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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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두번째 소설집은 대체적으로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무 이상 없이 견고하게 지켜왔다고 믿어온 당신의 오늘이, 가치관이, 어느 순간 금이 가거나 무너져 내린다면, 벌어진 틈새 사이로, 무너진 조각들 사이로 당신이 전혀 짐작하지 못 하고 있던 진실이, 혹은 생의 이면이 드러난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당신의 오늘은 과연 안전한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주제를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삼풍백화점'이다. 고도로 성장한 자본주의의 표상과도 같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나'의 마음 한 켠도 무너진다. 그 한 켠에는 20년 가까이 제도교육의 장에서 길들여 진 나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종속되어 구태의연하게 지내왔던 지난 24년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것들이 무너지면서 기성세대가 이룩한 사회 가치관에 편입되어 어정어정 걸어왔던 나의 삶에도 변화가 생긴다. 24년을 지배해 온 무료하고 무력했지만, 무탈했던 세계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즉, '나'는 그 이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분히 작가의 자전 소설로 읽힐 수 있는 '삼풍백화점'은 이 소설집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담고 있음은 물론, 전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실린 소설들과는 시선과 주제와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 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첫번째 소설집 이후 4년만에 정이현의 시야는 더욱 먼곳까지 틔였으며, 말하고자 하는 주제 또한 보다 보편적인 공감과, 대중적인 감동을 아우를 수 있는 쪽으로 변했다.
정이현은 확실히 변했다. 첫번째 장편인 '달콤한 나의 도시'는 다분히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연장선 상에 있는 듯 했으나, 두번째 소설집인 '오늘의 거짓말'은 앞서의 두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정이현 특유의 순발력과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으나, 시선은 더욱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워졌으며, 다루는 이야기와 주제는 보다 넓고, 깊어졌다.
 
또한 번득이는 상상력도 전작들에 비해 훨씬 좋아졌는데, 그래서 이번 소설집에서 그야말로, '소설적 재미'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이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든다. 현실을 뒤흔드는 생각(상상)지도 못한 난감한 사건(균열)이 발생하고, 이야기는 위태롭게 약동하며 결말을 예측할 수 없게 한다.
이혼한 전처가 키우던 개가 어느날 택배로 배달되어 지고, 마흔아홉번째 생일날 아들이 저지른 기막힌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고, 아파트 위층에서 이미 죽은 전직 대통령을 만나고, 담배를 사러 나왔다가 아파트 문이 잠겨 거리를 배회하고 몸에서 이상한 악취가 나기 시작하고, 2022년 미래의 한 연구원이 2004년 과거 한 여고생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게 되고, 정신상태가 스물다섯살에서 멈춰버린 친구를 만나게 되고, 유아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남편을 의심하게 되고, 흠 잡을 것이 없어 보이던 유능한 남자친구의 기이한 성적 취향을 알게 되고...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섬뜩한 현대인의 초상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신선한 문장들로 속도감있게 그려진다. 가슴을 졸이며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리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솔직히 정이현이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첫번째 소설집을 읽었을 때만 해도...
시종 인상을 찌푸리며 정말 짜증스럽게 읽었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비해 '오늘의 거짓말'은 같은 작가가 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읽었다. 흥미진진하게, 감탄을 하면서...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분위기로 소설을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여성들의 쿨한(척 하는) 연애담은 이제 그만 쓰고, '삼풍백화점'이나 '오늘의 거짓말' 같은 소설들을 더 많이 써 줬으면 좋겠다.
이런 소설집이라면 책값 만 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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