껏 심각하게 끙끙 앓아왔던 그 문제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스스로 자각한다. 자각의 순간 환자는 더이상 환자가 아니다. 환자는 유쾌한 발걸음으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라부는 환자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찰싹)달라붙어 그저 신나게 논다. 신나게 놀고 나면 환자는 사라지고, 그저 인간만 남는다. 지하 세계에서 장난꾸러기 이라부와 무뚝뚝한 섹시녀 마유미와 더불어 잘 놀고 지상으로 올라서면, 환자는 인간으로 돌아가고, 덤으로 세상을 살아갈 충천된 힘까지 얻게 된다.
현대인은 많은 문제와 스트레스 속에서 늘 인상을 찌푸리며 살아간다.
무엇을 하든 인상을 찌푸린다. 거지도, 부자도, 잘난 놈도, 못난 놈도, 학생도, 어른도... 그래서 찌푸리는 게 병인줄 안다. 심각하게 병원을 찾아와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고 있는지를 토로한다.
그러나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99%는 그저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다. 찌푸린 인상을 그저 펴기만 하면 대부분 사라지는 문제들이다. 더구나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99%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이 억지로 문제를 껴안고 있는 경우들이다.
이라부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가슴에 안고 있는 문제들을 스스로 놓아버리게 만든다.
문제 해결은 그렇게 간단하다.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는 일면 엄청나게 심각해 보여도, 또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인더풀'에는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다섯 명의 환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환자가 아니다. 환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환자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환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마다 안고 있는 문제들은 현대인들의 99%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바로 '강박증'이다. 현대인은 대부분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강박증은 따로 치료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강박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도 대단히 어려울 수도 있고, 또 대단히 쉬울 수도 있다. 지상의 세계에서 본다면 어려운 일일 수 있으나, 이라부와 마유미가 사는 지하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된다. 그래서 이라부는 환자들의 고민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 이라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고민이 전혀 심각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라부는 자신과 똑같은 심정을 환자가 느끼도록 해 준다.
즉, 네가 안고 있는 문제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 나처럼 해 봐라. 나를 따라 해봐~ 아, 그 전에 일단 주사부터 한 대 맞고~ 명색이 병원이니 주사는 맞아야지~ 더구나 엄청나게 섹시한 미녀가 놔 주는 것이니 안 맞을 수 없잖아~ 자, 한 대 맞고, 노는 거야~ 놀다보면 인생은 즐거워지고, 그 딴 고민은 인생을 즐겁게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당신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는 어쩌면 아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지하 세계에서 이라부와 마유미를 만나보면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즐겁고, 천진난만하게, 이라부처럼 말이다.
'남쪽으로 튀어', '공중그네'에 이어서 세번째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으며 새삼 감탄한다.
이 작가, 정말 프로다! 작가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 정도 유머에, 이 정도 스토리는 만들어 낼 줄 알아야 작가지! 그 참, 이야기 같지도 않은 구태의연하고 싱거운 이야기를 들고 작가랍시고 폼 잡는 짝퉁 작가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오쿠다 히데오 같은 출중한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필시 행운이다. 고민남녀가 이라부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